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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23

[중국사 정리노트] 당나라 - 당고조 이연, 당태종 이세민, 측천무후

[당나라] 1. 당고조 이연 : 618년에 수 문제 중신이자, 수 양제의 이종사촌인 이연이 당나라를 개창합니다. 고조 이연에서 ‘고조’는 묘호입니다. 이연 역시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서위-북주-수-당 사람들이 모두 관롱집단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고조 이연은 관롱집단 중심으로 하여 황제를 오릅니다. 8주국 출신 조부의 세력을 이어받아 수나라시기부터 권력을 얻어나갔던 이연은, 수가 무너지자 반기를 들었습니다. 2. 당태종 이세민 : 당의 황제라고 했을 때, 당고조 이연보다는 당태종 이세민이 유명합니다. 이세민은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위협하는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당태종 시기는 ‘정관의 치(626~649)’라고 불렸던 시기로 좋은 시기였나 봅니다. 정관(貞觀)은 연호입니다...

중국사 2021.06.04

[명나라 시대사] 백련교 홍건적의 난, 홍무제 주원장

[중화의 회복과 북경 천도] 강력한 원나라에도 다양한 반란세력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백련교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백련교는 불교의 일파로 동진의 승려인 혜원(334~417)이 노산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제자를 모아 조직한 백련사에서 기원한다. 염불삼매를 수행하며 아미타불을 믿었으나 당대에 미륵불을 신봉하면서 미륵불의 내세를 믿고 현세를 부정하게 되었다. 원말에는 페르시아에서 전파된 마니교(明敎)의 영향을 받았고, 여기에 미륵불신앙이 합세하여 현재의 곤궁한 백성을 미륵불이 와서 구제하여 준다는 메시아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백련교의 교주 한산동(韓山童)은 사회의 혼란을 틈타 자신이 미륵불의 환생이라 하여 농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의 신도 유복통(劉福通)은 한산동을 송 휘종의 8세손이라 선전하면..

중국사 2021.06.01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위진남북조 시기의 귀족사회

[북조의 귀족사회에 대한 평가]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선비족은 한인 호족(豪族)의 협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선비족들은 한인 농민을 사역하여 전란으로 황폐화한 화북지방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는데, 여기에 정복자로서 선비족과 한인호족과의 긴밀한 관계가 성립된 것입니다. 그런데 16국 및 북위정권 하의 한인 호족은 남조의 귀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북조 같은 경우에는 화북통일 과정에서 한인호족의 협조를 필요로 했는데, 이 호족들은 끝까지 저항해나갔습니다. 그들은 5호의 전란을 화북에서 견디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이를 극복하였다고 하는 강한 자부심과 함께 전통적인 화이사상을 바탕으로 강한 중화의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습니다.(동양사개론) 북위정권은 호족의 협력을 ..

중국사 2021.05.25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남조 - 송, 제, 양, 진 (2)

지난 번에 남조 정권의 성립의 메커니즘에 대해 정리를 했다면, 이번에는 몰락의 메커니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함. 1) 한문무인 : 귀족의 몰락은 한문무인 - 못 배운 무인출신자들, 그리고 은행(恩幸), 상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을 창건한 유유라는 인물이 이 한문무인을 대표하는 자였고, 그와 같은 계층 출신자들이 대두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송]무제의 정권장악과 황제즉위과정에는 군사적으로 한문무인의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한문세력은 동진 말 부군(府軍; 서부 군단과 동부 군단)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는데, 당시 귀족들의 군사적 지배력이 상실되면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무인들의 역할이 확대되고 그들의 정치적 권한이 증대되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기 시..

중국사 2021.05.25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남조 - 송, 제, 양, 진 (1)

[남조 - 동진의 성립] 그렇게 흉노 계열 유총의 한나라에게 311년에 서진의 수도 낙양이 점령되자, 서진의 대신인 순번 등이 왕족 출신 사마예를 맹주로 세워 만족에게 대항하자는 격문이 띄워졌고, 강남에서 화북민에게 저항하던 호족 주기는 남하하는 화북민 세력들과의 전쟁(오흥의 소란)에서 용맹하게 싸웠음. 그런 한편 강남호족의 총사령관인 왕돈은 도망을 갔음. 그러나 호족 주기는 겁쟁이 같은 왕돈의 지시를 받는 입장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으니,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음. 한편 312년에 강남호족의 연합을 묶어왔던 강력한 호족 고영이 죽었음. 서진의 순번이 띄운 격문은 강남 사회에 퍼져, 촌뜨기인 강남 귀족과 선비(사인)들이 사마예를 중심으로 한 서진 출신 왕실에 모여들었음. 그런 한편 강남을 이끌어 왔던..

