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남조 - 송, 제, 양, 진 (1)

취미와 문화 2021. 5. 22.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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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 - 동진의 성립]

그렇게 흉노 계열 유총의 한나라에게 311년에 서진의 수도 낙양이 점령되자, 서진의 대신인 순번 등이 왕족 출신 사마예를 맹주로 세워 만족에게 대항하자는 격문이 띄워졌고, 강남에서 화북민에게 저항하던 호족 주기는 남하하는 화북민 세력들과의 전쟁(오흥의 소란)에서 용맹하게 싸웠음. 그런 한편 강남호족의 총사령관인 왕돈은 도망을 갔음. 그러나 호족 주기는 겁쟁이 같은 왕돈의 지시를 받는 입장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으니,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음.

   한편 312년에 강남호족의 연합을 묶어왔던 강력한 호족 고영이 죽었음. 서진의 순번이 띄운 격문은 강남 사회에 퍼져, 촌뜨기인 강남 귀족과 선비(사인)들이 사마예를 중심으로 한 서진 출신 왕실에 모여들었음. 그런 한편 강남을 이끌어 왔던 왕씨들, 그러니까 왕돈의 사촌 형인 왕도는 주기 등의 강남호족들이 자기 휘하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음. 그들은 강남의 호족들을 먼저 분열시켜 별도의 세력으로 결합하는 결과를 막고자 하였음.

 

향론을 쥐고 있는 자는 인물의 추천권을 상품화하여 사람으로부터 사례를 받거나 ... 혹은 시장을 독점하여 인민의 이익을 빼앗고, 혹은 남의 토지를 빼앗아 약자의 생활을 위협하고 혹은 정부의 여러 기관을 이리저리 드나들며 이권을 구하고 있다. - 갈홍(葛洪), <<포박자>>(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편)

 

그렇지만 화북 서진의 문화가 강남으로 도래했으므로, 강남 촌뜨기 귀족과 사인들은 그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음. 강남의 평민들은 향론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지만, 강남 호족들은 향론이라는 것을 따라했음. 왕도는 그런 새로 강남에 유행하는 귀족문화를 이용하여, 오와 회계 등 강남 귀족들에게 사마예 정권의 고위 관직을 내어주고, 강남 인사의 향품수여권을 주었음. 본래 강남에서 잔뼈 굵던 조기 등의 주씨와, 강남에서 그래도 호족으로서 호의호식하던 심씨는 서진 출신자들을 주군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음.

  강력한 호족 주기는 이런 상황에 죽어가면서도 ‘나를 죽인 것은 중원에서 온 놈들이다. 너희들이 꼭 복수를 해 다오’라는 유언을 아들들에게 남겼음. 그렇게 주기의 아들 주협은 화북 출신 귀족들에게 복수를 결심. 그러나 앞서 말했듯, 왕도는 강남귀족들을 분열시키는 데에 성공했기도 하고, 강남호족들의 서진 귀족 문화에 대한 동경 때문에 다시 호족들을 결합시키기 힘들었음. 양선 주씨 내부적으로도 단결이 되지 않아서, 주협의 사촌 형인 주연이 사마예의 편에 들 정도였음. 결국 주협은 그리 지지를 받지 못한 채로 반란에 뛰어들었다가, 왕도가 주연에게 백 명의 고수들을 내려 주협의 반란을 진압하였음. 주협의 복수전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토지만 챙기던, 주기의 동생 주찰 역시 양선 주씨 탄압 속에 죽어버렸음.


  그렇게 수춘의 주복, 오의 고영, 양선의 주기 등 강남호족들의 저항은 완전히 진압되고, 강남은 화북에서 도망쳐 내려온 진 왕실에 군사적 문화적으로 복속당음. 양자강 중류에서 군사력으로 집권한 왕돈, 양자강 하류의 뛰어난 정치가 왕도, 그리고 진 왕실의 핏줄을 잇는 사마예는 천하를 취함.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공유한다.”
  물론 사마예(원제; 317~322 재위)는 강남을 분열시키는 방편을 넘어 더욱 더 뛰어난 권력을 원했음. 원제 사마예는 외척 유(庾)씨의 유외를 신임하고 왕씨를 멀리하기 시작했음. 군사력을 가진 왕돈은 322년에 유외가 간신임을 들어 수도 건강을 제압했고, 원제는 모든 실권을 잃은 채로 죽어갔음. 왕돈의 난은 324년에 겨우 소준 등 북변수비군에 의해 제압되었음.

