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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3

천주교 성직자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

천주교 성직자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각종 설이 다양하니, 정리해두자. 1. 제례의식의 연장 - 기독교 제례의식 동안에는 성교가 금지되었던 것이, 성직자에게는 계속해서 이어졌다는 설. 2. 교회 재산 상속 차단 - 교회의 상속이 일어나면 세속권력화되기 때문에 자손을 만들지 않도록 규제했다는 설. 3. 클뤼니 수도원 세력의 성직 독점의 일환 - 교황직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수도원 개혁세력들이, 자신들의 고위 성직과 교황직에 대한 독점을 강화하기 위해 규제를 추가했다는 설. 4. 로마에서 기독교도를 한창 죽일 때, 가족이라는 약점을 만들지 않고 신앙을 결사 수호하기 위해 그렇다는 루터의 설.

서양사 2023.02.15

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

다시 거슬러올라가 이탈리아 통일의 배경은 멀리 보자면 1815년 빈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 회의 이후 사르데냐, 허리를 가로지르는 교황령,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령, 파르마와 모데나 등은 오스트리아의 간접지배령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848년 혁명을 실패하는데, 일단 카르보나리당과 마치니의 좌절을 봤습니다. “2월 혁명에서 카톨릭의 자유주의나 마치니의 이상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통일의 과업을 사르데냐의 현실정치가인 카보우르(카부르, 1810~1861)의 손으로 넘어갔다. ... 귀족출신인 카보우르는 1850년 재상으로 임명되자 그는 첫째로 사르데냐의 국력배양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산업을 장려하고 군대를 개편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고, 둘째로 인구 ..

서양사 2021.08.18

[19~20세기 영국의 발전] 선거법 개정

영국의 변화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1832년 선거법 개정이다. 기존에는 소수의 지주층만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당시의 집권정부인 휘그 정권이 결국 1차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앞서 7월 혁명의 결과로서 언급을 했다. 1. 재산상 중간계급까지만 선거권을 확대한다. 2. 부패선거구를 개정한다. [19세기 영국사 - 차티스트 운동] 1차 선거법 개정은 아직 인구의 2할도 안 되는 이들만이 선거권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1834년부터 인민헌장운동이 시작된다. 이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남자 보통 선거권’. 2. 당시 노동대중들은 세비를 지급받지 않아 정치에 진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원에게는 세비를 지급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정 연대 제1차 1832년..

서양사 2021.08.18

[민족주의와 각국의 발전] 프랑스 제2제정과 제3공화정

1. 제 2 제정 프랑스 2월 혁명의 결과 성립된 국립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루이 블랑 등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대패하자, 일자리를 잃었다. 즉, 국립작업장은 폐쇄되었다. 그러자 소위 1848년의 '6월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6월 봉기의 결과 공화제 헌법이 제정되고, 보통선거, 단원제, 대통령 중심제 아래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849년 1월에 의회가 해산되고 5월에 선거가 왕당파 중심의 질서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하층민의 선거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대통령 재선 금지 개헌까지 제안하게 되는 바, 의회에서는 부결되었다.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52년 1월에 신헌법을 만드는 바, 독재적 통치권을 가져갔다...

서양사 2021.08.18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의 영향

1. 1830년 7월 혁명 1) 1830 네덜란드로부터 벨기에 독립 :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종교재판 강화, 가톨릭 강요 등의 조치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이라는 사람 주도 하에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 독립에 성공했다. 네덜란드가 정식으로 독립하게 된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억제의 사명을 띠고 오스트리아령 벨기에를 할양받았다. 그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벨기에는 가톨릭인 한편 네덜란드는 고이센-프로테스탄트 지역인데다, 언어와 관습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네덜란드는 항해 산업인 한편, 벨기에는 농업과 공업 중심이었다. 네덜란드 왕 윌리엄 1세는 네..

