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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위진남북조의 사회 - 부농의 호족화, 호족, 외척과 환관의 결탁, 청의파

취미와 문화 2021. 4. 29.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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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위진남북조의 사회 

- 부농의 호족화, 호족, 외척과 환관의 결탁, 청의파

 

  하북성 무안현 오급진 북쪽에는오급고성(午汲古城)’이라는 곳을 보면 10리제 형태로 구성이 되어 있음. 당시 후한 시기부터 유교적 향촌질서인 군현-향삼로-부로--리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음. 유교를 밀어주며 전한대 50명 정원의 태학을 설치한 한무제 이래, 태학 학생의 수는 늘어났고, 후한대에는 1000명 정원으로 늘어났음. 한 수도 낙양 뿐만이 아니라 지방까지 지식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고, 후한 말기에 정현(鄭玄) 같은 대학자는 사실 차지농 출신이었으니, 지식인 계층이 그리 상층부에 한정되어 있던 것 같지는 않음.

 

후한 중엽 이후가 되자, 학문을 이루고 돌아온 자는 각각 고향에서 문도를 가르쳤다. 한 사람의 숙유(宿儒; 학식과 명망이 높은 선비)가 있는 곳에는 그 문하에 등록하는 학생이 천명 백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학문은 천하에 널리 퍼졌다. - 청나라 시기 학자 조익(趙翼)

 

  부로를 중심으로 하는 향-리 공동체가, 유교적 질서 - , 효제의 원리(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이나 연장자를 공경하는 원리)가 퍼져나갔음. 그러한 기반 아래 효렴이라는 유교적 덕목을 중심으로 지방장관들이 중앙에 인재를 등용하는 향거리선제가 실시되어왔음.

  그러나 이 유교적 질서는 점차 깨지고 마는데, 바로 부농과 빈농이 분화되고, 부농이 호족화되기 시작하면서임. 한대의 호족은 개간, 고리대, 대농장 경영 등으로 세력을 키우고, 자신들의 수족으로 부릴 수 있는 빈객들을 모았음

  한편 후한의 건국공신 집안은 외척세력으로 대두하여, ------경씨는 후한 시기 대표적인 정권 농단의 주체로 등장. 가령 다음은 광무제의 황후 음씨에 대한 사천성 광한군 장관 채무의 상주문.

 

최근 귀척숙방의 집(외척 음씨)은 종종 은세(恩勢)를 이용하여 법률을 어기고 사람을 죽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해를 입혀도 처벌되지 않습니다. ... - 채무(蔡茂)

 

  제3대 황제 장제(章帝)의 사후에 열살 짜리 화제(和帝, 88~105 재위)가 제위에 앉자, 장제 황후 두씨가 황태후가 되어 두씨 가문이 행정부를 전부 좌지우지 했음. 그리하여 황제는 더 가까운 곳에 대장군부 중심의 내조를 구성하고, 39경 중심의 외조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결국 내조가 외조와의 대결에서 승리했으나, 내조의 환관들이 지나치게 강성했던 것이 또 문제였음. 지방의 권력자 호족들이 외척이나 환관과 결탁을 하여 성장하였고, 그들에 반대하여 후한대 이래 폭넓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청의파가 형성되어갔음.

  청의파 지식인들에게는 환관은 남자다움을 포기한 이들이었고, 그들이 횡포를 부리는 것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음. 가령 태학에 재학중이던 곽태(郭泰)와 가표(賈彪)천하의 본보기는 이원례(李元禮=이응), 협박을 무서워하지 않는(陳仲擧=진번)...”라는 구호로 인물비평 여론을 조성했다.

 

처음 [후한의] 환제(132~168)가 여오후(蠡五侯)였을 때 (, 황제가 되기 전에) 감릉[甘陵; 허난성 북동부 일대? 낙양의 동쪽으로, 요하 하류의 초입에 있었던 걸로 추정)]의 주복(周福)에게 학문을 배웠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환제는 주복을 발탁하여, 외조가 실권을 잃어갈 당시 실질적으로 대신에게 비길 만한 권한을 가졌던 황제의 비서직에 해당하는 상서로 임명하였다. 그 무렵 같은 감릉군 출신으로서 수도권 장관인 방식(房植)은 재조(在朝)의 명사로서 평판이 자자했다. 이에 당시 향인(감릉지방 사람들)천하의 규구(規矩; 모범, 그림쇠)는 방백무(房伯武=방식), 스승이라고 해서 지위를 얻은 자는 주중도(周仲道=주복)”라는 노래를 퍼뜨렸다. 주가와 방가의 양쪽 빈객은 서로 상배당을 깎아내리고 각각 도당을 지어 점차 그 골을 깊게 했다. 이로 인하여 감릉지방은 남부와 북부로 분열되었다. 당인(黨人)의 의(; 의논)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 <<후한서>> <당고열전> .
환제와 영제의 재위 시기 동안 황제는 게으르고 정치는 혼란스러웠으며, 제국의 운명은 환관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학자들은 이러한 사람들과 같이 있다는 것을 부끄러이 여겼다. 필부들도 울분을 토로하였고, 처사들도 그들을 비판하였다. ... 가평 5년 영창 태수인 조란(曹鸞)이 상서를 올려 당인(黨人)을 변호했는데, 그 말이 절실했다. 그러나 환관의 뜻에 따라 황제는 사예(司隸)와 익주감거(益州監車)로 하여금 조란을 잡아들여 매리옥(梅里獄)에 보내 고문해 죽였다. , 주군에 조칙을 내려 당인들의 문생고리와 부모형제를 고문하도록 하고, 관위에 있는 자는 면관시키고 당고(黨錮)하도록 하여, 이를 오속(五屬)에까지 적용하도록 하게 했다. - <<후한서>> <당고열전>

 

  이 사료는 화북 중심으로 유교 이념에 입각한 향론을 등에 업은 청의파 지식인과, 외척 혹은 환관과 지방호족세력이 결합한 측의 대립을 보여줌. 방백무는 천하의 규구로서, 청의파의 대표주자. 한편 주중도는 환제의 스승 출신으로서 권력에 빌붙어 권력을 얻었으며, 외척 및 환관과 연결하여 향촌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인물. 이들 간의 다툼은 2차례의 당고사건으로 청의파의 패배로 마무리를 짓게 되는데, 이것 또한 후한이 멸망하게 된 배경.

 

* 참고 :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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