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오호십육국

취미와 문화 2021. 5. 1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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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오호십육국

 

오호 십육국 시기는 다섯 유목민족의 16개 국가가 아님. 십육국이라는 이름은 최홍의 <<십육국춘추>>라는 저서에서 시대 이름을 땄을 뿐.

 

영가의 난을 이끌었던 유연의 아들 유총이 세운 한나라는 전조로 이어짐. 한편 영가의 난에서 유연의 부하장수로 활동했던 석륵은 후조를 세우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다가, 그러다가 유총의 전조는 멸망하게 됨. 한편 후조 시대 황제인 석륵은 '군자영'을 설치하여 한족의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유인책을 썼음.

 

영가의 난(307~312)이 벌어진 화북에 새로운 북방민족, 선비족과 저족 유입.

1) 저족 : 석륵의 후조를 이어 강국인 저족의 전진이 나타남.

2) 선비 모용부 : 한편 선비의 모용부 - 모용황은 연을 세워 전연이 됨.

 

선비 모용부의 '전연'은 저족 부씨의 '전진'과 싸우다가 패망하였고, 전진은 거대한 나라가 됨. 전진은 고구려에 불교를 전파한 나라로 유명함.

 전진의 황제 부견은 내부적으로는 민족의 갈등을 없애 통일제국을 만들고자 했음. 그 갈등을 없애기 위해 정책을 한화정책을 당장 쓰고, 인재를 발탁해서 능력에 따라서 관직을 주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왕맹이라는 사람. 

 "하지만 사람을 너무 믿어서 탈이었습니다. 실패의 원인이 그것이었습니다. 전연의 모용평이라는 사람과 전쟁의 공으로 불화에 빠진 모용수 부자를 받아들인 겁니다. 전연의 모용수 부자가 정권때문에 갈등이 생겨서 전진에 받아들인 건데. 근데 왕맹이 반대 한 겁니다. ‘죽이십시오. 이 사람들 언제 배반할 지 모르는 겁니다.’ 근데 참모 왕맹이 이렇게 설득해도, 부견이 받아들였습니다. 이 모용수 부자는 훗날 배반합니다. 게다가 이 부자에게 중책을 맡긴 것도 실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전연의 모용평과 전공문제로 불화에 빠진 모용수 부자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이 부견의 정책 실패의 요인이었습니다."(박한제 교수님 특강)

 

  전진의 부견은 한인의 명신 왕맹의 보좌를 받아 국력을 떨쳤고, 연의 내분에 편승하여 이를 멸하고 선비족의 양을 병합한 후 대국을 정복하여 화북의 대부분을 통일하게 되자 서약 62개국이 전진에 와서 조공을 바칠 정도가 되었음. 그런데 전진왕 부견은 강남의 동진까지 병합하여, 남북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국력을 기울여 남방 정벌에 나갔으나 383년 비수의 싸움에서 동진군에게 참패.(동양사개론)

 

* 부견은 사망 전에 서역에서 '쿠마라지바(구마라습)'라는 승려를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미처 그 때까지 버티지를 못했음.

 

그 뒤의 유목민족 국가들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1) 전연을 계승한 후연, 그 이후 북연 : 부견의 전진이 패망한 후에 전진을 계승한 후연이 나옵니다. 후연은 선비 모용씨가 다시 세운 것입니다. 후연은 고구려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죠. 나중에 후연은 내부 반란이 일어나 ‘북연’이 일어납니다.

2) 선비 탁발부의 대나라 : 선비 탁발부의 나라 이름은 대(代, 315~376)라고 하였습니다.

3) 부견을 죽인 요장, 그 아들 요흥의 후진 : 5세기 초에 10여년 간 선비 걸복씨의 서진과 쿠마라지바를 모시고 있던 저족의 후량을 병합하여 비대해지고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혼란기.

 

크게 보아 이 세 나라의 대립. 결국 선비 탁발부의 대나라가 승리하면서, 이들은 ‘북위’로 나라 명칭을 바꾸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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