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집권화의 길 - 백년전쟁
백년전쟁의 영향이나 결과로서 지적되는 것은 ‘국민의식’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백년전쟁을 통해 국민의식,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하지요. 또 한편 국민과 국토를 통제할 수 있는 중앙집권적 왕권이 구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백년전쟁 후기]
백년전쟁의 후기로 들어갑니다. 에드워드 3세가 죽고, 샤를 5세도 죽습니다. 둘 다 죽으면서 샤를 6세가 나옵니다.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바로 오를레앙 가와 부르고뉴 가 사이의 권력쟁탈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열의 배경은 샤를 6세가 정신병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신병인 샤를 6세의 섭정으로 들어온 이들이 부르고뉴 가입니다.
한편 영국 에드워드 3세의 뒤를 이은 리처드 2세 때에는 제대로 통치가 안 됩니다. 이 시기에 와트 타일러가 일어나버리면서, 통치가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리처드 2세가 전투를 하러 나갔습니다. 그 빈자리에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랭커스터 가문이 권력을 갖게 되고, 의회가 왕위 전환을 인정한 것으로 된 것이죠. 그래서 랭커스터 가에서 헨리 4세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랭커스터 가 헨리 5세도 나오는데 역시 정신병자입니다. 그리고 프랑스는 정신병자 샤를 6세가 있는데, 내분상태로 힘이 별로 없는 상태입니다.
1415년에 마침내 아젠쿠르 전투가 발발하고, 이것은 영국이 프랑스에게 대 승을 거둡니다. 그리고 “트루아 조약”을 맺게 됩니다. 트루아 조약의 핵심은 영국왕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조약의 주된 내용은 왕태자 샤를의 왕위계승권을 부인하고, 헨리 5세가 샤를 6세의 딸 캐서린과 혼인하여 프랑스의 왕위계승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1422년 샤를 6세와 헨리 5세가 잇따라 사망하자 생후 수 개월 밖에 되지 않은 헨리 6세(1422~1461)에게 영국과 프랑스 왕위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영국이 점령하고 또한 이와 결탁한 부르고뉴 가가 지배하는 북부 프랑스와, 부르즈(Bourges)에 도읍한 왕태자 샤를에 속하는 르와르강 이남으로 양분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어린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이 될 판이었습니다.
아젠쿠르 전투의 영국 승리 결과, 트루아 조약(1420) 정리
1. 왕위는 영국이 헨리 6세에게 돌아가버렸습니다.
2. 영국과 결탁한 부르고뉴 vs 왕태자가 있는 르와르 강 이남으로 프랑스가 양분되었다는 것.(https://blog.daum.net/ilovesattv/596) 1429년 이후 지도로 확인해보세요!
그렇지만 잔다르크가 등장했고, 잔다르크는 왕태자 샤를을 ‘샤를 7세’로서 프랑스왕 대관식시키는 데에 성공합니다.(1429년) 하지만 샤를 7세는 잔다르크를 버렸고, 잔다르크가 영국과 손잡은 부르고뉴에게 잡혔을 때 구하지 않았습니다. 잔다르크의 사후 전세는 계속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됩니다. 부르고뉴를 계속 강조했는데, 부르고뉴가 누구 편을 드느냐는 전세를 바꿀 힘이 있습니다. 프랑스 왕이 전쟁도 지치고 하기에, 부르고뉴와 영국에게 이제 전쟁 좀 그만 하자고 제안합니다. 영국은 거절하지만, 부르고뉴는 프랑스 쪽으로 붙어버립니다. 그래서 부르고뉴 공 필립과 샤를 7세가 1435년 아라스 화약으로 결합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아라스 화약 이후 프랑스의 승기]
1435년, 부르고뉴 공과 샤를 7세는 아라스(Arras)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런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고뉴 가문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자, 프랑스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1450년에 노르망디(포르미니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래도 프랑스군이 나머지 영국령들을 정복하는 데에는 애먹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451년 기옌 전투가 있습니다. 기옌의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영국령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에게 침공을 당하는 기분이었고, 계속해서 영국의 입장에서 저항을 했습니다. 1452년에는 보르도에서 결정적인 승리로 영국의 가스코뉴 지배를 종식시켰습니다. 이제는 기나긴 백년전쟁도 끝나게 되었으며, 영국의 수중에는 칼레 시와 그 주변 지역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결국, 1453년 시점에 영국인들은 대륙에 오직 칼레 지방만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흐지부지 백년전쟁이 막을 내렸습니다.
[왕권의 변화 - 프랑스 왕 집권, 영국은 장미전쟁으로 왕 집권]
프랑스에서는 거만한 귀족들이 전쟁 기간 동안 다수 죽어버렸고, 그 덕에 왕권을 강력하게 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영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30년간에 걸친 '장미 전쟁(1455~1485)'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쟁은 프랑스에서 돌아온 귀족들의 생존 경쟁의 일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귀족들의 몰락을 자초하여, 헨리 7세에 의한 중앙 집권화의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한편, 영국은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함으로써, 그 이후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문제들에 휩쓸리지 않게 되어 독자적인 국민 국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전쟁의 공포를 피해 기술직 이민자들이 플랑드르에서 영국으로 이주함으로써, 플랑드르를 능가하는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게 되어 경제 발전의 기초를 이룩했다. 즉, 백년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 모두 봉건 기사의 세력이 무너지고 농민 해방에 진전이 있었으며, 부르주아 계급이 대두되고 왕권이 확대되었다."(서양사개론).
이렇게 백년전쟁은 두 나라의 국민의식을 키워주는 동시에, 귀족들을 약화시키며 왕권을 강화했습니다.
* 참고 : 서양사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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