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북위의 분열 - 동위와 서위

취미와 문화 2021. 5. 22. 17:16
반응형

[육진의 난]

 

 “화북으로 이주한 선비족은 점차 귀족화하면서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리하여 낙양으로 옮겨와서 한화된 선비족그렇지 못한 북방의 선비족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생기고,이러한 갈등은 다음 525년 효명제 때에 6진의 반란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북위는6진의 반란이 일어나자 산서성 북부에 세력을 떨치던 선비족의 추장 이주영의 힘을 빌려 이를 진압하려 하였다. 이때 낙양에는 효명제의 모친 호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고 환관과 폐신을 중용하여 정치가 문란하였다. 효명제가 성장하여 호태후와 충돌이 생기자 태후는 효명제를 독살하고 유제를 옹립하였다. 이주영은 수도 낙양에 들어와 태후와 유제를 체포하여 황하에 수장하고, 조정의 백관과 왕공 이하 2천여 명을 학살한 후 효장제를 세웠다.(하음의 변) ... 6진의 반란과 함께 섬서방면에서도 528년에 만사추노(万俟醜奴)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주영은 부장 우문태를 파견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우문태는 점차 장안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나갔으며, 이주영의 부장 고환, 후경 등도 막강한 군사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효장제는 위협을 느껴 이주영을 궁중으로 유인하여 살해하였다. 그러자 이주영의 아들 이주조는 진양에서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효장제를 죽이고 조카 절민제를 옹립하였다."

 

고환은 6진의 반란에 가담하였으나, 이주영에게 항복한 선비출신 무인이다. ... 그는 이주조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고 6진의 난민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후 이주씨를 토벌하고 낙양에 침입하여 절민제를 폐위시키고 효무제를 옹립하였다. 고환은 이주씨 근거지인 진양에 들어가 그 주변 선비족을 징발하여 군대로 편성한 후 진양을 근거지로 천하에 호령하니 낙양의 효무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이에 효무제는 장안에서 세력을 잡고 있던 우문태를 끌어들여 고환을 제거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환에게 역습을 당하여 우문태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이 때 고환은 효정제를 영입하여 업에 도읍하니 이에 위는 534년에 동위와 서위로 분열되었다.”(동양사개론)

 

 

[우문태는 서위, 고환은 동위] 


1. 고환의 동위와 북제 : 동위의 고환은 아들 고징을 태자로 세웠음. 고환의 후계자인 고징이 동위의 실권을 장악하자, 장군 후경이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음. 후경의 반란은 실패하고, 후경은 양나라로 도망가 또 혼란을 일으키게 됨. 
고징은 황제의 씨가 아님. 그러나 고징은 황제가 되려고 함. 그러나 황제가 되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고징의 동생이 그 권력을 이어가게 되면서 북제가 성립됨. 

  북제의 수도는 업(산둥반도 서쪽에 위치, 허베이성 소재)에 두고 군사 중심지를 진양(업 지역보다 서쪽, 산서성의 성도)에 두었음. 북위 정권의 낙양 천도의 실책을 밟지 않으려 하였던 조치였으나, 어차피 수도와 군사중심지가 분리되면서 주요 군사력인 선비족의 지지를 상실.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 북주에게 패배하게 됨. 

 

2. 우문태의 서위와 북주 : 북주가 화북을 재통일한 과정. 장안에 수도를 둔 서위 역시 정세가 처음에는 불안했음. 우문태가 죽자 그 아들 우문각이 서위의 공제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게 되고, 나라 이름을 (북)주라고 했음. 우문각은 우문태의 '부병제도'를 확대하여 북주의 군사력 강화에 주력했고, 북제보다 우위에 서게 됨. 부병제도는 군사제도일 뿐만 아니라 각 민족의 통합까지 꾀하는 정책. 농민은 교대로 훈련을 받게 되는데, 고향에서는 향병이 되어 예비군을 형성.


[북제vs북주 : 북주가 승리했던 요인]
1. 농민병 흡수 : 북제가 먼저 성장을 하긴 했지만, 북주가 내실을 잘 다졌음. 북주의 재통일 과정이 부병제가 먼저 나옴. 서위-북주의 우문태가 한인호족의 향토방위를 위해서 조직한 농민병들을 자기 군대에 편입시켜 병력을 확충시켰는데, 이것이 부병제의 선구가 됨. 다만 일반 민호의 호적과는 별도였으니, 수당시기의 병농일치와는 다른 것. 우문태에 의해 실시된 부병제를 확대해서 북주의 군사력 강화에 주력했고, 북제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음.
2. 장안 수도 : 서위 북주의 근거지인 장안은 진나라 전한 시기부터 수도였으며 그리고 정치 군사상의 요충지였음. 이런 것들이 통일의 배경. 그러나 후한이 낙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문명의 중심지에서 소외되었고, 이것이 오히려 선비족으로 하여금 한화되지 않고 건전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음.
3. 빈부격차 비교적 적음 : 서위의 영토는 동위나 강남지역처럼 비옥하지 않았기에 대토지 사유화가 일어나지 않았음. 고로 내부의 계층 갈등은 덜하였음. 사회의 공평성이 유지되고 균전 농민의 노동력이 존중되면서 건전한 기풍을 유지할 수 있었음. 

4. 호성 복구 : 효문제 한화정책에 의해 자기 성씨를 잃은 호족 병사들에게 사기를 불어넣는 호성을 다시 부여하는 정책을 실시.

5. 관롱집단 형성 : 우문태는 낙양과 장안을 거쳐 관롱지역에 정착했음.(관은 섬서성, 롱은 감숙성 지역) 감숙성은 하서 회랑지역이라고도 할 수 있음. 우문태는 부병을 자기 공신인 신귀족이 장악하게 했는데, 제1위였던 것은 8주국이[8인의 주국대장군]라 불리는 사람들이었고, 우문태 자신과 황족인 원혼이라는 자를 제외하고, 다른 6주국에 24군을 4군씩 나누어 장악케 했음. 그리고 그 아래에 12대장군을 두어 2군씩 거느리게 하고, 그 아래에 24인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두어 각기 1군씩 관장했음. 이 신귀족이 관롱집단이라고 부르는데, 수나라를 건국한 양건과 당건국자 이연 역시 관롱집단에 뿌리를 두고 있음.
관롱집단이 서로 통혼권을 형성하는데, 독고씨 집안. 독고씨가 외척 가문이 되어 북주-수-당 모두 연결. 나중에 당나라 이연과 수나라 양견은 이종사촌 관계. 이 관롱집단의 결속을 바탕으로 북주는 557년에 북제를 멸망시키고, 다시 화북을 통일. 그리고 남조 진으로부터는 양자강 이북의 영토를 빼앗았음.(동양사개론, 박한제 교수 유목민족사 특강)
이 관롱집단의 기본적인 바탕은 부병제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 부병제 하에서는 병농일치로서, 세금 장부에 등록되었거나 국가 호적에 등록된 사람은 모두 병사로 징집하는 것. 이 사람이 싸움을 잘하든 못하든. 만약 팔이 하나든 두 개든, 눈이 하나든 두 개든 간에 세금을 내는 사람이라면 군인으로 징발. 그러다보니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구역에서 어떤 사람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한족적인 것. 호족은 유목민이기에 그런 전통따윈 없음. 이런 부병제 특성은 호한체제에서나 성립 가능함.

이런 부병제는 북위 이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군진'을 설치하고 군정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형성됨. 군진에는 선비족과 선비족 이외의 북방민족을 배치하여 군대의 근간으로 삼아 적지공략과 정복지 확보의 중임을 맡겼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