 

  외척인 유씨의 왕권강화 추진은 멈추지 않았다. 제2대 황제 명제(322~325 재위)도 강력한 왕권을 원하였고, 명제의 외척인 유씨 일족이 그것을 추진하였음. 명제가 죽고 다섯살 난 성제(325~342 재위) 때도 외척인 유량이 영웅인 소준의 군단의 기세를 꺾으려 했기에, 소준의 반란을 맞이하게 되었음. 다시 328년에 수도 건강은 다시 무너졌음.

  하지만 왕도와 성제는 아직 남아있었음. 유량은 다시 329년에 재기하여 수도를 탈환했고, 왕도는 건강에서 다시 기반을 정비해나갔음. 유씨의 왕권강화책과, 왕도의 강남분열책은 번갈아 시도되었지만, 서부와 북부의 군사력을 통합하고, 분열책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쪽으로 자리잡게 됨.

 

  북부와 서부의 군단은 대개 산동성 남서부와, 서주라고 불린 강소성 북부의 유민집단이었는데, 치감이라는 자의 지휘를 받아 ‘소준의 반란’ 시기 유량을 도와 건강을 되찾았던 이들. 군단의 지휘자 치감은 왕도가 죽은 339년의 다음 해인 340년에 사망하는데, 천자에게 유언이 담긴 편지를 보냄.

 

제가 인솔하고 있는 무리는 잡다하게 모여든 사람들고, 대개 북방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내몰려서 저와 함께 이주해 온 자이거나 저에게 새로이 몸을 의탁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모두 돌아가고 싶어합니다만 제가 폐하의 어명을 받잡고 토지와 주택을 나누어 제공해 준 결과 점차 정착해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위독하다는 말을 들으면 모두 불안해할 것이고, 만일 그들이 북방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병력에 구멍이 뚫려 큰 소동이 일 것이니, 이들 무리가 믿고 따를 만한 인물을 저의 후임으로 임명해주십시오.(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편)

 

치감의 유언에 따라 천자는 그 군단의 지휘자로 인망을 얻기 좋은 인물을 배정하였음. 그렇게 유민으로서 토지와 주택을 받은 이들이 정착하게 되었고, 대부분 병호로서 대대로 병역 의무를 지게 하여 군사력 공백을 막았음.


  화북민 유입이 많고 수도 건강과도 거리가 멀었던 양자강 중류에서는 왕돈의 세력과, 동진 정부에서 서쪽으로 진출하고자 파견한 도간이라는 자가 있었음. 왕돈은 도간의 세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나, 왕돈은 왕돈의 난 실패 이후 죽음을 맞았음. 그리고 양자강 중류의 군단을 이끌고 있던 도간은 334년에 죽었는데, 그 군단장 후임으로 유량이 부임하게 되었음. 유량은 그 군단을 중심으로 민정과 군정을 동시에 행하는 ‘막부체제’를 시행했다.

 

  유량의 동생 유익은 그 뒤를 이었는데, 이 막부를 바로 서부(西府)라고 함. 서부는 동쪽에 있는 건강정부의 아래의 거점일 뿐이었으나, 점차 성장하며 북부(北府; 북방정면군 장관에게 속하는 군부의 약칭)를 기반으로 하는 건강정부에 대항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해져갔음. 그렇게 동진왕조는 서부와 북부의 균형을 유지하는 과제를 떠맡음.

