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남조 - 송, 제, 양, 진 (2)

취미와 문화 2021. 5. 2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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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남조 정권의 성립의 메커니즘에 대해 정리를 했다면, 이번에는 몰락의 메커니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함.

 

1) 한문무인 : 귀족의 몰락은 한문무인 - 못 배운 무인출신자들, 그리고 은행(恩幸), 상인들이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을 창건한 유유라는 인물이 이 한문무인을 대표하는 자였고, 그와 같은 계층 출신자들이 대두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무제의 정권장악과 황제즉위과정에는 군사적으로 한문무인의 세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한문세력은 동진 말 부군(府軍; 서부 군단과 동부 군단)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는데, 당시 귀족들의 군사적 지배력이 상실되면서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무인들의 역할이 확대되고 그들의 정치적 권한이 증대되어 새로운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송의 무제 자신도 한문무인이며 이후 남조 각 정권의 창립자는 대부분 이와 같은 문벌이 없는 하급 무인 출신들이다. 이들 한문출신 창업자들의 황제권을 뒷받침하여 준 세력으로는 창업공신 집단과 종실집단이었다.”

송 문제 말년에 북위에서는 태무제가 등장하여 화북을 통일하여 크게 강성하였다. 이 때에 한문무인의 한 예가 소개되어 있다. 439년에 한창 중원에서는 북위가 화북통일을 완성시켰는데, 450년 남조 송문제는 그렇게 잘 나가는 북위토벌 계획을 세웠으니 참으로 무리한 일이었다. 무인인 심경지가 완강히 반대하니, 까막눈인 골수 무인인 심경지가, 귀족들을 매도하면서 무제에게 직언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컨대 집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밭 일은 머슴에게 맡기고, 베 짜는 일은 하녀에게 시키는 법. 폐하는 지금 적국을 치려고 하면서 백면 서생들과 일을 의논하고 있으니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 심경지(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편)

 

문제가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아마 이 모습은 서진시기에 귀족사회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사료일 것이다. 물론 북벌은 진행되고, 결과는 심경지가 예감한 대로 참담한 패배였다. 북위 태무제는 수도 건강의 강 건너편 언덕까지 진출하였다. 북위 군대가 물러서긴 했으나, 이 때에 큰 피해를 입고 쇠퇴의 길을 걸었다. 453년에 문제는 황태자에게 암살당했고, 그것을 시작으로 황실은 황제 자리를 둔 싸움으로 피바다가 되었다. 이제 황제직은 대의를 행하기보다, 한문들에 의해 실리를 보장해주는 직책으로 인식되어 버린 것이다. 피의 투쟁은 한문무인들에게는 오히려 기회의 시기였다. 한문무인들은 자신의 주군을 황제에 올리며, 자신은 출세할 것을 꿈꾸고 있었다.

 

2) 은행(恩倖) : 은행은 송문제 시기에도 보였으나, 5세기 후반 효무제 시기의 대법흥(戴法興)이라는 자가 대표적이다. 칡뿌리 캐다 파는 집안 출신인 그가 모시던 이가 황제(효무제)가 되자 자신도 그의 비서가 되었다. 대법흥은 효무제의 기분을 맞춰주고, 잔심부름을 하며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번 자신의 말을 들은 체도 안 하는 귀족들보다는 차라리 이 은행들이 마음에 드는 것이 당연했다. 이 은행은 앞서 이야기한 피의 투쟁 시기인 5세기 후반에 한 몫 잡을 마음으로 주군을 모시고 있었다.

한편 사회에는 상업이 번성했는데, 은행 자신들도 상인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화폐를 소유하여 이득을 보는데 능숙했는데, 이미 궁중이나 관청에 들어오는 어용상인에게 뇌물을 자주 받으니, 상업에서 특권을 부여해주었다. 게다가 은행들은 세금을 걷는 대사직에도 위임되었는데, 뇌물과 부정을 일삼았다. 그리하여 은행의 자택은 가히 황족의 저택을 능가하게 되었다.

