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명나라 시대사] 백련교 홍건적의 난, 홍무제 주원장

취미와 문화 2021. 6. 1.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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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회복과 북경 천도]

강력한 원나라에도 다양한 반란세력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백련교라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백련교는 불교의 일파로 동진의 승려인 혜원(334~417)이 노산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제자를 모아 조직한 백련사에서 기원한다. 염불삼매를 수행하며 아미타불을 믿었으나 당대에 미륵불을 신봉하면서 미륵불의 내세를 믿고 현세를 부정하게 되었다. 원말에는 페르시아에서 전파된 마니교(明敎)의 영향을 받았고, 여기에 미륵불신앙이 합세하여 현재의 곤궁한 백성을 미륵불이 와서 구제하여 준다는 메시아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백련교의 교주 한산동(韓山童)은 사회의 혼란을 틈타 자신이 미륵불의 환생이라 하여 농민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의 신도 유복통(劉福通)은 한산동을 송 휘종의 8세손이라 선전하면서 반란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한산동이 처형되자 다시 그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황제로 옹립하고 국명을 송(宋)이라 하니 그 세력이 막강하였다. 백련교도는 미륵불이 하생하고 명왕(明王)이 출세한다는 것을 믿고, 특히 홍건(紅巾)을 머리에 둘렀으므로 홍건적이라 하였다.” 이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홍건적의 난입니다. 그 외에도 소금 밀매업자 장사성 등도 반란에 가담했습니다. 이 반란들로 인해 몽골은 북쪽으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원이 흔들립니다.

 

반란세력 중에 주원장이라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못생긴 주원장은 빈농의 자식입니다. 탁발승으로 활동하기도 하다가, 주지스님에게 쫓겨났죠.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를 맞아 군인이 되고, 주원장 자신이 군벌로 대두하게 됩니다. 훗날 장사성, 진우량 등 원말 반란세력과 어깨를 나란히하면서 그들과 대결하게 되죠.

그는 본래 농민반란 시기에 곽자흥 군단에 가담하다가, 그로부터 독립하였고, 그 과정에서 주원장의 입장은 달라집니다. “일단 곽자흥 군단과 결별한 1353년 후, 독자적 세력으로 발전하면서 지금까지의 반지주적 입장을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백련교도와 결별하고 드디어 지주세력을 옹호하는 방향전환을 하게 되어 강남 지주세력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주원장 군단이 명을 건국할 수 있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이 되었다. 명조를 건국한 주원장의 공신집단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유기나 송렴을 대표로 하는 강남지주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주원장과 생사를 같이 하던 서달이나 이선장 등의 24인의 동향출신 무인집단이다. 이 양대 세력은 다같이 지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동양사개론) 주원장 세력은 지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그리 개혁적인 경향을 띠지 않았기에 오히려 집권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승리하여 황제로 오르게 됩니다. 그는 황제의 연호를 홍무로 하였고. 북쪽의 나머지 반란세력들을 규합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이 때에는 이미 장사성 등 남쪽 군벌들은 마무리 지은 상태였습니다.

 

 

주원장이 어떻게 황제권력을 잡았을까요?

1. 1376년 공인(空印)의 안() : 지방관청에서 장관 직인이 찍히지 않은 서류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장난질을 쳤다며 꼬투리를 잡고 대거 숙청을 했습니다. 이 사건과 병행하여 종래 지방 최고 통치기관인 행중서성을 폐지하고, 새로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司, 민정),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군정),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감찰)로 이루어진 삼권분립체계를 채택했습니다. 권력분산을 시키고, 핵심 권력을 황제가 가져가는 체제를 주원장이 차근차근 진행해갑니다. 이 체계는 명나라 특유의 황제 중심의 운영체계였는데, 성군 아래에는 좋은 제도지만, 훗날 명나라 붕괴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2. 1380년 호유용(胡惟庸)의 옥/의옥(疑獄) 호유용은 주원장과 같은 고향 출신에다가, 주원장이 반란군에 있을 때부터 책사로서 참모역할을 했던 사람이고, 승상의 자리에서 중서성의 모든 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원장이 이 호유용을 원나라, 왜와 내통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면서 잡아넣었습니다. 물론 증거는 없었습니다. 일단 홍무제는 기본적으로 일단 죽이는 단위가 만 명, 십만 명 단위로 죽이는 것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출신성분들을 따져보니 호유용의 고향 사람이나, 호유용과 친했던 사람으로서 높은 관리이거나 강남 대지주 출신들입니다. 어쨌건 이 호유용의 옥을 계기로 재상부 소속의 중서성과 그 장관인 승상직이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6- 이호예병형공 6개 기관이 황제 직속으로 개편되었습니다. 마치 육조직계제가 떠오르는 권력구조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개편을 단행하는데, 바로 군사중추기관인 대도독부(大都督府)를 폐지한 겁니다. , , , , 5군 도독부로 고쳐 통수권을 분할해놓았고, 감찰방면에도 기존의 어사대를 도찰원(都察院)으로 개조하여 관료들에 감시를 강화했습니다.

 

.3. 1393년 남옥(藍玉)의 옥/의옥(疑獄) : 반란군 시절부터 자신을 보좌했던 남옥 장군을 또 의옥으로 죽였습니다. 역시나 토사구팽입니다. 

