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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시대사] 영락제

취문 2021. 6. 1.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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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락제 시기(1402~1424)]

 

1. 정난(靖難)의 변(1398~1402) : 홍무제 주원장이 죽고 나서, 손자 건문제가 황제에 올랐습니다. 이 건문제가 주변 신하들의 건의를 받았는지, 각 삼촌들의 분봉지를 깎는 삭번을 하게 되는데, 그에 대해 당연히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 대표자가 연왕(燕王) 주체(朱棣)라는 이입니다. ‘은 춘추전국시대부터 현재의 북경 인근의 지역을 일컫습니다. 고로 북경의 다른 이름이 연경입니다. 연왕 주체가 거병하여 남경을 함락시키고, 정난의 변을 성공시킵니다. 그리고 황제로 즉위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영락제(1402~1424)입니다.

정난의 변에 반대했던 대표적인 유학자는 방효유라는 이가 있습니다. 영락제는 방효유를 데려오려 했으나, “연적찬위(燕賊簒位)”, 즉 북경의 도적놈이 황위를 찬탈했다고 이야기하니, 연왕 주체는 당연히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그의 일족을 죽이고, 방효유는 몸을 찢어 죽였습니다. 

 

연왕(燕王)이 여러 장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조훈(祖訓)에는 ‘조정에 바른 신하가 없고 안으로는 간악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를 훈련시켜 이를 토벌하여 군주 옆의 악을 깨끗하게 하라(靖難).’라고 하였다. 의로운 자와 간사한 자는 한 하늘 아래 더불어 살 수 없으니,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반드시 악인을 토벌하여 사직을 편안하게 하겠다.” - <<국조전고(國朝典故)>> 권11, <봉천정난기(奉天靖難記)> 건문 원년(1399) 7월; 박민수 교수님 강의;  2014 전공역사 임용시험

 

정난의 변 과정에서 환관들이 연왕 주체의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전까지 주원장이 그나마 잘했다고 할 만한 것은 환관을 정치에 결코 끌어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왕 주체에게 고급정보를 흘려주어 환관이 공신이 된 것입니다. 당연히 환관들은 대우를 받으려 하겠고, 결국 명나라만큼 환관의 폐해가 심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2. 영락 19, 1421년 북경 천도 : 영락제가 집권한지 19년만에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합니다. 그러다보니 북경에는 다시 물자유통 문제가 되겠죠? 이 때에 다시 영락제가 대운하를 정비하게 됩니다. 수양제는 욕을 먹었는데, 영락제가 아주 잘 사용해먹었습니다. 물론 영락제가 처음 대운하를 정비하고자 하였을 때 신하들이 많이 반대를 하곤 했지요.

 

천하에 강남 지역이 있다는 것은 마치 부잣집에 창고와 장롱이 있는 것과 같다. 예컨대 돈 많은 부잣집 아들이라면 창고와 장롱은 반드시 몸소 지키고, 그 문과 뜰은 하인들에게 맡길 것이다. 남경을 버리고 수도로 삼지 않은 것은 하인에게 창고나 장롱을 맡기는 것이고, 북경천도는 몸소 문이나 뜰을 지키는 것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지혜가 돈 많은 부잣집 아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는가? - 황종희, <<명이대방록>>; 2014 전공역사 임용시험

 

"연왕 주체 영락제가 영락 19, 1421년에 불안한 남경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북평으로 천도하였습니다. 그렇게 북평은 북경이 된 것이고, 고로 북경-남경의 개념이 형성된 것이죠. 3년에 걸친 북평 점령은 환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이루었으나, 여러가지 딜레마에 빠졌습니다."(박민수 교수님)


* 2014년 1번 : 정난의 변의 직접적 원인을 쓰고, 북경천도의 정치적 목적을 세 가지 쓰시오.

1. 원인 : 삭번정책

2. 북경천도의 정치적 목적 : 1) 북방의 몽골로부터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 2) 연왕 주체 자신의 근거지였던 곳이 북경 3) 화북지방의 정치,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여 중국 전역의 균형있는 국가발전을 기획했음. 