물론 은행들은 상업이 발달하던 당시 상황을 잘 활용한 것이기도 했다. 강남에는 화폐 부족이 항상 논의되었는데, 화폐가 부족할수록 화폐를 많이 가진 은행과 상인들은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 임시책으로 화폐를 저질로 많이 찍어내었으나, 민간에서도 그런 저질 화폐는 만들 수 있었다. 화폐 가운데의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갔다.

송 정부도 화폐정리를 시도하여 양질의 화폐만 인정토록 하였다. 그렇게 양화가 다시 유통되고 혼란은 가라앉는 듯 했으나, 고질적인 화폐부족은 개선되지 않았다.

 

최근 화폐는 귀해지고 물가는 하락하여, 지금 물가는 이전에 비해 대부분 반값으로 떨어졌다. 농민은 고생고생하며 생산에 주력해도 현금 수입은 적다. 그나마 손에 쥔 화폐는 깎여나간 질 나쁜 화폐 뿐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정기적으로 세금을 거둘 때 양질의 화폐로 내도록 강요하고 있다. 악질의 화폐는 받지 않고 규정대로 양질의 화폐로만 납입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민간에는 좋은 화폐가 줄어들고 있다. 결국 농민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기들이 갖고 있는 나쁜 화폐 두 닢을 좋은 화폐 한 닢으로 바꾸어 세금을 낼 수 밖에 없다. 가난한 농민들이 갖고 있는 나쁜 화폐는 액면가가 같더라도 값은 반이므로, 그들이 받는 고통은 더욱더 심해진다. 반대로 양질의 화폐를 가진 부자는 점점 더 큰 부자가 되어 간다. - 남제 무제의 황자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 484년.(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편)

 

 

 

1. 유송 - 남조 송나라

 

2. 소도성의 제나라 : 이렇게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에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고, 결국 송조를 배반한 한문무인 소도성(제나라 고조)이 실권을 장악해 479년에 제나라를 건립하였다. 그 역시 송 말기의 내전에서 군공을 세운 자로서, 제위에 오르고 내부 통합을 위해 절약정책과 호적정비를 추진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3. 소연의 양나라 : 결국 제나라 종실인 소연은 무력으로 양나라(502~557)를 열었다. 양나라의 모습을 보면 기존에 서부와 북부 군단의 힘을 빌려서 성립한 군사정권이지만, 5세기 내내 있어왔던 순수한 군사정권과는 사뭇 양상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일단 그들은 군사정권과 마찬가지로 백면서생 귀족들을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었지만, 무장가문만을 우대했던 것이 아니라 하급귀족 가문에서 배출된 교양인들도 착실히 받아들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양무제 아래에서 일했던 범운(范雲)과 심약(沈約)이었다. 이로써 드디어 화북의 귀족풍을 유행삼아 따라가던 강남에, 문화적 전성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1) 문화 발전 : “[]무제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여 먼저 화북에서 이주한 귀족을 중심으로 백가보를 정하고 그들의 정치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었다. 또 유학을 장려하고 예악을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일으켜 수많은 사원을 짓고, 승려를 이용하여 백성의 정신을 불교로 순화시키려 하였다.” 대표적인 중국의 문화재로는 동태사(同泰寺)가 있는데, 양무제가 동태사에 자신의 몸을 바치는 바람에, 정부가 황제의 몸값을 동태사에 주고 다시 돌려받는 일이 흔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번 동태사는 휘황찬란한 당탑가람을 지었다. 유교와 불교 이외에도 도교 역시 흥성했는데, 도홍경 등의 유명한 거장들이 있었다.

 

  2) 오경박사 관직 및 오관 개설 : 오경에 각각 박사의 관직을 두고, 오관이라는 학교를 만들어 학생을 가르치게 하였다. 앞서 송, 제나라 시대에도 국립대학이 있었으나, 귀족 자제의 입학만 허가했으며 오래지속되지도 못했다. 그런데 양 무제는 귀족이 입학하는 국자학 외에, 일반민들의 수재들의 입학 정원에 제한을 두지 않는 오관을 설치한 것이다.

