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사 정리노트] 당나라 - 당고조 이연, 당태종 이세민, 측천무후

취미와 문화 2021. 6. 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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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1. 당고조 이연 : 618년에 수 문제 중신이자, 수 양제의 이종사촌인 이연이 당나라를 개창합니다. 고조 이연에서 고조는 묘호입니다. 이연 역시 관롱집단 출신입니다. 서위-북주--당 사람들이 모두 관롱집단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고조 이연은 관롱집단 중심으로 하여 황제를 오릅니다. 8주국 출신 조부의 세력을 이어받아 수나라시기부터 권력을 얻어나갔던 이연은, 수가 무너지자 반기를 들었습니다.

 

2. 당태종 이세민 : 당의 황제라고 했을 때, 당고조 이연보다는 당태종 이세민이 유명합니다. 이세민은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위협하는 626년 현무문의 변으로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당태종 시기는 정관의 치(626~649)’라고 불렸던 시기로 좋은 시기였나 봅니다. 정관(貞觀)은 연호입니다.

 1) 현무문의 변 : “고조 이연은 처음 태자를 장남 건성으로 하였다. 그러나 세민은 당이 건국에 큰 공을 쌓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626년에 세민은 군사정변(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 건성과 아우 원길을 살해하고 고조로 하여금 강제로 양위토록 하였다. 이후 당의 왕위계승은 무·위의 난을 겪고 당말의 환관 세력에 의해 폐립이 반복되면서 계속 순탄하지 않았다.”

 

  2) 정관정요와 정관씨족지 : 이세민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서, 신하의 올바른 충고를 수용하며, 뛰어난 관료들을 뽑았습니다. 명재상인 방현령, 두여회, 명장인 이정(李靖), 이적, 간관인 위징, 왕규(王珪) 등의 보필이 있었습니다. 태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기탄없이 수용하였다. 태종이 신하에게 창업(건국)과 수성(守成, 발전)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를 묻자 방현령은 국가의 창업은 생사가 달린 일이므로 더 어렵다고 하였고, 위징은 수의 멸망 교훈을 들어 창업도 어려우나 수성이 더욱 어렵다하였다. 태종은 위징의 수성지난론을 옳다고 여기고 당나라 경영에 참조하였는데, 후에 오긍이 편찬한 <<정관정요>>는 이와 같이 태종과 신하들 간의 국정운영에 대한 기탄없는 내용을 정리하였고, 이후 황제들이 애독하는 제왕학의 교과서가 되었다.”(동양사개론) 오긍의 <<정관정요>>와 더불어 씨족지를 편찬하게 하는데 그것을 <<정관씨족지>>라고 합니다.

 

3) 돌궐의 굴복 : 당태종은 돌궐을 거의 완전히 진압해버리니, 천가한 혹은 탱그리가칸이라고 지칭되며, 그 후에 서돌궐을 이용해서 완전히 동돌궐을 없애버리게 됩니다

 

 4) 도호부 체제와 기미지배체제(羈縻支配體制) : 태종과 고종에 걸쳐서 6도호부를 설치하게 되었고, 장관을 도호라고 하여 민정과 군정을 총괄하게 하면서, 기미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사실상 기미정책은 자치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박민수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본래 한족적인 마인드에서는 이들을 다 깨부수고, 그곳의 영토를 점거하여 그곳을 지배해야 합니다. 그에 반해 당태종은 고삐를 이용하여 돌궐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인데, 영토에 집착하지 않고 자치를 허용해주는 것입니다. ... 적당히 이간질을 하거나, 친당세력을 키우거나, 서로 당에 충성 경쟁을 시키는 등 지배를 강요하지 않으며, 돌궐의 민족적인 습속을 잘 활용한 것입니다. 이미 당나라 황실은 오랑캐들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호한체제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 관롱집단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호한지배체제의 일부라는 것에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 

 

3. 무측천 : 무측천은 여성 황제입니다. “조익(趙翼)은 <<이십이사차기>> 권 19 <당여화(唐女禍)>조에서 당은 특히 여자로 인해 화를 입은 왕조라 하였다. 그 예로 당고조 이연의 기병은 수양제의 후궁과 이연과의 관계를 알고 있던 이세민이 아버지를 협박한 데서 시작되었고, 태종이 동생의 처를 총애하여 현무문의 변란이 일어났고, 무후·위후의 화, 그리고 안사의 난도 현종이 양귀비를 총애하여 국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동양사개론) 여러가지 사정으로 이씨가 아니라 무씨가 황제에 올랐으니, 혁명입니다. 성씨가 바뀌었으니 국호를 주()로 바꾸는데, 이것을 무주혁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도도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습니다

무측천은 이제 주변에 있는 신하들도 물갈이하고 공신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관롱집단, 개국공신 혹은 문벌귀족 vs 과거출신, 산동지방 출신으로 대립됩니다. “고종의 황후 무씨(武氏)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로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참으로 다양하다. ... 왕황후 지지파는 서위의 우문태 이래 문벌을 자랑하던 장손무기 등 개국공신집단(관롱집단)이고, 후파는 이적(본래 이세적이었으나, 이세민의 이름에 세가 들어가므로 세를 뺐음), 허경종, 이의부 등 산동지방의 옛 북제 지역 출신이다. 그러므로 영휘 6 665년에 왕황후를 폐출하고 무후가 황후로 책봉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서위 우문태 이후 북주, , 당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당의 창업에 참가하였던 개국공신집단의 몰락을 가져왔고, 이에 대신하여 산동(옛 북제영역)의 새로운 관료가 무후정권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 서기 690년 측천무후는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고, 중국고대 주나라의 이상을 재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국호를 주()라 고치고, 당제국을 일시 찬탈하였다. 그는 당의 수도 장안 대신 동도 낙양을 신도(神都)라고 하여 정치 및 군사의 중심지로 삼고 구귀족을 숙청한 후 과거제도를 확대하여 신진관료를 대거 등용하여 국정을 쇄신하였다. 이렇게 측천무후가 관롱집단 사람들을 걸러내고, 실력있는 이들을 자기 사람으로 꽂아넣기 위해 대두한 제도가 바로 과거제’였습니다.

 

 

1. 실권을 잡던 시기 - 밀고 장려 : 측천무후는 683~684년 경에 황제를 아래에 두고 자기가 정치를 쥐락펴락했습니다. 그에 대해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684년 이경업의 난이었습니다. 여기에 들어가 있던 사람이 낙빈왕 등이 있었죠. 이 이경업의 난은 측천무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의심이 많아진 측천무후는 밀고를 장려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금 중국 역사에서 '혹리'가 출현하게 됩니다.

 

2. 황제로 올라오는 시기 : 과거시험을 통해 관롱집단을 배제시키고 자기 사람들을 꽂아넣었습니다. 이 신진관료들에게 궁궐문을 드나들 때 북문을 통해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데, 이들을 북문학사라고 불렀습니다. 북문학사들에게 연구를 시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열녀전>입니다

무후시대에 민생이 안정되었으며, 강남과 강북의 물자 유통도 활발했습니다. 먹고살기 좋았다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주례>>에 따라 관제를 개혁하였습니다. 사상적으로도 도교 대신 불교를 신봉하여 불교도 발전하였습니다.

 

3. 사망 이후 : 측천무후가 공적이 너무 많기 때문에, 비석에 새길 수 없어서 아무것도 새기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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