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프랑스혁명] 국민의회

취미와 문화 2021. 8. 1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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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민의회는 투표권을 가진 부르주아들이 특권을 배제하고 구성한 의회이며, 재산본위의 대의제 입각 자유주의를 추구했다. 빈민들에게는 당연히 불합리한 지향이었다.

 

그래도 국민의회가 성립하기까지는 대단한 노력들이 있었다. 1789년 6월 17일에 제3신분 대표들이 머릿수 표결을 재차 제안하면서 국민의회를 선포했다. 머릿수표결은 제3신분 투표권 확장을 위해 꼭 필요한 조치였다. 이를 위해서는 새 헌법이 필요했으며, 새 헌법을 요구하기 위해 삼삼오오 테니스코트에 모였다. 1789년 6월 20일 테니스코트 서약에서는 새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루이 16세는 제2신분 귀족, 제1신분 성직자 대표들에게 국민의회 참가를 지시했고, 어쩔 수 없이 삼부회를 해체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루이 16세가 군대를 집결하였다. 의회가 정말 헌법 제정에 착수하게 된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루이 16세의 군대 소집은 파리 시민들을 자극하였고, 파리 선거인단은 자치 위원회를 구성해 시행정을 접수하고, 국민의회 수호를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일부 민중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그것을 점령했다. 

 

이런 혼란은 점점 농촌으로까지 퍼졌다. 귀족들은 혁명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여러가지 음모설을 제기하여 대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농민들은 자기방어책을 강구했고, 귀족들의 성, 영주, 저택을 습격하여 봉건적 권리가 적힌 문서를 소각하였다. 결국 각 지방, 도시 귀족대표들이 1789년 8월 4일 봉건제 폐지를 선언하였다. 사냥, 십일조 등의 형식적 명예특권이 폐지되었고, 실질적 봉건적 공납은 유상으로 폐지되었다. 

 

1789년 8월 26일에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 발표되었다. 혁명은 이미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잉글랜드의 권리장전, 미국의 독립선언서, 로크 및 루소의 사상 등은 프랑스 혁명의 분위기를 돋궜다. 이 선언은 자유, 재산, 안전, 압제에 대한 저항을 시민의 권리로서 제정한 문서로서, 부르주아의 자연법 관념이 반영된 것이었다. 당연히 부르주아의 선언이므로 재산권에 대한 강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1789년 10월에는 여인들의 행진, 즉 10월 폭동이 있었다. 루이 16세는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고, 봉건제 폐지 선언과 인권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베르사유로 군대를 소집했다. 그런 와중에 프랑스 파리에서는 흉작이 일어나 식량은 부족해졌고 실업자는 늘었다. 파리의 민중은 베르사유로 행진하여 루이 16세 일족과 국민의회를 파리로 호송하였다. 

 

국민의회의 개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수 있다.

1) 재정 위기 타개책 : 국민의회는 아시냐 지폐를 발행하였는데, 담보는 교회재산이었다. 국민의회는 교회재산을 강제로 매각했고, 부르주아 및 농업 기업가들이 구매하게 했다. 당연히 빈농들은 그 재산을 구매할 돈이 없었다. 그런데 화폐를 너무 많이 발행한 나머지 가치는 폭락했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어쨌건 그들의 개혁은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길드 폐지, 내륙관세 폐지, 통행세 폐지를 실시했고, 1791년 6월에는 샤플리에 법으로 노동자의 결사 및 파업을 금지했다.

2) 교회 개혁 : '성직자 민사 기본법(1790년 7월)'으로 모든 성직자에게 선출제를 적용하고, 국가가 봉급을 지급하여 성직자를 국가공무원으로 만들었다. 이는 로마 교황의 반대에 부딪쳤다. 의회는 모든 성직자에게 법 지지 선서를 요구했고, 선서를 한 성직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3) 지방 행정 개혁 : 루이 9세 이래로 존재해왔던 고등법원을 드디어 폐지했다. 그리고 행정구역을 재편하여 기존의 83개 구역을 코뮌 등으로 나누었다. 

 

91년 헌법은 국민의회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이 헌법은 단원제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으며, 3일 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한 '능동적 시민'에게만 시의 관리, 입법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인을 선출할 권리를 주었다. 선거인은 10일 임금 분량의 납세자로, 도의 관리, 법관, 입법의회 의원을 선출하였다. 국민의회는 이렇게 재산 본위의 간접선거를 실시하였다.

 

루이 16세는 1791년 6월에 국외로 도망가려고 시도했다. 결국 그는 도망가는 와중에 잡혀버렸고, 군중의 분노와 원망을 샀다. 군중들은 왕의 퇴위를 요구했고, 국민방위군 사령관 라파예트가 군중의 시위를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발포를 명령했다. 이 무렵부터 군중들 사이에는 급진적인 정치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코뱅 클럽은 10월 폭동 후 혁명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가진 이들이 탈락한 이후에 남은 이들이 조직했다. 이들은 보통선거와 민주주의를 표방한 이들로서 과격한 분자들이었다. 자코뱅 클럽은 로베스피에르의 영향을 많이 받아 공화주의를 표방하였으며, 그 반대편에 있었던 파이앙 클럽은 귀족 및 상층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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