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

취미와 문화 2021. 8.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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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거슬러올라가 이탈리아 통일의 배경은 멀리 보자면 1815년 빈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빈 회의 이후 사르데냐, 허리를 가로지르는 교황령,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령, 파르마와 모데나 등은 오스트리아의 간접지배령이었습니다. 이탈리아는 1848년 혁명을 실패하는데, 일단 카르보나리당과 마치니의 좌절을 봤습니다.

 

“2월 혁명에서 카톨릭의 자유주의나 마치니의 이상주의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탈리아 통일의 과업을 사르데냐의 현실정치가인 카보우르(카부르, 1810~1861)의 손으로 넘어갔다. ... 귀족출신인 카보우르는 1850년 재상으로 임명되자 그는 첫째로 사르데냐의 국력배양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산업을 장려하고 군대를 개편하는 등 개혁을 단행하고, 둘째로 인구 500만 정도의 과히 크지 않은 사르데냐가 통일의 주인공이 되기 위하여서는 그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통일을 도와줄 우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크림전쟁에서 영-불에 가담하여 양국의 호의를 얻는데 성공하였다.” - 민석홍, 서양사개론

 

두 크림전쟁에 가담할 수 있도록 우방을 구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1859년에 나폴레옹 3세와 맺은 플롱비에르 밀약이었습니다. 카보우르가 프랑스의 힘을 얻은 대신, 카보우르는 1815년 빈 회담 때 대불포위를 강화하기 위해 열강들이 사르데냐에 할양해주기로 했던 니스’, ‘사보이땅을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뒷받침이 든든해진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일으킵니다. 마젠타와 솔페리노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였으나, 나폴레옹은 이탈리아가 강성해질 것을 우려하여 빌라프란카에서 오스트리아와 단독으로 휴전 조치합니다. 역설적으로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의 애국자들을 샤르데냐의 편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어쨌건 1859년은 사르데냐가 홀로 베네치아를 정복하는데 까지는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매우 중요한 교두보로서 밀라노가 있는 롬바르디아를 장악한 해입니다. 그렇게 이탈리아 중북부 군소국의 대공들을 모두 쫓아내고 그 지역 주민투표를 거쳐 합류시켰습니다. 그리고 망명을 지속하던 가리발디(1807~1882)가 카보우르의 지원을 받아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그곳의 반란을 기점으로 붉은 셔츠당으로 유명한 ‘1000인 원정대(Thousand)’라고 하는 자원병들을 기반으로, 나폴리 왕국을 1860년에 정복했습니다.

 

점점 나폴리 왕국과 교황령까지 북상하는 가리발디를 카보우르가 지원하긴 했지만, 가리발디의 북상에 사르데냐 왕 빅토르 엠마뉴엘은 불안해졌습니다. 가리발디가 사상의 계보가 마치니의 후계자이지만, 동시에 그는 게릴라 전사에 가까웠습니다. 만약 가리발디가 민중의 뜨거운 지지에 힘입어 그가 가톨릭 교도 중심의 로마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면, 프랑스가 개입하는 것 아닌가 하고 불안한 것이죠. 하지만 가리발디는 자신의 공화주의를 포기하고,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국민투표를 거쳐 사르데냐의 왕을 중심으로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전 이탈리아가 통합되고, 사르데냐 왕을 국왕으로 추대한 이탈리아 왕국이 18613월에 탄생하였습니다.

 

- 이탈리아 통일의 결과물

1, 1866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보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의 배후를 공격했고,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던 베네치아를 전리품으로 얻어 왕국에 흡수하였습니다.

2. 1870년에는 로이센-프랑스(보불) 전쟁으로 프랑스가 바빠지게 되고, 로마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이를 점령하여,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옮깁니다. 교황령을 합병한 것이죠.

3. 교황의 동의없이 교황령을 합병했기에 교황은 이탈리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로마문제가 남았습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무솔리니가 해결합니다.

4. 그리고 북쪽의 작은 땅이지만 트리에스트와 트렌티노(남 티톨로 혹은 트리엔트)가 아직 오스트리아령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트리엔트라고 쓴 것은 독일이고, 트렌티노는 이탈리아식 발음입니다.]

5. 이탈리아가 계속 두 개로 쪼개져 있었고 19세기에 와서야 통일이 되었는데, 남북문제가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통일 후 북부는 산업화가 됩니다. 한편 국가가 관리하는 철도가 남부지방까지 뻗쳐나갔지만, 남부는 여전히 후진적인 농업지대로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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