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서진의 멸망 - 팔왕의 난, 영가의 난

취미와 문화 2021. 5. 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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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서진의 멸망 - 팔왕의 난, 영가의 난


1. 팔왕의 난(300~306)

 

  서진시기 중국의 호족이라는 이들이 점차 문벌귀족으로 바뀌어갔음. 그런 한편 서진은 상비군을 축소하고, 소속된 군대를 해산하여, 대신 왕자들에게 군대를 나누어주며 지방의 요지에 분봉하는 봉건제를 실시. 사마씨 일족을 제왕으로 봉해 정권을 지탱하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고, 제왕들에게 봉토 내 호구 및 일정 수의 군대까지 받았던 것. 이것이 패착. 그게 문제가 되어 8왕의 난을 가져오게 됨. 팔왕의 난 발생 자체가 멸망까지 이끄는 결정타라기보단, 5호(다섯 오랑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문제.

  팔왕의 난은 서진 왕자 여덟 명이 참여했던 반란. 무제 말년 이래 성장해온 양준 등 외척 양씨 세력이 황후 가씨와 대립했고, 가씨가 여남왕 양(亮)과 초왕 위(瑋)의 지원을 받고 승리한 것. 그러나 기원후 300년에 서진의 종실인 조왕 윤이 서진의 두 번째 황제 혜제의 황후 가씨를 살해한 후에 서진은 결정적으로 혼란에 빠짐. 그렇게 서진은 혼란 속에서 북방 유목민족들을 끌어들인 제왕들의 혈투 속에서 멸망.

  서진이 멸망하면서 사마씨 - 사마예가 동남쪽으로 내려가 동진을 세우게 된 것이죠. 혜제는 서진 무제의 아들. 대체로 혜자가 들어가면 나약한 왕을 상징함.

 

돈으로 쓰는 전(錢)의 형태는 천지의 모습을 본떠서 안이 땅처럼 네모나고 밖은 하늘같이 둥글며, 돈의 가치는 산처럼 쌓이고 냇물같이 흐른다. 돈의 흐름은 때가 있고 그 축적에는 규칙이 있으므로, 시장에서 쓰기 편할 뿐더러 사라지거나 변할 염려도 없다. 바뀌기 어려움은 마치 끈질긴 생명 같고 없어지지 않음은 마치 도(道)와 같아서, 오래도록 사용되며 세상에서 신령스러운 보물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돈을 자신의 형님처럼 친숙히 여기고, 공방(孔方)이란 별칭도 지어주었다. 돈을 잃으면 가난하고 미약해지며, 돈을 얻으면 부유하고 번창하게 된다. 날개 없이 날아다니고 발 없이 뛰어다니면서, 근엄한 얼굴을 펴게 하고 꽉 다문 입도 열게 한다. 돈이 많은 자는 앞서고, 돈이 적은 자는 뒤쳐진다. 앞선 자는 군주나 윗사람이 되고, 뒤쳐진 자는 신하나 노복이 된다. 군주와 윗사람은 풍성하고 여유로우며, 신하와 노복은 궁핍하고 부족하다. ... 돈은 하늘과 같아 그 도움을 받으면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으니, 어찌 반드시 책을 읽어야만 부귀해지겠는가! ... 이로써 다져보면, 돈은 신령스러운 물건이라고 하겠다. 돈만 있으면 덕성이 없어도 존귀해지고 세력 없이도 권세를 부릴 수 있어, 궁문을 밀치고 궁궐에도 들어간다. 돈은 위태로운 일을 안전하게 바꾸고 죽을 일도 살리며, 귀한 이를 천하게 만들고 살릴 이도 죽일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분쟁에서 돈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은둔자는 돈 아니면 발탁될 수가 없으며, 원수진 일을 돈 아니면 풀지 못하고, 명성도 돈 아니면 얻을 수 없다. ... 요즘 사람들은 대개 돈만을 생각한다. 그러므로 재물 없이는 병사들이 모이지 않고, 재물로 상을 주지 못하면 군대가 움직이지 않는다. 벼슬살이 할 때 의지할 만한 이가 없다면 차라리 농사 짓는 것이 낫지만, 비록 그런 원조자가 있더라도 돈이 없다면 날개 없이 날거나 발 없이 가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도다! - 방현령 등, <<진서(晉書)>> 권 94, <노포전>;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편.

