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의 영향

취미와 문화 2021. 8. 18.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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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30년 7월 혁명 

1) 1830 네덜란드로부터 벨기에 독립 :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종교재판 강화, 가톨릭 강요 등의 조치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이라는 사람 주도 하에 1579년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여 네덜란드 독립에 성공했다. 네덜란드가 정식으로 독립하게 된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었다.

네덜란드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억제의 사명을 띠고 오스트리아령 벨기에를 할양받았다. 그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벨기에는 가톨릭인 한편 네덜란드는 고이센-프로테스탄트 지역인데다, 언어와 관습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네덜란드는 항해 산업인 한편, 벨기에는 농업과 공업 중심이었다. 네덜란드 왕 윌리엄 1세는 네덜란드의 법과 언어를 강요하고, 네덜란드 출신 관리들에게 행정을 전담시켰다. 

벨기에 시민들의 불만은 브뤼셀의 한 극장에서 터져나왔다. 분노한 시민들은 1830년 11월 전국 의회가 소집되어 독립선언을 발표했는데, 새로 옹립된 자가 영국과 프랑스 왕실과 혈연이 있어 인정받고 정치외교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벨기에의 독립은 성공이었다. 

 

2) 1832년 1차 선거법 개정 : 부패선거구를 없애고 선거구를 신흥공업도시에 배정하였다. 그 배경으로는 농촌인구는 도시로 옮겨가고, 부패선거구가 생겼으며, 의회 구성과 선거법 모순이 노출되었던 것이다. 휘그당이 이 선거법 개정을 주도 했는데, 신흥자본가와 중산계급이 투표권을 획득하게 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 실패한 봉기 :

폴란드 - 바르샤바 사관 후보생의 봉기(1830.11)

이탈리아 - 까르보나리당 봉기

독일 - 프랑크푸르트 봉기

 

2. 1848년 2월 혁명 

1) 오스트리아 3월 혁명

3월 12일 노동자와 대학생들이 궐기하여 메테르니히가 영국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혁명위원회가 구성되어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지배했고, 7월에는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다. 개혁안이 마련되고 농민 부역의무가 폐지되었다.

한편 헝가리에서는 코수트를 중심으로 정치적 자치 획득 운동이 전개되었다. 선거에 의한 의회 및 정부 수립이 주창되었는데, 의원의 자격은 마자르어를 사용하는 자에 한정시켰다. 당연히 타 소수민족들은 이 혁명에는 그리 좋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한편 '3월법'을 제정하여 귀족 면세특권과 농노제를 폐지했던 것은 주목할 만 하다.

결국 오스트리아 반 혁명 세력에 의해 실패하게 되었는데, 배타적 민족주의가 실패에 한 몫했다고 보여진다. 

 

2)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베를린에서도 3월 혁명이 발생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자유주의자-민족주의자의 요구를 수용하고 새 헌법을 약속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는 보통선거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주요 의제는 대독일주의 vs 소독일주의의 통일 영역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대독일주의는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제국의 제관을 합스부르크 가에 넘기려 했고, 소독일주의는 프로이센의 호헨촐러른 가에 제관을 넘기려 했다. 결과는 프로이센 왕을 황제로 선출하게 되었고, 자유주의적 통일헌법을 마련하게 된 것인데 이 때가 1849년 3월이었다.

그런데 빌헬름 4세가 제관을 거부하고 독일 군주들은 자유주의에 대해 양보를 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1850년 헌법을 제정하여 부르주아, 융커의 지배와 전제정치를 확인하는 외관상 입헌주의가 주창되었다. 

 

3) 이탈리아 혁명 - 마치니(실패) : 이탈리아에서 1848년 21살에 죽은 청년 마치니는 생전에 로마 교황령을 치면서 ‘로마 공화국’을 세우려 했다. "184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세 개의 자유주의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교황을 중심으로 한 두 세력은 비교적 온건하였고,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이상주의적인 민족주의자 마치니를 중심으로 한 제3의 자유주의세력은 이탈리아가 민주적 공화국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치니는 ‘청년 이탈리아당’을 창건하고, 독일과 폴란드 등에서도 이와 유사한 집단의 형성을 지원하여, '청년 유럽당'이라는 연합을 구성하였다."(서양사개론)

 

이탈리아와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Prima guerra d'indipendenza italiana)은 이탈리아의 통일의 첫 전쟁이다. 사르데냐 왕국과 이탈리아 의용군이 오스트리아 제국 및 이탈리아 보수주의 국가에 맞서 1848년 3월 23일부터 1849년 8월 22일까지 이탈리아 반도에서 싸웠다. ... 더 큰 의미에서 이 전쟁은 카를로 알베르토가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운 왕정 유지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사르데냐 왕국은 양시칠리아 왕국과 교황령의 지지를 받았으나, 두 국가는 이를 곧 철회했다. 하지만 이 두 지역의 의용군은 이탈리아 의용군에 참여해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웠다. 사르데냐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위키백과)

 

이탈리아 독립항쟁은 가열이 되고 있었고, 군소국 정부는 헌법제정을 약속받았고 제헌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래서 1848년 3월 직후에는 자유주의 정부, 성문헌법, 법치의 근간인 헌법, 대의제, 참정권 확대, 내각책임제, 배심원제, 출판과 집회의 자유 등을 중심으로 추구해나갔다. 그리고 더불어 혁명의 성과라고 한다면 농노제 폐지인데, 독일연방 경계 밖에 있던 프로이센이나 갈리시아, 보헤미아, 헝가리 등에 농노제가 폐지된 것이다.

 

그런데 6월이 지나면서 혁명이 썰물처럼 퇴조해갔다. 그리고 7월 25일 퇴각했던 오스트리아 군인 라데츠키가 쿠스토차 전투에서 사르데냐 군을 격퇴했고, 사르데냐 왕 카를로 알베르토를 본국으로 패주시켰다. 사실 교황령은 가톨릭 국가 오스트리아 군인 라데츠키가 나타나자, 교황은 중립을 선언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싸울 때를 틈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은 통합 이탈리아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도 라데츠키가 오스트리아 군의 지휘관이었다. 이 때에도 오스트리아가 승리했지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졌으니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베네치아(베네토) 지역을 갖게 된다. (사실 오스트리아가 그것도 기분이 나빠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게 줍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3세 입장에서는 이탈리아 통일 도와주면서 니스와 사보이 등을 받았기 때문에, 베네치아를 받지 않고 이탈리아에 돌려줍니다.)

 

"이탈리아의 혁명은 이로써 좌절된 듯이 보였으나 그 해 11월에 로마의 급진파가 혁명을 일으켜 마치니를 수반으로 하는 로마 공화국을 수립하고, 이들 급진파의 압력으로 사르데냐 왕은 1849년 3월에 다시 한 번 오스트리아에 도전하였다. 그러나 노바라에서 패하고, 이어 오스트리아군은 베네치아를, 그리고 프랑스군은 로마 공화국을 쓰러뜨렸다. 이로써 1848년의 이탈리아 혁명은 좌절되었다.”(서양사개론) 결국 2월혁명의 영향으로 마치니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탈리아 혁명은 실패했다. 이후 1860년대에야 가리발디와 카보우르가 등장하여 독립운동을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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