이렇게 유교적인 조치는 귀족들의 몰락과 함께, 황제권의 강화를 도모한 것이기도 하다. 양무제가 오관을 설치한 것은 한문세력들을 능력 중심으로 발탁하기 위함이었고, 9품제를 18반제로 바꾸어 재편성하게 되었다.

   “남주의 4왕조(송제양진)의 창업군주는 다 같이 문벌귀족이 아닌 한문출신의 무장이므로 국가경영에 유능한 한문출신의 인재를 발탁하여 정무를 맡기고 귀족관료를 소외시켜 나갔다. 이에 따라 종래의 귀족관료는 왕조에 기생하면서 다만 봉록을 받는 자(봉록수급자)로 전락한 반면 한문의 지지를 받는 황제권은 귀족세력을 떨쳐버리면서 중앙집권적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양의 무제가 9품제를 18반제로 바꾸고 한문세력을 발탁하기 위한 학교오관(學校五館)을 설치하여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인재를 뽑으려 한 것은 그 좋은 예이다.” 18반제로 정비한 조치 역시 강남의 문벌귀족제도를 약화시키는 데에 일조했다는 것입니다.

 

* 중앙관료제도  

1. 진~한나라 초기 : 3공 9경제

2. 한무제 이후 : 상서 강화

3. 위진남북조 : 상서성, 중서성, 문하성이 중요 행정 기관으로 자리잡음. "위나라에서 중서성이 설치되자 상서성의 권한이 점차 중서로 옮겨지고 상서성은 단순히 왕명이나 관청의 사무를 상신하는 행정사무기구로 변모하였다. 문하성도 한때 소부경의 속관인 시중과 황문시랑에서 기원하여 위-진 이래 독립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귀족들은 중앙의 요직인 상서성과 중서성의 고위직을 독점하고 고위관직의 인사권을 차지하였다. 특히 중서성의 장관인 영(令)과 그 아래의 사인(舍人), 시랑(侍郞)은 정책수립에 참여하고 문하성의 장관인 시중은 황제의 조칙과 중요법령의 심사와 거부권[심사박정권(審査駁正權)]을 장악함으로써 황제독재체제를 억제하고 귀족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4. 수당시대 : 3성 6부의 예비적 단계 "3성은 본래 한대의 9경 가운데 황실재정을 담당하고 있던 소부경의 말단 속관이었다. 그 후 전한 무제 때 천자의 독재를 위해 보조기관으로 상서가 실권을 갖고 국군(國軍)의 대사를 장악하게 되면서 3공의 권한을 빼앗게 되었다."

 

* 지방행정구조

1. 진~한나라 초기 : 군현제

2. 한무제 : 주자사 파견 이후 주군현제, 주 자사 임시 파견직

3. 후한 시기 : 주군현제, 주 단위 상설기구화, 주 자사가 지방장관이 됨.

(삼국시대) : 주군현제, 주 자사가 장군직을 겸하여 군사권 행사, 서진 무제 시기 주자사 군사권 빼앗고 봉건제 실시. 그로 인해 8왕의 난 발생 이후 봉건제로부터 벗어나 다시 주 자사에 군사권(장군직) 부여.

4. 위진남북조 : 주-군(국)-현제, 주 자사의 권한 강화 - 군사, 민정, 사법권 관할.

5. 수나라 이후 : 주현제

* 주 자사의 권한 확대는 지방관의 인사권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사는 민정과 군정을 장악하면서 정치 및 군사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장군부를 설치하고 다수의 부관(府官)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부관은 중앙에서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인물을 자사가 중앙에 추천하면 중앙에서는 그대로 임명하였으므로 부관은 자사의 친인척으로 충원되어 많을 경우 한 주에 2천여 명이나 되었다. (동양사개론)

 

  3) 경제정책 - 철전 전환 : 그렇게 수도 건강의 모습이 화려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앞서 보았듯 5세기 내내 화폐경제의 진전이 발견되었는데, 화폐 발행에서 민간주조, 양화/악화 문제, 동전 부족 문제 등이 걸림돌이었다. 양무제는 화폐부족을 개선하기 위해, 523년에 아예 화폐의 종류를 철전으로 바꾸어버렸다. 철전은 초기에 사회에서 보조화폐로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을지는 모르나, 철전은 더욱더 위조가 쉬웠기에 다시 민간 주조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결국 빈부의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고, 강남에 만개한 문화는 상층계급의 차지였다. 농민들은 유망했고, 실업자는 속출했으며, 깡패조직이 생겨났다. 먹고 살기 힘들어지니, 대중들은 군에 입대하기를 원했다. 당시 각 군부의 장관들은 마음대로 병사를 모집하고 있었고, 깡패집단들도 제 조직 소속을 그대로 유지한 채 군에 입대하면서 군대가 오합지졸 깡패집단화 되었다.