 

  위는 당시 노포가 혜제시대의 세태를 비판하며 쓴 <전신론(錢神論)>의 일부. 불안한 현실 속에서 재물의 효용과 집착은 극에 달했고, 명성과 명예에만 기댈 수 없었음. 종족의 결집이나 생활공동체 유지를 위해서 돈은 필요했지만, 명성 역시 돈에 기반한 것. 그런데 우리는 노포가 쓴 이 <전신론>에서 화폐 경제의 발전상을 확인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노포 역시 ‘당연히 재물만으로는 귀천을 나눌 수 없다는 사회적 통념을 가졌다는 것’ - 즉, 명예로운 귀족이 재물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가치관이 담겨있는 것. 

  어쨌건 사회 불안은 가중되고, 황제는 사회 분위기가 어떤지도 모르며,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며 빈부격차는 심화되는 시기가 서진 말기. 전한 시기부터 중원 내부에서는 북방 이민족 출신들이 점차 유입되어 들어온 바 있음. 한랭기인 후한 멸망기는 유목민족들의 유입을 가속화하였던 것. 돈을 모은 귀족들 간에 이민족들을 노예로 사고파는 풍조가 퍼져있었으며, 내부의 평화에 안주한 나머지 상비병을 축소시켜버렸던 것임. 위진시기 청담사상은 전혀 실용적이지 않았으며, 외척인 가씨와 가황후의 폭정은 극에 달함. 

  봉토의 내우외환에 조왕(趙王) 윤(倫)이 폭정을 일삼는 가황후를 죽이고 일시 혜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았던 것이 팔왕의 난의 시작. 조왕 윤의 행동은 이것은 다른 봉토의 왕의 야욕에 불을 붙였고, 반란이 본격화 된 것임. 그리고 유목민족들은 이 틈을 활용하여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려 기회를 엿보게 됨.

 

* 참고 : 강판권 교수님 동양중세사 강의,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편.

 


2. 영가의 난(311)

 

  후한이 멸망하는 시기는 지구 전체가 추웠던 시기임. 그 속에서 흉노는 분열하고 있었는데, 친한파(남흉노)와 적한파(북흉노)의 남북 분열 대립이 심화되었던 것. 그래서 이 서쪽으로 나간 남흉노는 후한과 연합하여 적한파 북흉노를 토벌. 그리하여 북흉노는 AD89년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서진하여 흑해 연안에 도달. 훈족의 기원이 이 때인 것인지, 잘 모르겠음. 남북의 흉노 분열로 북흉노는 게르만족 이동을 일으키고, 남쪽으로 내려간 남흉노는 낙양을 약탈하고 오호십육국 시대로 들어서서 북조 왕조 시대에 들어서게 됨.

  사실 '5호의 중원진입'이라고 하는 것이 중국에 어떤 의미를 가져왔는지부터 따져본다면, 흉노가 내려와서 후한 황제에 귀속되어 잘 살았던 건 아님. 남흉노에게 한조는 변경 방위를 맡겨왔던 것. 그러니 후한에 복속한 흉노인 사이에도 분쟁이 일어납니다. 군대 빠지려고. 변경 방위에서 빠지려 하는 가운데, 선우는 그 통제력을 상실하고, 선우가 없는 시대까지 열리게 됨. 결국 유목민은 한인에 대하여 노예 노릇을 해 왔던 것.

  한제국은 정복을 통해 저, 강 등 서융을 내지로 이동시켰는데, 특히 강족이 흉노와 연맹하자 한제국은 주변 민족을 정복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했고, 그들을 관중지역으로 이들을 옮겼음. 이런 상태 계속되고, 서진 시대에 들어서서 융적의 인구수는 수도 관중 인구의 반을 차지하게 됨. 그리하여 강통에 의해 사융론 - 융적을 옮기라는 주장이 나왔던 것임. 그리하여 호한간의 갈등이 날로 심화되는 것.

  당시 서진에서는 팔왕의 난이라는 왕자의 난이 일어난 상태로, 혼란을 틈타 용병이었던 흉노를 위시한 5호족들이 용병이 되었는데, 우리는 형제였는데 엉뚱한 싸움에 끼어 희생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됨. 그래서 나라를 세워야겠다 싶어 중국판 노예해방선언인 ‘영가의 난’이 일어남. 팔왕의 난 이후 유력한 제왕인 - 동해왕 월에 의해 옹립된 회제는 영원히 좋은 시대를 바라며 ‘영가(永嘉)’로 연호를 바꾸고 국정쇄신을 꾀했지만, 이미 팔왕의 난이 끝나기 전부터 흉노는 중국 내부에서부터 나라를 뒤엎으려 하고 있었음.