 

어쨌건 북부, 서부 등 양자강 유역의 군부의 주를 이루는 계층이란 화북 유민들. 이들을 정착시키고, 군사력의 공백 상태를 방지하며, 서부와 북부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동진정부의 과제였으며, 유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했음. 그리하여 양자강 유역에는 남방의 토착인과 호적을 달리하여 보호대상자로서 조세감면의 혜택을 받았다. 대신 북부의 사람들처럼, 민간 유이민 호에도 군역 의무를 지는 자가 많았을 터인데, 그것은 북방인을 군사력의 기초로 삼는 조치이며, 북방 출신 귀족들에게 [조세감면을 해줌으로써] 경제력을 강화하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서부군단의 유익은 345년에 죽었다. 그리고 유익의 후임자로 환온이라는 문무를 겸비한 이가 올랐다. 그는 347년에 저족의 성한국을 무너뜨릴 정도로 뛰어났으나, 너무 뛰어난 탓에 건강정부에서 견제를 하였다. 건강정부는 북부에 환온의 정적인 은호를 중용했고, 은호는 북부군단 단독의 북벌을 수행했다. 은호의 북벌은 대패였다. 그것을 기점으로 서부군단의 환온은 북부군단에서 은호의 세력을 탄핵하고, 북부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서부와 북부의 균형이 깨지게 된 것이다.
환온은 그렇게 동진의 실권을 장악했고, 낙양을 탈환하는 등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으나, 북벌을 실패하고 내부 정권싸움에 집중하다가 왕도의 후계자인 사안이라는 자에게 밀려버렸다. 그리고 환온이 373년에 죽으면서, 사안이라는 자가 실권을 잡게 되었다. 4세기 후반, 사안은 북부에서 강성하던 전진의 부견을 회수에서 맞아들여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사안이 모시던 동진 효무제는 그 동생인 회계왕 사마도자의 횡포를 막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비구니, 배우, 형사(刑事) 출신자들을 멋대로 관직을 꽂아 넣었고, 화북 귀족들의 구품중정제 전통을 완전히 무시했다. 바야흐로 귀족제가 무너지는 시점이 된 것이다. 효무제 이후에도 왕들이 시원찮으니, 사마도자는 계속해서 횡포를 부렸다.


북부 장관 사안의 후임자 사현, 그리고 사현의 후임자로서 왕공이 나타났고, 서부 장관 환온의 후임자 환현이 나타났다. 그렇게 다시 북부의 왕공서부의 환현의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건강의 귀족정권의 용병대에 불과했던 북부의 수장 왕공은 자신의 권세에 자만했지만, 그 아래의 실권자 유뢰지라는 자가 자신을 뛰어넘어 성장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유뢰지는 사마도자의 아들 사마원현과 손을 잡고 왕공을 죽였다. 유뢰지는 북부 군단의 새로운 수장이 되어 사마원현의 아래에 들어가고, 399년 양자강 하류 삼각주 일대에 오두미도의 ‘손은의 난’을 토벌한다. 유뢰지의 북부 군단이 손은의 난을 진압할 때 남조 송나라의 시조 유유 역시 북부 소속으로 참전하였다. 북부 군단에게 손은은 죽었지만, 그 후임자인 노순이 그 반란을 지속하였고, 결국 유유의 수군에게 진압당하였다.


  정리하자면, 동진이 건국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는데 322년 경 내부의 반란으로서 ‘왕돈의 난’. 이 동진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399년 경 ‘손은-노순의 난’. 그리고 그 직후 5세기 초반에 ‘환현의 난’.

