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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33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혁명 (5) 지롱드 국민공회의 몰락과 자코뱅 국민공회의 대두, 로베스피에르

[프랑스 혁명 - 1972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돌입과, 국민공회의 구성과 공화국의 선포] 애국은 공화주의적 열정과 국민적 통일성이라는 정신은 서로 결합하였고, 왕정의 비겁함은 바렌 도주사건으로 일찌기 비쳐졌음. 그런 속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심은 국민적인 공화정으로의 열정으로 연결되어 갔음. 1792년 7월 하순 프로이센군의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파리 시민에 대한 매우 위협적인, ‘파리 시민을 반드시 군사적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선언을 발표하자, 이것 때문에 파리 시민의 혁명열이 고조되었음. 그리고 파리의 각 지구의 대표들은 합법적 시 행정기구 대신 '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왕궁과 친위대를 공격하여 학살. 프로이센군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의 선언 이 있고 나서 얼마 ‘국민공회’의 소집을 결정..

서양사 2021.05.22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 혁명 (4) 자코뱅, 지롱드, 페이앙 - 91헌법

[프랑스 혁명 - 91’헌법] 이제 1791년 9월에 국민의회에서 91‘헌법이 나오게 됨. 사실 국민의회, 즉 제헌의회의 가장 중요한 과업은 새로운 헌법제정. 헌법에 관한 논의는 이미 1789년 여름부터 진행되었으나, 최종적으로 가결된 것은 1791년 9월 3일. ‘91년 헌법’은 새로운 정치체제로서 권력분립의 원칙에 입각한 단원제의 입헌군주제를 채택. 아직 왕이 존재하긴 하지만, 왕의 권위를 대부분 박탈한 것. 이 때에 루이 16세는 바렌 도망 사건으로 아주 망신을 당하고 위축된 상황. “국민의회는 스스로 승인하고 선포했던 원리들에 입각하여 프랑스 헌법이 수립되기를 원하는 바, 자유와 권리의 평등을 해치는 제도들을 최종적으로 폐지한다. ... 관직 매매나 공직의 세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헌법은..

서양사 2021.05.20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혁명 (3) 자코뱅, 가톨릭과 국가, 성직자민사기본법, 바렌 사건 외

[10월 베르사유 행진과 자코뱅당의 등장] 15개정 미래엔 세계사 142쪽에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하는 여성들”이라는 그림이 소개되어 있음. 이 명칭은 프랑스어 “La Marche des Femmes sur Versailles”를 번역한 것이고, 영어로는 ‘woman march on versailles’, 한국어로는 또 달리 ‘10월 베르사유 행진’ 등으로 옮겨지기도 함. 이것도 빵을 달라는 행진. “국왕 루이는 이러한 혁명의 진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소극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 파리에서는 웅변가와 신문기자가 민중을 선동하고, 전년도의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물가가 오르며, 실업자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묘한 10월 폭동이 일어났다. 10월 5일 약 6천~7천명으로 추정되는..

서양사 2021.05.18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혁명 (2) 국왕의 삼부회로부터 국민의회(제헌의회)로의 변화

[프랑스 혁명 - 국왕의 삼부회로부터 국민의회(제헌의회)로의 변화] 어쨌건 칼론느의 보조지세 부과안에 대하여 의회가 반발하였고, 당시 이미 걷고 있는 세금 한 항목 한 항목의 정당성 자체에도 문제를 제기하게 됨. 게다가 급한대로 엘리트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장경제에 정착하고 있는 중간계급들에게 세금을 걷어야 한다는 사실은, 왕정 자체가 기생충처럼 보여지는 효과를 냄. 이런 프레임을 귀족들은 열심히 활용하고 있었고, 왕정의 권위를 틈틈이 약화시켜감. 왕은 이 재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프랑스의 돈 문제를 삼부회에서 해결하려 했음. “고등법원은 새로운 세금의 부과는 오직 삼부회만의 권한이라고 하여,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의 이름 아래, 삼부회의 소집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들의 속셈은 왕..

서양사 2021.05.18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혁명 (1) 배경으로서 재정문제

프랑스혁명 - 배경으로서 재정문제 1) 절대왕정과 중상주의의 한계 : 루이 14세의 사망 소식이 들리자, 사람들이 대놓고 좋아했음. 물론 여전히 군주제는 상류층 귀족들이 통제하고 있었으나, 행정 규범들은 루이 14세 치세이래 계속해서 발달하고 있었음. 18세기 내내 식량이 소비자들에게 빠르고 값싸게 들어갈 수 있도록 시장과 배급망들이 계속해서 들어서고 있었고, 1760년대에 들어서 튀르고 같은 중농주의자들은 국가가 귀족의 권위를 축소하고, 농촌을 적극 지원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음. 게다가 외부적으로도 18세기 프랑스는 중상주의적인 확장은 지속적으로 실패. 게다가 프랑스는 영국과의 7년 전쟁(1756~1763년)에서 졌고, 캐나다를 온전히 영국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음. 프랑스가 식민지로 건사하고 있는 것..