 

"영락제의 북경 천도계획은 자신의 근거지라는 의미 이외에도 북방지역 방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영락제 스스로가 전방에서 군사력을 직접 장악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 와 경제의 중심이 일치하는 남경은 공급과 소비가 이곳에 집중되어 번창하는 대신 화북지방은 정치적인 면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소외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남경에 수도를 두는 것은 전중국의 통치라고 하는 차원에서 볼 때에 지방국가의 성격을 띄게 되어 통일체로서의 국가발전을 꾀할 수 없는 불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락제의 북경천도는 장래를 내다 본 영단이라 하겠다."(동양사개론)

 

한편 정화라는 환관이 뱃길로 파견되었습니다. 정화는 무슬림입니다. 무슬림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명나라는 계속해서 원이라는 오랑캐의 문화를 밀어내려 하는 것이고, 중화를 회복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슬람교 신자를 황제의 최측근으로 원정을 보낸다는 기묘한 일입니다. 게다가 환관이 대외원정을 나가거나 사신으로서 활용되지 않았는데, 정화를 등용하여 1405~1431년간 6차례 남해원정을 시켰습니다. 무슬림 환관라면 명나라의 정세 속에서 아웃사이더 중 아웃사이더입니다. 본래 무슬림에 환관으로서 유교에서는 결코 인정될 수 없는 이입니다.

정화가 출사하면서 인도양 방면의 지리 지식이 늘긴 했는데, 송대 원대부터 있어왔던 지리 지식에 더하여, 국지적으로 알려졌던 여러 정보들이, 중앙에 의해서 그 정보들이 직접 수집되었던 의의가 있습니다. 중앙 관찬사서에 그 정보가 입수가 되고, 명 중기 이후 서역에 대한 정보들이 문인들 사이에 많이 퍼지게 됩니다. 호르무즈, 참반국 같은 나라들이 서양대국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서쪽의 공간을 서역 따로 서양 따로 부르던 것을 하나의 공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명 후기의

 

 

4년의 정난의 변을 거쳐 남경이 정복되었고, 그 위에 3대 영락제(1403~1424)가 올랐습니다.

1. 남경함락 : 귀화한 몽골기병부대를 등에 업은 영락제가 남경을 함락할 때에 환관들이 도왔습니다.

2. 환관 특무기관 동창설치 : 영락제는 환관들의 특무기관 1420동창을 설치하여 회답했습니다. 그래서 명대에 환관들이 권력을 휘두르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환관은 전국에 파견되어 군대를 감독하고 세역징수에 관여하며 관민을 감찰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리하여 동창은 일반관료들을 지배하는 환관들의 거점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 장관인 사례태감(司禮太監)’의 권한은 막강했습니다. 황제 조칙의 전달을 맡은 동창의 장관 사례태감은 그 조칙에 자기 뜻을 가미하기도 했습니다. 본래 사례태감은 사례감의 장관이었는데 그가 동창까지 장악하게 된 것이니 중앙 내에서 권세가 대단했던 것이죠.

3. 행재소 설치 및 북경천도 : 영락제는 북평을 북경이라 고치고, 행재소를 이곳에 설치하여 신궁전을 완성한 뒤 1421년에 천도하였습니다.

4. 성리대전과 영락대전 : 그리고 <성리대전>, <영락대전> 등을 편찬합니다.

5. 타타르부와 오이라트부 정벌을 떠남

6. 흑룡강 인근 여진 정벌과 누르칸도사 설치 : 영락제는 연해주 쪽 흑룡강 인근 여진족을 정복하여 이곳에 누르칸도사를 두게 됩니다.

7. 안남정벌 실패 : 한편 베트남이라고 할 수 있는 안남 정벌도 실시합니다. 그리하여 교지포정사를 설치하여 명의 직할지로 하였지만, 안남인은 끊임없이 저항하여 1427년에 독립을 인정받습니다. 이 당시 베트남 왕조는 레 왕조가 형성된 것이죠.