중국사 2021.05.22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북위의 분열 - 동위와 서위

[육진의 난] “화북으로 이주한 선비족은 점차 귀족화하면서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리하여 낙양으로 옮겨와서 한화된 선비족과 그렇지 못한 북방의 선비족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이러한 갈등은 다음 525년 효명제 때에 6진의 반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북위는6진의 반란이 일어나자 산서성 북부에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의 추장 이주영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려 하였다. 이때 낙양에는 효명제의 모친 호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환관과 폐신을 중용하여 정치가 문란하였다. 효명제가 성장하여 호태후와 충돌이 생기자 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유제를 옹립하였다. 이주영은 수도 낙양에 들어와 태후와 유제를 체포하여 황하에 수장하고, 조정의 백관과 왕공 이하 2천여 명을 학살한 후 효장제를 세웠다.(하음의 변) ... 6진의..

중국사 2021.05.22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선비탁발족의 대국(代)과 북위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선비탁발족의 대국(代)과 북위 북위의 전신인 선비 탁발족의 대국의 형성과정부터 짚어봄. 바야흐로 선비 탁발족의 대국(代國) 시대. 일개 오랑캐였던 선비족은 알선동(가센동) -> 하일라르 초원 -> 평성 -> 낙양 순으로 나아가 대당제국을 만들게 됨. 근데 선비 탁발족은 영가의 난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호와의 차별화 정책을 시도해야 했음. 그리하여 한족에 접근하게 된 것. "전진은 비수의 전쟁에서 383년 강남의 동진에게 패하여 붕괴되고, 선비족의 북위(후위)가 화북을 439년에 재통일하였다. 534년을 기점으로 북위는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고,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계승되어 나갔다. 수가 중국을 재통일하기까지 150년간(439~589) 화북에 건국한 북위 이하의 ..

중국사 2021.05.17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오호십육국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오호십육국 오호 십육국 시기는 다섯 유목민족의 16개 국가가 아님. 십육국이라는 이름은 최홍의 라는 저서에서 시대 이름을 땄을 뿐. 영가의 난을 이끌었던 유연의 아들 유총이 세운 한나라는 전조로 이어짐. 한편 영가의 난에서 유연의 부하장수로 활동했던 석륵은 후조를 세우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그러다가 유총의 전조는 멸망하게 됨. 한편 후조 시대 황제인 석륵은 '군자영'을 설치하여 한족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유인책을 썼음. 영가의 난(307~312)이 벌어진 화북에 새로운 북방민족, 선비족과 저족 유입. 1) 저족 : 석륵의 후조를 이어 강국인 저족의 전진이 나타남. 2) 선비 모용부 : 한편 선비의 모용부 - 모용황은 연을 세워 전연이 됨. 선비 모용부의 '전연'은 저족 부씨의..

중국사 2021.05.17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서진의 멸망 - 팔왕의 난, 영가의 난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서진의 멸망 - 팔왕의 난, 영가의 난 1. 팔왕의 난(300~306) 서진시기 중국의 호족이라는 이들이 점차 문벌귀족으로 바뀌어갔음. 그런 한편 서진은 상비군을 축소하고, 소속된 군대를 해산하여, 대신 왕자들에게 군대를 나누어주며 지방의 요지에 분봉하는 봉건제를 실시. 사마씨 일족을 제왕으로 봉해 정권을 지탱하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고, 제왕들에게 봉토 내 호구 및 일정 수의 군대까지 받았던 것. 이것이 패착. 그게 문제가 되어 8왕의 난을 가져오게 됨. 팔왕의 난 발생 자체가 멸망까지 이끄는 결정타라기보단, 5호(다섯 오랑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문제. 팔왕의 난은 서진 왕자 여덟 명이 참여했던 반란. 무제 말년 이래 성장해온 양준 등 외척 양씨 세력이 황후 가씨와 대립했고, 가..

중국사 2021.05.04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위(魏)-서진(西晉) 시기의 제도 - 점전과전제, 호조식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위(魏)-서진(西晉) 시기의 제도 - 점전과전제, 호조식 위왕조의 대 황제인 명제는 대장군 사마의에게 정권을 맡기고 오로지 수도인 낙양의 건설에 전념했음. 사마의의 대단한 위세는 사마사와 사마소에게 이어지게 되고, 사마소는 263년에 촉한을 멸망시킴. 사마소는 그 공로로 20개 군을 거느린 진왕(晉王)이 됨. 사마소의 장자인 사마염이 위왕조가 한에서 선양받은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위를 양위받고, 265년 (서)진(晉)왕조를 수립. 사마씨 정권은 호족연합정권의 성격. 서진의 무제가 된 사마염은 280년에 오왕조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자마자 화북을 중심으로 한 지배질서의 회복과 농업생산의 부흥에 착수. 그래서 점전과전제라는 토지제를 실시하고, 호조식이라는 새로운 세제를 반포. * ..

중국사 2021.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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