 

이러한 의옥사건이라는 것에서 의미 있는 변화라고 한다면, 제도적인 측면에서 재상제도가 없어졌다는 데에 큰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황제가 전부 처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 6부를 자신에게 직속시킵니다지방행정 면에서 결국 행중서성도 폐지됩니다. 행중서성은 지방에 설치된 중서성이죠. 이전에 행중서성의 사무보고는 중서성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지방의 최고행정단위인 행중서성이 사라지면, 그 아래 민정, 사법감찰, 군사로 분리되었습니다. 그것을 지방에 맡기지 않고 황제가 처리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막대한 정보가 황제에게 몰리게 되면, 황제의 수족이 많이 필요합니다. 고로 공포정치를 취해야 하고 통제를 위해 첩보기관 금의위(錦衣衛; 비단옷을 입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신하의 털끝 하나까지 감시하고 있었고, 조그만 잘못이라도 하면 뜰에서 곤장을 쳤습니다

 

그렇게 건국을 하고 나면 주원장이 태조가 되어 황제독재 체제를 성립시킵니다. 황제독재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가지 정책이 있어왔습니다. (541)

1. 영전사 설치 : 주원장은 명 건국 이전에 이미 영전사(營田司)를 설치하여 수리사업과 제방공사에 착수한 것입니다. 주원장은 제국의 재정 확충을 위해서 농업 정책에 신경을 썼는데, 농민들을 제자리도 돌려놓거나, 화북지역에 이주시켜 둔전을 제공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농사짓기 위한 치수, 관개공사에 가장 큰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2. 어린도책 - 토지모양과 면적, 소유주 등을 기록한 토지대장

3. 부역황책 - 각 집마다의 토지소유액, 가족 수, 인구의 이동과 증감을 파악하여 조세부담액 등을 기록

<<부역황책>>, ,<<어린도책>>은 농사를 관리하는 장부입니다. 이 장부인 어린도책과 부역황책을 이용하고, 이장호과 갑수호를 운영해나가는 것이 바로 리갑제입니다. 

 

4. 대명률 : 법을 강화하는 과정이 있으니 대명률도 제정합니다.

 

5. 과거제 부흥 : 원대에 침체기였던 과거를 다시 부활시킵니다.

 

6. 육유 : 육유는 사상적으로 유교에 기반하는데, 몽골의 지배 하에서 사라졌던 유교적 향촌질서를 살리려는 조치입니다. 홍무제가 1398년에 육유(六諭)를 반포합니다. 육유에서 는 황제만이 쓸 수 있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효순부모, 孝順父母), 윗사람을 존경하며(존경장상, 尊敬長上), 향리 사람과 화목하고(화목향리, 和睦鄕里), 자손을 잘 훈육시키며(교순자손, 敎順子孫), 각자 생업에 만족하고(각안생리, 各安生理), 나쁜 행위를 행하지 말라(무작비위, 毋作非爲)] 굉장히 전통적인 가르침입니다. 전형적이라고 생각하는 동양적, 한족적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7. 기구개편 :

- 내각대학사 : 이제 명나라 중앙 관청 구조도를 봅시다. 재상/승상은 존재하지 않는데, 내각대학사를 보면 재상과 비슷해보이지만, 사실 비서에 불과합니다. 이 비서는 사실 자신이 맡은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보좌할 뿐입니다. 황제 아래 6부라는 것이 있고, 

- 도찰원 : 의심많은 주원장이 설치한 도찰원이라는 감찰기구가 있습니다. 본래 어사대라는 것이 있었고, 명대에는 이 어사대가 도찰원이라는 것으로 승격한 것입니다. 

- 지방 행정 - 포정사사 : 중서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원나라 시기를 고려할 때에 지방에는 ‘행중서성’이었으니, 행중서성도 폐지되고, 대신 민정만을 담당하는 포정사사를 둡니다. 그리고 당시 군사제도로 원대 추밀원제를 계승하고 있던 대도독부를 폐지하고, 5군도독부로 분할하여 황제에 직속시켰습니다. 5군도독부는 대도독부가 가장 큰 대도독 한 명이 책임지겠지만, 5군도독부는 분할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고위관료의 권위를 해체시킨 것입니다. 모든 권력으로부터 멀어진 신하들은 금의위에 감시를 당했습니다. [도찰원 : 공적 감찰 / 금의위 : 사찰 기관] 지방에는 도지휘사라는 군사담당, 그 외에 ‘안찰사라는 형사담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민정, 사담당인 포정사사 아래 부----이 있습니다.

- 통정사사 : 태조는 홍무 9년에 중앙의 중서성에 설치된 평장정사와 참지정사를 폐하고 이듬해 통정사사를 따로 설치하여 내외의 장주(章奏)를 중서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전달함으로써 중서성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황제권을 강화합니다. 결국 중서성은 폐지되기에 이릅니다.

 

8. 제왕분봉 : 초기 명나라의 수도가 남경이므로, 북변 몽골을 방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왕자들을 북쪽에 분봉을 해주는, 제왕분봉(諸王分封)을 실시합니다. 주원장까지는 공포정치와 철저한 감시로 이 왕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훗날 이들이 화근이 될 것은 예상이 가능하지요 태조는 북방 몽골족에 대비하고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아들을 각 지방에 분봉하는 봉건제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봉건제왕은 막강한 군사력을 갖게 되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바로 영락제의 등극입니다.

 

8. 조공무역체제 : 조공무역을 강화하고 사무역을 규제하였으며, 특히 국내 반명세력과 외부세력의 결합을 경계하여 해금령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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