8. 정화의 원정 : 영락제에 의한 정화의 남해원정은 국위선양, 교역, 건문제 수색이라는 세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 그 결과 중국은 30여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동남아시아에 화교진출의 기반을 만들었다.”(동양사개론)

9. 내각제도 확립 : “영락제는 즉위 초에 강력한 보필기관의 필요에서 해진, 양영, 양사기, 호광 등을 문연각에 입각시켜 국무에 참여하도록 하고, 영락 14년부터 이들에게 전각대학사를 제수하면서 명실상부한 내각제도가 출현하였다. 이들 각신(閣臣)은 모두 한림관(翰林官)을 제수받고 입각하였는데, 이때까지도 내각은 국무를 결정하는 권한은 없고 단지 황제의 개인적인 고문관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계속해서 용렬한(쓸모없는) 황제가 즉위하여 전제권 행사가 불가능해지자 자연히 내각과 환관이 환관권력을 배경으로 서로 대립과 당쟁을 벌이면서 전권을 행사하여 환관과 내각대학사 정치가 출현하게 되었다.” 내각대학사는 본래 황제가 결재해야 할 내용을 미리 준비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입니다. 이들의 수장인 수석대학사는 수보라고 불리지요. 위에 동개론에서는 황제가 쓸모 없었기에 내각대학사가 강력해졌다 하지만, 문관의 지위 상승이라는 요인도 있습니다. 성조 영락제의 다다음 후임자로 손자 선종이 다스리는 명나라는 드디어 정복이나 전쟁이 줄어들고, 무력보다는 문치가 중시되는 시기였기 때문이지요. 영락제 때 자리잡은 환관들도 이제는 서기관이나 국정에 참견하는 일까지 있었으니 말입니다. , 환관들의 기관인 사례감이 황제에게 올라가는 문서를 처리하게 된 것입니다.. 홍무제라면 분명히 반대했을 조치입니다. 그리고 영종 시기에 사례감 태감으로 기용된 영종의 스승이면서 환관인 왕진이 군사적 소양도 없으면서 몽골 정벌에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영종이 잡히는 토목보의 변을 당하고 맙니다. 물론 영종이 돌아와 탈문의 변을 일으켜 복위하긴 했으나, 이미 환관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진 이후였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황제독재체제에 대해 평가를 해야겠지요. 명말 청초의 황종희는 <<명이대방록>>에서 명대의 정치가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 황제독재체제 때문이고, 그 일환인 명태조의 3성 폐지와 6부를 황제 직속으로 만든 것에 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황종희는 독재체제를 아주 싫어하기에, 명대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요. 그리하여 이 사람은 일조편법을 명대의 양세법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입장은 훗날 살펴봅니다. 중서성 폐지 및 6조 직계 이후 황제의 비서기관으로 설치된 전각대학사의 설치는 오히려 환관세력의 강성을 불러왔습니다. 그렇게 비서기관 대 국무기관 간의 대립이 일어나게 됩니다.

혜제 때 방효유, 제태, 황자징 등이 한림학사 출신입니다. 대학사라는 명칭이 본래 없었으나, 국무에 참여하면서 내각의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전각대학사라는 것에서 내각이라는 것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내각제도가 확립된 것은 영락제 시기였지요. 영락제가 죽은 후에는 인종이 즉위하고, 양사기는 예부시랑, 양영은 태상경으로 내각대학사를 겸하게 되고, 그 외에 내각대신도 고관을 겸직하면서 그 지위가 급상승하게 됩니다. 인종 직후에 선종이 등장을 하고 양사기, 양영, 양부 - 이른바 3양이 상서직을 겸하고 내각대학사의 실권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리고 성종이 죽고는 영종이 나오고서도 내각대학사의 권력은 강했습니다. 내각대학사가 결정적으로 강해진 것은 영종시기 인질로 잡혀간 토목보의 변(1449) 시기에 황제의 복위에 이현(李賢)이라는 인물의 도움이 컸던 것을 계기로 합니다. 토목보의 변 이후에 동생 경태제(1449~1456 재위)를 몰아내는 탈문의 변을 통해 영종이 내각을 등에 업고 권력을 다시 잡습니다. 내각대신 중에 제일 우두머리격인 수보(首輔) 제도가 제정되니, 수보는 재상과 같은 실권을 갖게 됩니다.

결국 영종시기 토목보의 변이 있고, 다시 살아와서 재기하는 과정이 탈문의 변이고, 이현의 도움도 있고 환관의 도움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현을 통해 내각수보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수보는 재상과 같은 실권을 갖게 된 것이고, 토목보의 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영종의 생전 황제명이 정통제, 그리고 탈문의 변 이후는 천순제입니다. 그리하여 정통제와 천순제 모두 영종이라는 것까지 부가적으로 알아둡니다.