서양사 2021.05.18

뉴딜(New deal) 경제정책이란?

이 글은 정치적인 지지나 반대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서양현대사 수업에서 화두로 던지기 위한 시사적인 내용을 담고자 하였음. 필자는 진보도 좋고 보수도 좋음. 글은 더 공부하는대로 보강예정. 뉴딜(New deal) 경제정책이란? 뉴딜은 1930년대 초 대공황 아래에서 사회적 재분배를 목표로 두고 금융, 산업, 농업, 임금결정에 정부가 개입하는 여러 죄를 말한다고 한다. 이 뉴딜이라는 것은 제대로 합의된 정의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문재인 식의 산업뉴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보고대회 기조연설에서 “한국판 뉴딜은 선도국가로 도약하는 ‘대한민국 대전환’ 선언”이라며, “추격형 경제에서 선도형 경제로, 탄소의존 경제에서 저탄소 경제로, 불평등 사회에서 포용 사회로” 대한민국을 근본..

서양사 2021.04.24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클레이스테네스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클레이스테네스 * 완쌤 : '5도'가 '부족'해 - 500인회, 도편추방제, 부족제 개편 부족제 개편 : 혈연, 지연과 관계없는 10개 부족(필레)으로 50여년 간의 참주정은 끝나고 새로 아르콘을 선출할 시기가 돌아왔음. "히피아스의 추방(기원전 510)으로 참주정치가 쓰러지자, 이를 타도하는데 협력하였던 귀족과 평민 사이에 다시 대립과 분쟁이 발생하였다. 이 분쟁에서 추방된 귀족의 한 사람인 클레이스테네스는 아테네로 귀환하여 평민의 지지를 획득하고, 스파르타의 힘을 빌려 저항하던 반대파 귀족을 분쇄하고 민주적 개혁에 나섰다. 그의 개혁의 목표는 종전의 혈연적, 지연적 유대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아테네의 전시민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민석홍, 서양사개론)..

서양사 2021.04.20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스파르타식 교육 - 강한 교육, 여성교육, 동성애적 교육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스파르타식 교육 - 강한 교육, 여성교육, 동성애적 교육 3. 스파르타식 교육 1. 스파르타식 교육의 배경 : 항상 스파르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헤일로타이, 즉 노예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서 5~10%의 스파르타 시민들은 항상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했음. 그래서 항상 이 아이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건강한 스파르타 시민으로 자랄 수 있는가를 검증을 받아야 했음. 불구로 태어난 아이가 있으면 산에다가 버리고, 불구가 아니고 비실비실한다고 해도 내다 버림. 건강한 아이들은 항상 전쟁 시와 유사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음. 1) 어려서부터는 어머니의 교육을 받다가 7살부터는 국가 차원의 관리를 받음. 2) 7세부터 6년: 파이디온(아동기)으로서 기초교육 및 읽기 쓰기 교육을 받음...

서양사 2021.04.20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 스파르타(라케다이몬)의 성립, 리쿠르고스 체제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 스파르타(라케다이몬)의 성립, 리쿠르고스 체제 1. 스파르타의 성립 아테네의 귀족사회가 동요했던 것과 달리, 스파르타는 꽤 안정적인 곳이었음. 도리아족인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라코니아 지방에 자리하게 되었는데, 정복민과 피정복민 간의 관계가 스파르타 특유의 시민등급을 나누게 되었음. 1. 스파르티아테스(Spartiates) : 스파르타 시민단. 어릴 때부터 전사로 키워짐. 2. 페리오이코이(perioikoi) : 주변인(주로 외국인), 똑같은 스파르타 사람들이면서 남하한 도리아 인들 중에 아직 시민이 아닌 사람들. [혹은 원주민 중에서도 스파르타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종속적인 지위를 감수한 자는 신분은 자유로우나 시민권이 없는 상태로서 페리오이코이가 됨.(서양사개론)]..

서양사 2021.04.20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고대 그리스 - 귀족정의 위기

[서양고대사 정리노트] 고대 그리스 - 귀족정의 위기 * 아테네는 당시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 이상의 유산시민이 국방의 주력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평민의 발언권이 점점 비공식적으로 강해지고 있었음. 당시의 군대는 총칼을 나눠주는 게 아니었고, 스스로 무장을 준비해 전투에 참여하는 형식이었음. 그래서 돈이 없으면 무장도 없고, 제대로 밀집보병 대형에 참여할 수 없었음. 만약 참여를 한다고 해도 배에서 노를 젓는 사람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함. 물론 이렇게 평민권이 신장이 되었다곤 하지만, 평균적으로 돈은 귀족이 많고 평민이 돈이 적었음은 당연지사. 1. 드라콘 법(기원전 621년) : 그리스 최초의 성문법 아테네 귀족정의 위기의 지표 중 하나는 귀족들이 관습법적인 권위를 점차 잃어간다는 것임. 법적 판단의..

서양사 2021.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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