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발전] 빈 체제에 대한 반항과 7월 혁명

취미와 문화 2021. 8. 17. 15:46
반응형

1.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

1) 독일 부르센샤프트(학생조합, 1815) : 독일에서는 *라이프치히 전승 4주년, 루터의 종교개혁 300주년 기념 축제 중 보수적 서적과 프로이센 병사 군복을 소각하였다. 

2) 1819년 독일 예나 대학생이 황제의 스파이 코체부를 암살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카를수바드 법령을 제안하는데, 학생조합 해산, 대학에 감독관을 파견해 감시하는 한편, 출판물 검열을 강화하는 것이 주요 골자이다. 

3) 에스파냐 : 보통선거, 제한 군주제를 규정한 민주적 헌법을 채택했다.

4) 나폴리 : 비밀결사 카르보나리당의 활동이 활발했다.

* 라이프치히 전투 : 1813년 10월 16일 부터 19일까지 벌어졌으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패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전투이다. 

* 트라파우 회의 : 유럽협조체제가 흔들릴 경우 동맹국들이 유럽 국가 국내 문제에 간섭할 수 있다는 트라파우 회의가 메테르니히 주도로 이루어졌다. 프로이센, 러시아가 여기에 동의 했고, 영국은 내정문제라하여 반대하였다. 4국 동맹 모두가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어쨌건 4국동맹을 이용한 것이다. 

5) 라틴아메리카 : 먼로 선언.  라틴 아메리카의 시몬 볼리바르. 시몬 볼리바르는 특히 남아메리카 최북부의 콜롬비아 공화국을 1819년에 독립시켰고, 페루~칠레 동쪽의 볼리비아 공화국도 1825년에 독립을 성취하여 해방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에스파냐 식민지인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멕시코가 독립했고,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이 독립하였다.

6) 그리스 독립 전쟁 : 오스만 제국의 억압적 통치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 아드리아노플 조약(1829)으로 독립을 하게 되는데, 그리스 민족주의 집단의 활동의 영향이 컸다. 

1) 파나리오트파 : 큰스탄티노플 중심의 그리스 정교회 세력. 이 세력의 입실란티가 투르크에 반란을 시도 했으나 1821년에 실패하였다.

2) 도서파 : 에게 해의 항구 및 섬 출신 상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순수 고전적 그리스어로 회귀하려는 경향을 띤다. 

* 메테르니히의 그리스 반란 불간섭, 유럽 사회의 그리스 지원 

 

2. 1830년 7월 혁명

1) 루이 18세(1814~1824) : 나폴레옹이 1814년에 엘바섬으로 유배를 갔을 때 즉위한 루이 18세는 1814년 헌법을 선포했다. 그 내용은 입헌군주제와 혁명성과를 반영하는 몇몇 조치들이었다. 즉, 신앙의 자유, 법적 평등, 관직개방, 혁명 중의 재산처리 인정, 자녀 균등상속 등이었다. 물론 혁명에 휩쓸리기만 할 루이 18세는 아니었다. 국왕이 행정권, 장관 임명권, 입법기관 해산권, 법령 발의권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실권은 왕에게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극우 왕당파가 형성되니 왕정은 여전히 반동적이었다. 

 

2) 샤를 10세 : 루이 18세가 죽고 그 아들인 샤를 10세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보수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적극적인 반동정치를 폈는데, 교육에 대한 성직자의 권한 확대, 망명 귀족이 혁명 중 상실한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연금 지급 등의 조치를 취했다. 재원은 국채의 이자를 5%에서 3%으로 낮추는 조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편 루이 18세가 혁명의 성과를 반영하여 제정한 자녀균등상속을 무시하고 '장자 상속법 부활안'을 제정하였다. 지속적으로 자유주의 세력의 불만이 축적되어간 결과, 1827년 총선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과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극우파 폴리냑을 총리로 임명하는 한편, 의회 해산 후 재선거까지 치렀다.

샤를은 7월 25일에 언론 탄압, 의회해산, 재선거, 선거권 제한(부유한 지주), 왕만이 입법권을 보유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티에르, 기조 등의 자유주의자들의 반발, 민중들의 봉기 등이 일어나 샤를 10세는 망명길에 오를 수 밖에 없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