 

[서진 회제 영가 5년(311) 6월, 남흉노 선우의 후손들이 세운 한(漢)의] 유요(劉曜), 왕미(王彌), 석륵(石勒)이 함께 서진의 수도 낙양(현재 허난성 북부) 부근을 노략질하였는데, 서진의 군대는 그들에게 패하여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경인일(4일)에 사공(司空) 순번(筍藩) 등 명문 출신 고위 관료들이 낙양의 동남쪽으로 달아나고, 태자를 돌보아야 할 관료도 밤중에 낙양성의 북문을 열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정유일(11일)에 유요와 왕미가 수도로 들어왔다. 서진의 황제는 낙양의 궁성의 정원 문을 열고 낙양의 북쪽을 거쳐 장안(현재의 시안)으로 가려 하였으나 유요 등에게 사로잡혔다. 유요 등은 낙양의 궁전과 종묘를 불태우고, 황제의 여자들을 욕보였다. ... 이때 관료, 사족(士族), 서민들로 죽은 이가 3만 명 이상이었다. 황제는 한의 수도 평양(平陽; 현재 산시성 남부)으로 끌려갔고, 한의 군주 유총(劉聰)은 황제를 회계공(會稽公)으로 강등시켰다. ... [서진 민제(재위 313~316) 건흥 4년 316년에 유요가 서진의 새 수도 장안을 포위한 뒤] 10월에 수도에 기근이 심하여 좁쌀 한 말(당시 한 말은 2리터)에 황금 두 냥(당시 한 냥은 13.8그람)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서진의 황제를 모시던 신하가 수도의 곳간에 있던 누룩 수십 덩어리를 부수어 죽을 끓여 바쳤는데, 이때는 그마저도 떨어지고 말았다. 황제가 울면서 그 신하에게 “지금 이처럼 힘든데도 밖에서 도와줄 이가 없으니, 이 나라와 함께 죽는 것이 짐이 할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포악하고 어지러워진 장수와 병사들을 생각하면, 죽기보다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성이 함락되기 전에 항복하여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괴로움이라도 면하게 하고 싶다. 그래, 적에게 항복한다는 글을 보내도록 하라. 짐의 뜻은 정해졌다.”라고 말하였다. - 방현령, <<진서>> 권5, <효회제기(孝懷帝紀)>, <효민제기(孝愍帝紀)>

 

  서기 304년 남흉노의 유연이 한(漢, 훗날 전조)을 세움. 유연의 한 건국으로부터 439년에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기까지 135년간을 5호 16국 시대라 할 만큼, 유씨의 한-전조는 중요함. 유연은 자신이 유씨 - 한나라의 황실을 계승한다며 정당성을 확보하여 한(훗날 전조)를 세운 것. 유연이라는 부장이 좌국성(산서성)에 자립해 한을 세웠는데, 유연은 남흉노 선우의 자손으로서 유목민을 규합하려 했으며, 자신이 유씨임을 내세워 한나라 황실을 계승하는 정통성도 얻었던 것. 사실 이런 빌미를 제공했던 것은 서진에서 시작된 8왕의 난이었고, 그것을 기회로 잘 살려 흉노 국가 부흥에 성공한 것.

  유연이 유목민족이면서도 국호를 한으로 정한 것은 그의 영토 안에 있는 흉노 지배계층과 한화된 흉노인 그리고 한족을 규합하여 안정된 통일제국을 수립하려는 야심이 있었기 때문. 유연의 야심은 그 아들 유총에게 이어져 화북 지역의 대부분을 세력 하에 두었음.

  서진 회제의 연호인 영가 5년 311년 4월, 한(훗날 전조) 유총은 아들들과 갈족의 석륵 등을 장군으로 삼아 낙양성을 공격하여 6월에 점령하고, 서진의 황제 회제와 황태후 양씨를 생포한 것. 낙양의 궁성은 불타고 왕공(王公; 신분이 높은 왕이나 공) 이하 사졸까지 10여 만을 살해했고, 재상 왕연과 서진의 종실 48왕이 모두 석륵의 포로가 되었음. 유총은 수도 낙양을 함락. "회제는 유총이 이끄는 한(전조)의 수도인 평양의 광극전전(光極前殿)에서 열린 연회에서 푸른 옷(노예 옷)을 입고 술잔을 나르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예가 하는 일이었죠. 그러다가 곧 살해되었습니다. 그렇게 307~312년의 영가의 난이 마무리됩니다. 중국 황제가 노예가 된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습니다. 회제의 아들 민제는 장안으로 달아났다가 결국 항복하였고, 유총에게 노예취급을 받다 18살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황태후 양헌용은 유요라는 사람의 부인이 되고 유목왕조의 황후가 됩니다. 호한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겠죠. 이렇게 서진이 멸망하는데, 316년의 일입니다."(박한제)

 

* 참고 : 박한제 교수님 유목민족사 특강,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편, 사료로 읽는 동아시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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