한편 귀족과 고급 장관 등 상층부는 사치와 향략에 빠져 있었다. 5세기의 은행-상인-한문군인 출신 상층부의 사치는 대단했다. 양무제 역시 불교를 사랑해서 동태사에 몸을 바쳤지만, 그 몸값이 오롯이 사찰의 몫이 되어 휘황찬란한 탑이 생긴 것이었다. 무제 시대에만 200개나 늘어난 건강 주변의 사찰들이 벌어들인 자본은 또다른 장원경제를 낳았다.

이러한 양무제의 열정이 보여주는 소비열풍 속에 귀족들이 표방하던 서진시기의 청담이란 공허한 말에 불과했고, 귀족이 상인들을 무시하는 일은 겉치레에 불과했다. 이 소비열풍 속에서 귀족들도 소작료 등 재산을 화폐로 바꾸고 제 생활을 꾸려나가려면, 상인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귀족은 고고했지만, 처량했다. 지금까지의 경제 양태가 심각해질수록 농민들은 더 많이 유망하고, 실업자들도 늘고, 군대도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으니, 양나라는 곧 위기에 빠진 것이었다. 위기에 빠진 강남의 양나라에 북조의 후경이라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 내려왔다.

 

[남조 귀족문화의 종말과 양나라의 멸망 - 547년의 후경의 난]

남조 귀족문화는 취약했다. 후경을 받아들인 남조는 후경에 의해 엄청난 후폭풍을 겪게 된다. 바로 547년에 후경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앞서 보았듯, 후경은 북조 동위의 창업공신이자 장군이었는데, 고징이 권력을 잡았기에 그 갈등 속에 갈등을 피해 양나라로 내려온 인물이었다. 양나라 황제는 후하게 대해주었지만, 후경은 양나라를 엎어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후경이 수도 건강을 함락시킨 후에, 양 무제를 생포하여 굶어죽게 하고 스스로 황제 위에 올랐다. (549년)

 

한편 강릉을 방어하고 있던 상동왕 소역은 대장 진패선을 파견하여 후경을 물리치고 건강을 수복하였다. 결국 진패선을 피해 후경은 북으로 달아나던 와중에 부하에게 살해되고, 양 무제의 황자 소역은 자립해서 양의 원제(552~554)가 되었다. 양나라는 후경의 난으로 국토는 황폐하고 인구는 격감하여 성읍이 텅 비는 상태가 되었으며, 강남에 쌓여왔던 문벌귀족의 문화도 쑥대밭이 되었다. 원제 소역은 왕승변 등을 파견해 진패선과 협력하여 후경을 토벌하도록 하는 한편, 양나라를 다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후방에 있었던 원제 소역은 화북의 서위에 기습을 당하는 바람에 힘없이 살해되고 말았다. 한편 진패선을 따라 후경을 토벌하러 파견된 왕승변도 진패선에게 살해되고, 진패선은 진(陳)나라를 건립했다.

 

4. 진패선의 진(陳)나라 : 원제는 민심수습을 위해 552년에 수도를 서쪽의 강릉으로 천도하였다. ... 강릉이 함락된 후 양의 장군 진패선과 왕승변은 소역의 아들 소방지를 황제에 옹립하니 이가 경제이다. 그러나 진패선이 정변을 일으켜 555년 왕승변을 살해하고, 정권을 독점한 후 다시 경제를 폐위시키고 진나라를 열어 황제위에 오르니 이가 진(557~589)의 무제이다.”(동양사개론) 진패선도 역시 한문무인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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