이제 가정제 세종이 나옵니다. “세종 가정(嘉靖, 1522~1566) 대례논의가 발생하면서 내각이 공론을 내세워 황제권과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대례논의는 세종의 전부[흥헌왕(興獻王)]에 대한 예우문제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송대 영종의 복위문제와 거의 유사합니다. 왕이 되었는데 직계가 아니라서 친아버지를 어떻게 부를지의 문제입니다. 송 영종의 복위, 명 세종의 대례논의. 결국 이 대례논의 과정에서 무조건 내각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이런 과정에서 황제의 권력강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설쳐봤자 황제의 손바닥 안이라는 것입니다.(~549) 세종이 대권을 발동하여 양정화 등 반대파를 실각시키고 대례파 관료만을 기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답니다. “그런데 대례논의 문제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고 황제권과 신하권이 대의명분을 표방하면서 강력하게 대립한 정치권력의 구조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내각이 예론을 수단으로 과도관(科道官)을 동원하고 공론에 의해 황제권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각의 권한이 강해지면 사당(私党)이 생겨 황제권이 침해된다는 군주일원적전제론을 내세운 대례파에 의해 이들의 집단행동은 붕당결성으로 비난받아 내각의 분권공치 주장은 좌절된 것이다.” 여기에서도 주의할 것은 내각의 분권공치라는 것은 - 일반적으로 명대의 신사계층은 대개 군벌로 이어지는데, 이들은 중앙권력을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신사층을 염두에 두고 중앙권력에 반대한다고 분권이라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러나 이것은 성격이 좀 다릅니다. 황제 대 신사층의 구도라기보단, 황제가 있고 내각의 권력 싸움이고, 결국 황제가 이겨서 분권이 좌절되었다는 정도입니다.

밑에 문단은 명대의 수보권은 만력제 장거정에 이르러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장거정은 당장 내각 수보가 걸리지만, 한편 신종의 업적, 대외관계 등등 많은 꼭지에 걸립니다. 심지어 지도와 조세제도와도 많이 관련되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의 개혁 내용은 고성법과 일조편법뿐이긴 하지만, 다양한 관련내용들이 있는 것입니다. 일단 내각과 관련하여 수보권을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장거정에 이르러 명대 신사층의 확대와 공론에 의한 분권공치의 주장은 장거정이 죽은 후에 당쟁과 연계되면서 더욱 거세집니다. 그래서 이 당시에 장거정은 신사층에 철저히 독재자라고 비판받고, 사후에 무덤을 꺼내져 시신을 훼손당할 정도였습니다.

내각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장거정까지 온 것이고, 장거정 때에 절정에 다다랐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각이라는 말은 의미 없어집니다. 이제 환관 권력이 하늘을 찌르기 시작합니다.

영종시기 왕진과 헌종시대 왕직 등에서 환관의 횡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정대에는 환관의 횡포와 관련하여 토목보의 변이 일어나 몽골 에센의 포로가 된 것이지요. 다시 돌아와서 탈문의 변을 일으키는데, 대학사 이현과 환관 조길상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환관 조길상이 이현과 대립하다가 군사정변 계획을 들키는 바람에 주살된 것으로 이 대립은 마무리이지만, 환관의 권세 전반이 대단했던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헌종 시기 환관 왕직의 전횡은 심각했습니다.

동창에 이어서 유근이라는 자에 의해 서창과 내창이라는 기관이 등장했습니다. 그렇게 환관의 횡포는 정보정치를 행하며 더욱 더 심각해졌습니다. 명대 환관은 희종 시기 위충현이 등장합니다. 위충현 일파인 환관들이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가니, 내각에도 반대하고 환관에도 반대하는 신사층의 반대여론이 확산됩니다. 그들이 바로 동림파입니다. 그렇게 위충현 중심의 환관파와, 신사층 중심인 동림파의 대립으로 그 정쟁이 절정에 이릅니다. 결국 그 끝은 동림파의 실각으로 환관에 의한 정치 및 사회적 부패가 극심해집니다. 농민들을 다 뜯어먹게 되고, 반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란 와중에 무너져가는데, 만력제 시기에 대외적으로도 힘들어지는 것이죠. 바로 북로남왜 상황입니다.

명의 정치에서 1. 내각의 권한이 비대해지고 있고 2. 환관의 권세가 비대해진다는 것까지 주목해야 합니다. 그 다음 왕조의 과제는 내각과 환관을 죽이면 끝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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