 

1. 유송(劉宋) - 남조 송나라

1) 송 무제 유유(劉裕) : 손은-노순의 난은 송을 건국하는 유유가 등장하는 계기. 그리고 손은-노순의 난은 종교와 관련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오두미교를 믿었지만, 도교 계통으로서 천사도가 결합하게 됨. 서부 군단의 환현은 손은-노순의 난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수도를 향해 갈 태세를 갖췄고, 북부 군단의 유뢰지와 사마원현은 그 서부군단을 토벌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유뢰지는 서부 군단의 환현이 수도에 박두하자 화해 무드를 조성했다. 사마원현은 배신을 당한 채 혼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사마원현이 환현에게 죽은 후, 환현은 화해무드였던 북부 군단의 유뢰지를 실각시켰고, 북부 군단의 장군들을 살해해 나갔다. 마침내 환현은 자신이 선양을 받고 ‘초(楚)’ 나라 황제를 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후 404년 2월에 북부 군단의 유유 등이 환현 등을 쫓아내고 본래의 황제인 안제를 앉혔으나, 이미 강남은 유유의 것이었다. 유유는 409년에 북쪽으로 남연국을 무너뜨리고, 417년에 장안까지 원정하여 잠깐 동안 탈환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420년에 드디어 빈민 출신 무장 유유가 (남송, 유송) 황제에 올랐다. 유민들이 주를 이루는 북부 군단 출신, 그리고 빈민 출신 유유는 마침내 황제 - 송무제가 되었다.(420~422) 이제 군인들과 나라는 귀족의 손아귀에 있지 않았다.

 

내적으로 통합과 행정조직을 도모해야 하는데, 기존의 교구체제에서 교구 간의 갈등을 무마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앞서 말했듯 교구(僑舊)체제에서 교가 교민이고, 구는 원래 있던 세력이며, 전자는 백적을, 후자는 황적을 가진다. 면세 혜택을 받는 북래귀족(백적)이 권력을 점차 가져가고, 경제적인 삶에서도 훨씬 잘 살게 되는데, 이러한 격차는 나라의 내분의 씨앗이 되었다. 그래서 이걸 끊어내는 정책을 펴게 되는데, 그게 바로 ‘토단(土斷)정책(혹은 토단법)’

 

* 토단정책 : 교민과 토착민 간에 세와 역을 구분하지 않도록 하는 조치.

 

  가령 백적의 황적화 정책이 이루어진 바 있다. 그 과정에서 백적의 특권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유유는 기존의 사혼이나 왕유 등 명문 귀족들을 축추하고, 한문군인과 관료들을 대거 발탁하였다. 대개 귀족들에 대한 견제로서 이런 조치들이 취해졌던 것 같은데, 즉위 2년만에 죽은 유유의 유서의 내용을 보면 그 추측을 뒷받침해준다.

 

1. 경구(京口)는 군사상의 요지이고 또한 옛 수도인 건강에 가깝다. 고로 황제 내지 근친 이외의 자를 그 장관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
1. 형주(荊州)는 양자강 중류지대의 요충지이다. 황자를 순차적으로 그 장관에 임명하라.


형주는 서부 군단 장관이 일처리를 하는 곳이다. 일단 북부와 서부 모두 황족으로 앉히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유유는 일단 배움이 짧았다. 일단 가족이 믿을 만 하겠거니 싶어 황족들을 군부의 장관으로 앉혔지만, 다른 황족 가족들이라고 배움의 깊이가 다를 바 있겠는가. 장관의 아래에는 교양있는 귀족들이 일을 처리했지만, 그 내부는 눈에 띠게 경직되었다.

 

2) 송 문제 유의륭 : 마침 유유가 죽고 2년 후에 송 문제 유의륭(424~453 재위)가 오르자, 문(文)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 틈을 타서 왕씨의 왕흥, 왕화, 왕담수, 그리고 은경인 등에 의하여 사와 평민 신분 사이를 엄중하게 구별하는 체제가 정비되고 있었다. 남조에도 귀족제가 차근차근 정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송 문제(재위 424~452)가 즉위한 뒤 [낭야(현재 산둥성 남부)를 관향(貫鄕; 시조가 난 땅)으로 한 명문 출신인] 왕홍(王弘, 379~432) 형제가 높은 지위에 올라 조정을 주도하였다. [왕홍의 6촌 동생] 왕구(王球, 393~441)는 그동안 조용히 지내며 그들과 내왕하지 않았는데, 왕흥 역시 평소에 그를 존중하였다. 왕구는 시중, 중서령, 이부상서와 같은 고관을 역임하여싿. 당시 중서사인으로서 요직에 있던 서원(徐爰, 394~475)이 황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황제가 왕구와 은경인(殷景仁, 390~440)에게 그와 가까이 지내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구가 “사(士)와 서(庶)의 구별은 나라의 중요한 법도입니다. 신은 감히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황제가 정중하게 사과하였다. - 이연수, <<남사(南史)>> 권23, <왕구전(王球傳)>(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p.73)


