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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3

[프랑스혁명] 국민의회

프랑스 국민의회는 투표권을 가진 부르주아들이 특권을 배제하고 구성한 의회이며, 재산본위의 대의제 입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빈민들에게는 당연히 불합리한 지향이었다. 그래도 국민의회가 성립하기까지는 대단한 노력들이 있었다. 1789년 6월 17일에 제3신분 대표들이 머릿수 표결을 재차 제안하면서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머릿수표결은 제3신분 투표권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 이를 위해서는 새 헌법이 필요했으며, 새 헌법을 요구하기 위해 삼삼오오 테니스코트에 모였다. 1789년 6월 20일 테니스코트 서약에서는 새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루이 16세는 제2신분 귀족, 제1신분 성직자 대표들에게 국민의회 참가를 지시했고, 어쩔 수 없이 삼부회를 해체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

서양사 2021.08.17

[프랑스 혁명] 앙시엥 레짐과 재정위기

1. 앙시엥 레짐 프랑스 혁명의 배경으로서 앙시엥 레짐, 즉 구제도의 모순을 알아보자. 당시 제 1신분 성직자는 면세특권, 전 국토의 1/10 소유, 모든 농산물에 1/10세 징수, 영주로서 봉건지대를 얻으면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성직자 중에서도 고위성직자 - 주교, 수도원장 등 - 는 귀족에 속했고, 사제 수도사 등 하위성직자들은 평민에 속했다. 제 2신분은 귀족으로서 직접세인 타이유 면제와 도로부역을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귀족 중에서도 전통적 혈통귀족인 대검귀족이 있었고, 부르주아 출신의 법복귀족이 있었다. 제 3신분은 부르주아, 농민, 임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르주아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귀족아래에서 구제도의 모순 타파를 부르짖던 이들이었다. 부르주아..

서양사 2021.08.17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백년전쟁 이후의 프랑스와 잉글랜드

백년전쟁 이후의 프랑스와 잉글랜드 1. 프랑스 : 백년전쟁 이후로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들이 새로운 국세를 부과하게 되었고, 그 세입으로 상비군을 창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상비군들은 다른 남아있는 프랑스 귀족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잉글랜드 :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이후에는 완전히 잉글랜드 사람들의 의식상태가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봉토를 내려주고 보호를 받는 대륙식 봉건제였다면 이제는 꽤 전쟁 시기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대제후들은 백년전쟁 기간 동안 지휘관으로 활동했고, 그 아래에는 병사들이 있어서 주종관계를 맺었습니다. 그걸 '의사봉건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지휘관과 병사 간에는 급료를 가지고 맺어진 것이죠. 잉글랜드는 전통적으로 장자상속제인데다가, 귀족들의 수도 원체 적었..

서양사 2021.05.31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백년전쟁의 끝 - 아라스 화약과 여러 전투들

중앙집권화의 길 - 백년전쟁 백년전쟁의 영향이나 결과로서 지적되는 것은 ‘국민의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백년전쟁을 통해 국민의식,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하지요. 또 한편 국민과 국토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왕권이 구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년전쟁 후기] 백년전쟁의 후기로 들어갑니다. 에드워드 3세가 죽고, 샤를 5세도 죽습니다. 둘 다 죽으면서 샤를 6세가 나옵니다.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바로 오를레앙 가와 부르고뉴 가 사이의 권력쟁탈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열의 배경은 샤를 6세가 정신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신병인 샤를 6세의 섭정으로 들어온 이들이 부르고뉴 가입니다. 한편 영국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은 리처드 2세 때에는 제대로 통치가 안 됩니다. 이 ..

서양사 2021.05.31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4) 제임스 2세

5. 제임스 2세 문제는 1679년쯤 되면 가톨릭으로 자란 제임스가 바로 찰스 2세를 이어서 잉글랜드 국왕이 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해졌음. 잉글랜드 의회는 위기의식에 빠지게 됨. 제임스 2세의 문제점은 일단 가톨릭교도였다는 것. 제임스는 왕이 되자마자 가톨릭교도들에게 신앙의 관용을 베풀어버림. 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잉글랜드의 공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심사법에 의거하여) 잉글랜드 국교도여야 하는데, 가톨릭교도를 자신의 대신으로 임명하거나 요직에 임명해버린 것. 그래서 제임스 2세는 잉글랜드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음. 1) 토리당의 제임스 2세에 대한 입장 : 토리당은 이들 자신들도 사실 잉글랜드 국교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혈통이 중요하다는 입장. 왕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적자의 계승을 ..

