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쟁 이후의 프랑스와 잉글랜드
1. 프랑스 : 백년전쟁 이후로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들이 새로운 국세를 부과하게 되었고, 그 세입으로 상비군을 창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상비군들은 다른 남아있는 프랑스 귀족들을 압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 잉글랜드 : 백년전쟁과 장미전쟁 이후에는 완전히 잉글랜드 사람들의 의식상태가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봉토를 내려주고 보호를 받는 대륙식 봉건제였다면 이제는 꽤 전쟁 시기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대제후들은 백년전쟁 기간 동안 지휘관으로 활동했고, 그 아래에는 병사들이 있어서 주종관계를 맺었습니다. 그걸 '의사봉건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지휘관과 병사 간에는 급료를 가지고 맺어진 것이죠.
잉글랜드는 전통적으로 장자상속제인데다가, 귀족들의 수도 원체 적었습니다. 이후 영국 청교도 혁명기, 명예혁명기 때에야 귀족의 수가 급증하지만, 이 때까지는 아직 소수의 귀족들이 존재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엘리트 그룹에는 귀족 뿐만 아니라 젠트리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젠트리는 대지주 출신으로서 많은 땅을 가지고 사회봉사를 하거나 행정에도 일부 참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수는 튜더 시대에 크게 늘었는데, 그 요인으로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수도원의 땅을 다 몰수를 했고, 그 몰수한 땅을 사람들이 사들인 겁니다. 그래서 지주들은 더 많은 땅을 사들여서 대지주가 되고, 일반적 자유농들은 조금이라도 땅을 사게 되면서 젠트리 그룹이 점차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박지향 교수) 젠트리들은 주기사(州騎士) 직책의 대부분, 자치도시 대표, 치안판사 직책을 맡았습니다.
한편 장미전쟁의 끝으로 튜더 왕조의 헨리 7세가 왕위에 오르더라. 장미전쟁 과정에서는 1485년에 보즈워스 평야의 전투에서 헨리 튜더가 승리하고 권력을 장악하게 된 것이지요.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7세는 라이벌인 요크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여 그 갈등을 매듭지었습니다.
* 서양사개론, 박지향 - 영국사 강의, 주디스 코핀 외 - 새로운 서양 문명의 역사 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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