이렇게 사와 서의 분명한 구분은 문벌귀족시대의 개막을 알린다. 사(士) 집안 사람들은 대대로 많은 재산과 큰 권력을 가지고 높은 명망을 누리면서 사족, 세족(世族), 세족(勢族) 등으로 불리는 문벌을 형성되었다. 이들은 가문의 지위가 다르면 혼인은 물론 같은 자리에 앉는 것도 거부하였는데, 황제도 이 경향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다. 사실 사와 서의 구분은 성문화된 것이 아니라, 관습법적인 것이었다. 이 질서 상태를 보면 문인귀족의 전성시대이므로, 세상은 이를 보고 ‘원가의 치’라고 칭찬하였다. 

 

[남조의 사회구조]

  다시 돌아가서, 서진의 멸망 소식을 건강에서 들은 서진 왕실의 후예 사마예라는 황제의 씨앗이 있었음. 결국 사마예가 동진을 세우게 되는데, 건강 - 오늘날의 남경은 결국 동진의 수도가 되었음. 이렇게 성립된 동진 정권 하에 지배계층은 두 계파로 나뉘게 됨.

1. 북에서 내려온 피난귀족 또는 북래귀족(교성)

  1) 조도귀족

  2) 만도귀족

2. 본래부터 강남에 있던 남방토착호족.

 

북래귀족(교성)들은 조도귀족(일찍 온 귀족)과 만도귀족(늦게 온 귀족)으로 나뉘는데, 대개 조도귀족은 세족으로 불리면서 위진시대부터 구품중정제의 청의집단으로서 명문가 출신. 그리고 만도귀족은 대개 한문세력으로서 격이 낮으며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음. 군사력은 만도귀족이 있었으나, 위세는 조도귀족이 있었던 것.

 

피난귀족이라고 하더라도 만도귀족(늦게 온 귀족)보다는 조도귀족(일찍 온 귀족)이 먼저 자리를 잡아 관직을 선점하고 있었음. 북래 귀족은 중앙정부의 요직을 독점하고, 백적이라는 호적을 만듦. 원래 있었던 이들은 황적이라는 호적을 가지고 있었음. [북래귀족들 - 백적, 토착귀족들 - 황적]

조도귀족들은 구품중정제에 따라서 높은 벼슬을 가졌고, 만도귀족도 벼슬을 가지고 있는데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기 마련. 그래서 이후 송-제-양-진 왕조는 만도귀족인 한문무인세력이 세우게 된 것.

 

조도귀족은 시간이 지나면서 군사력은 없고, 상당수는 강북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해서 토지 경영에 신경을 안 쓰는 경향이 있었음. 그러니 높은 관직과 명망만 있었고, 실권은 점차 만도귀족의 한문무인들과 강남 토착귀족(오성 - 오나라 이래 토착귀족)들이 가지게 되었음.
이 때에 교포, 교민 등의 용어가 이미 나오게 되었음. 토착은 이미 토 혹은 구(舊) 세력으로 지칭되며, 넘어온 이들은 교(橋; 교포)라고 함. 그래서 교구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함.


만도귀족과 오성의 실권과, 조도귀족의 명망은 그렇게 갈라져갑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권력과 권위가 일치되기 마련인데, 이 시기는 특수하게 실제 권력과 권위가 분리되어 있었음. 아랫사람들이 실권을 갖게 되었던 것이고, 그 권위가 유지될 수 없으니, 서진의 후경의 난 이후로 몰락의 길에 들어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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