서양사 2021.08.18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2월 혁명

1848년 7월 왕정은 은행가, 대상공업자, 일부 부농들을 위한 정권으로서, 선거권이 차등분배되어 있었다. 게다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고되게 되고 노동자는 단결하게 된다. 결사를 조직하고 사회주의가 확산되었다. 그에 반해 7월 왕정은 1834년에 노동자에 대한 반 단체법을 제정하게 된다. 7월 왕정에 대한 불만은 커져만 갔으며, 그 불만은 선거권 확대 요구로 수렴되었다. 프랑스 초기 사회주의자 중에 루이 블랑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7월 왕정을 비판하여 부르주아적 정치에 반대한 사람으로서, 산업사회의 경쟁 및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비난했다. 보통선거를 통한 노동자 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을 주장했으며, 이라는 저서에서 국립공장 건설을 주장했다. 그 결과 7월 왕정 특유의 국립 작업장..

서양사 2021.08.17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에 대한 반항과 7월 혁명

1.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 1) 독일 부르센샤프트(학생조합, 1815) : 독일에서는 *라이프치히 전승 4주년, 루터의 종교개혁 300주년 기념 축제 중 보수적 서적과 프로이센 병사 군복을 소각하였다. 2) 1819년 독일 예나 대학생이 황제의 스파이 코체부를 암살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카를수바드 법령을 제안하는데, 학생조합 해산, 대학에 감독관을 파견해 감시하는 한편, 출판물 검열을 강화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3) 에스파냐 : 보통선거, 제한 군주제를 규정한 민주적 헌법을 채택했다. 4) 나폴리 : 비밀결사 카르보나리당의 활동이 활발했다. * 라이프치히 전투 : 1813년 10월 16일 부터 19일까지 벌어졌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투..

서양사 2021.08.17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의 운영

자유주의는 근대의식의 성장과 시민혁명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자유주의란 사회보다 개인을 중시하고, 평등이나 보편주의에 바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 빈 회의(1814~1815) : 시대에 역행하는 체제인가, 유럽안정을 가져온 체제인가? 빈 회의의 배경은 자유주의가 확산되었을 때 무너져내릴 수 있는 왕국들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나라가 오스트리아이고, 오스트리아의 재상이 메테르니히였다.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이 빈 회의는 근대 정치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그 내용을 보면 '신성한 정통성의 원리'를 내세워 혁명 전의 상태로 복귀하고자 하는 것이 요점이다. 혁명이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전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정통적인 것이란 혁명 전의 상태를 이야기..

서양사 2021.08.17

[프랑스혁명] 테르미도르 반동과 총재정부

4.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 국민공회 내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결국 로베스피에르를 잡아다 사형시켜버렸다. 전쟁과 반란은 어느 새 정리가 된 상태였고, 혁명의 열기는 점점 식어가던 중이었다.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한 테르미도르파는 혁명전쟁 내내 자신들을 괴롭혔던 혁명재판소, 공안위원회 등 공포정치 기구들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혁명재판소는 해산되었고, 공안위원회는 권한이 극도로 축소되었다. 95년 헌법이 입법되는데, 이것은 양원제의 입헌 공화국의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유산계급 중심의 제한선거에 입각한 5백인회와 원로원의 양원제, 5인 총재 주도의 행정부가 특징이다. 5. 총재정부(1795.10~1799.11) 총재정부는 기존에 물가를 잡고 있던 최고가격제를 폐지하였고, 당..

서양사 2021.08.17

[프랑스혁명] 입법의회와 국민공회

2. 입법의회(1791.1~1792.9) 91년 헌법에 의해 입법의회가 성립되었다. 우파인 페이앙파, 좌파인 자코뱅파, 그리고 중간파가 입법의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자코뱅파에는 온건한 지롱드(브리소파)가 있었으며 중간파를 포섭하여 주도권을 획득하려 했다. 입법의회 구성은 혁명전쟁 전야를 알리는 일이었다. 혁명전쟁은 1792년이래 23년간 지속되었다. 독일 지역에 망명한 반동귀족들은 혁명에 반대했고, 독일 지방 제후들 중에는 봉건제 폐지로 인해 알자스 지방의 권리를 상실한 이들도 있었다.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은 프랑스에 병합되었고,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은 혁명의 분위기를 반기지 않았다. 1792년 4월 20일에 지롱드 파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날렸고,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에 가담하여 대응하였다. 프랑..

서양사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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