서양사 2021.05.25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3) 찰스 2세

4. 복고왕정 - 찰스 2세 크롬웰의 집권과정을 되짚어보면, "왕당파에게 승리한 의회파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둘러싸고 크게 두 파로 분열하였다. 즉 의회 내에 다수를 차지하고 장로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려는 장로파에 대하여, 의회군의 핵심을 형성하고, 각 교파의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는 독립파가 그것이다. 그러나 독립파 안에는 소상점주와 수공업자를 배경으로 보다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수평파가 군대 내의 사병들에게 그 세력을 침투시켜, 장교단과 대립하는 형세를 보였다."(서양사개론) 특히 수평파는 그들의 정치 강령으로 제시한 인민협정에서 1. 보통선거, 2. 의회의 정기적 소집, 3. 과세의 합리화, 4. 법 앞의 평등, 5. 공정한 운영 등을 주장.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되고 나서 외가인 프랑스 왕실에서 ..

서양사 2021.05.25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2) 청교도 혁명

3. 청교도 혁명(1642년)[올리버 크롬웰(집권: 1649~1658)] 장기의회의 선거를 했는데, 국왕 지지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음. 당연히 이로 인해 국왕이 그동안 강압적으로 했던 정책들은 약화되고 말았음. 그 대표적인 것이 성실청(별星 집室 관청廳; Star Chamber)이라고 하는 것을 해체한 것인데, 별 그림이 그려져 있는 방이라는 뜻의 왕실의 특별법정을 해체하게 된 것. 그리고 강압적인 국교회정책 - 고파교회 (高派敎會) 정책을 철회하게 되고, 의회의 3년마다의 정기적인 소집을 한다는 '3년회기법'을 결의. 이 쯤 아일랜드에서 반란이 일어났음.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은 왕과 의회를 규탄하고, 스트라포드의 강압적 지배와 영국신교도 이주자들에 대한 가톨릭계 지주들과 농민의 반항이었음. 이를..

서양사 2021.05.24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1) 제임스 1세, 찰스 1세

[잉글랜드 - 스튜어트 왕조 : 청교도혁명, 명예혁명] [청교도 혁명과 명예혁명 재정리 - 박지향, 서양사개론] 튜더시대 : 근대화의 중요한 계기. 튜더왕조를 개창한 헨리 7세의 장녀 마가렛 튜더가 제임스 4세라는 스코틀랜드 왕에게 시집을 가는데, 그 후손이 메리 스튜어트였습니다. 말했듯 메리 여왕이 아들을 낳고 1년도 안 되어 신하들의 반란에 의해 축출되고, 잉글랜드에 의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톨릭의 음모에 연루되어 처형됩니다. 그 아들이 제임스 6세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튜더가 사망하자, 튜더에 가장 가까운 인척이 그나마 제임스 6세였습니다. 고로 헨리 7세로 거슬러올라가는 그 계보에서 엘리자베스 튜더의 후계자가 제임스 1세(제임스 6세)가 됩니다. 1. 제임스 1세(1603~25) 제임스 1세가 스..

서양사 2021.05.24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 혁명 (7)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프랑스 혁명 - 1795년 총재정부와 95헌법, 정치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등장] 대대적인 학살로부터 살아남은 지롱드 파 사람들은 국민공회로 복귀하였고, 자코뱅의 수족이 되었던 상퀼로트들의 운동도 해체시켜버렸으며, 3개의 공포정치 기구도 무장해체시켜버렸음. 이 조치는 공포정치 내내 고조되고 있던 중앙집권화를 완화시키는 것을 의미. 다만 경제적 자유주의로 돌아가는 95년의 ‘총재정부’가 마련되었지만, 이미 프랑스 내에서는 국민들 간에 갈등의 골도 깊었으며, 정부 역시 새로운 체제를 자리잡게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 어쨌건 이 와중에 95년 헌법이 이제 다시 모든 것을 개혁하는 발표됨. “테르미도르 파는 1795년의 헌법을 마련하였다. 그것은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한 제한선거에 입각한 500인회의 원로..

서양사 2021.05.22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혁명 (6) 자코뱅스러운 93헌법과 테르미도르 반동

[프랑스 혁명 - 공포정치와 더욱더 자코뱅스러운 93’헌법] 프랑스 전역은 자코뱅의 공포정치로 들어왔음. 자코뱅의 급진주의는 민주, 혁명, 공화 등을 표방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무차별적인 중앙집권화가 필수적이었음. 1793년 무렵 프랑스 전역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의 교세 약화에 반발하여 [대표적으로 프랑스 서부 방데 지방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기 일쑤였는데, 그들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이루어졌음. 파리에서도 반혁명파, 지롱드당원들을 포함하여 3000명에 가까운 숫자가 처형되었고,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 그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기구는 파리의 ‘혁명재판소’였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권력은 ‘공안위원회’. 공포정치 아래 국민공회 역시 공화정 아래..

서양사 2021.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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