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민족주의와 각국의 발전] 프랑스 제2제정과 제3공화정

취미와 문화 2021. 8. 1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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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2 제정

프랑스 2월 혁명의 결과 성립된 국립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루이 블랑 등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에서 대패하자, 일자리를 잃었다. 즉, 국립작업장은 폐쇄되었다. 그러자 소위 1848년의 '6월 봉기'가 일어나게 되었다. 6월 봉기의 결과 공화제 헌법이 제정되고, 보통선거, 단원제, 대통령 중심제 아래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849년 1월에 의회가 해산되고 5월에 선거가 왕당파 중심의 질서당이 다수당을 차지하게 되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하층민의 선거권을 박탈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대통령 재선 금지 개헌까지 제안하게 되는 바, 의회에서는 부결되었다. 나폴레옹은 1851년 12월 2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52년 1월에 신헌법을 만드는 바, 독재적 통치권을 가져갔다. 

루이 나폴레옹의 지지층은 의외로 넓었다고 한다.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소토지 소유농들의 불안감 때문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공화정이란 불안정한 것이고, 강력한 지도자가 있으면 재산과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1852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은 제정을 선포할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전설이 나폴레옹의 조카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3세로 오른 루이 나폴레옹은 자유를 억압하기 시작했다. 언론을 탄압하고 공직자에 충성의 서약을 요구했다. 투자은행을 신설하고 정부 보증으로 철도를 부설했다. 대규모 중공업, 토목공사, 도시계획을 추진했다. 새 일터가 만들어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았고, 산업 부르주아들도 만족을 찾았다. 

 

대외적으로 나폴레옹 3세는 크림전쟁에 참가했으나 실질적인 이득은 없었다. 샤르데냐의 이탈리아 통일을 지원했는데, 그를 위해 플롱비에르 밀약을 맺어 사보이 일부와 니스를 얻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런데 나폴레옹 3세는 샤르데냐를 배신했는데, 전쟁도중 오스트리아와 강화를 맺은 것이다. 이탈리아의 애국자들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나폴레옹 3세는 멕시코 원정을 떠나 멕시코의 공화정을 폐기하고 오스트리아 공 맥시밀리안을 황제로 옹립했다. 맥시밀리안은 얼마 가지 않아 공화파에 의해 총살당했다.

 

1860년 영프 통상조약이 맺어졌는데 자본이 집중되고 기계제 대공장이 증가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노조도 늘어나게 된다. 프랑스 정부는 1864년 비폭력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파업을 인정하게 되고, 노동운동은 자동적으로 격화되었다. 결국 이런 상황 속에서 '1869년 총선거에서 공화파를 비롯한 강력한 반정부 세력의 진출에 당면한 나폴레옹 3세는 기존의 탄압정책을 포기했다. 입법원에 법률 발의권과 예산심의권을 주는 -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 제정을 취하는데, 이것을 자유제정이라고 한다.'(서양사개론)

 

 

2. 제 3 공화국

자유제정이 무너지는 데에는 보불전쟁의 영향이 컸다. 나폴레옹 3세는 비스마르크 술책인 전보사건에 휘말려 보불전쟁에 뛰어들게 되었고, 알자스 로렌을 상실하는 한편 1870년 9월 초 '세당 전투'에서 항복했다. 이로써 제정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파리 시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면서 공화정을 선포했다. 제 3공화정이다.

 

국민의회는 왕당파와 보수파가 양대당이었다. 국민의회는 독일에 공식적으로 알자스-로렌 일부를 양도하였으며 배상금을 지불하는데, 그걸 1871년 프랑크푸르트 조약이라고 한다. 노동자, 소시민층은 이 굴욕적인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인정할 수 없었다. 국민 방위군이 파리 행정권을 장악하고, 파리 코뮌을 수립하기까지 이른다. 1871년 3월의 일이었다.

국민의회 왕당파 티에르는 파리를 포위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 살육의 기간을 피의 일주일이라고 한다.  

 

제3공화정은 꼭 파리꼬뮌 같은 혼란상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양원제와 임기7년의 대통령제를 실시했다. 실권은 보통선거를 선출한 하원에 있었고, 하원의 의견에 따라 내각을 조직했다. 이로써 내각책임제가 성립되었다. 

제3공화정 국민의회는 왕당파 및 교회세력을 제거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이다. 유대인 육군 대위 드레퓌스가 군사기밀을 독일에 팔았다는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왕당파와 군부, 교권주의자는 유죄를 주장한 한편,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는 무죄를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무고 사건으로 밝혀지게 되고, 공화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게 되었다.

군부는 공화주의자로 개편되었과, 교육 및 사회사업에 대한 교회세력을 제거하는 결사법을 실시하였다. 교황은 나폴레옹 1세 사이에 체결된 종교화약을 폐기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정교분리법이다. 이는 가톨릭의 특권을 박탈하고 성직자 봉급을 지불하는 것을 중지하는 것으로서, 성직자가 국가에 종속되는 것을 막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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