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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23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후한 제국의 붕괴 배경 - 당고의 금, 호족 성장, 황건적의 난

후한제국의 붕괴의 배경[중국중세사 정리노트] 후한 제국의 붕괴 배경 - 당고의 금, 호족 성장, 황건적의 난 1. 당쟁(청류와 탁류 논쟁)의 정치 개선 미비 정치적으로는 당파싸움이 일어났는데, 그 싸움 중심에는 환관이 있었고, 이들에게 맞서 싸운 이들이 청류. 청류의 기반은 태학. 청류가 결국 졌는데, 그것을 바로 ‘당고의 금’이라고 하는 것임. 태학은 환관들에 의해 탁해진 정치를 비판하는 것을 '청의'라고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을 청류라고 함. 한편 환관과 그 추종자는 탁류라고 함. 태학생 중에는 곽태와 가표가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자 관료와 명사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는데, 이들 관료나 명사들은 강직한 사예교위 이응과, 태부인 진번을 받들고 적극적으로 정치세력을 펴나가면서 ..

중국사 2021.04.29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위진남북조의 사회 - 부농의 호족화, 호족, 외척과 환관의 결탁, 청의파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위진남북조의 사회 - 부농의 호족화, 호족, 외척과 환관의 결탁, 청의파 하북성 무안현 오급진 북쪽에는‘오급고성(午汲古城)’이라는 곳을 보면 10리제 형태로 구성이 되어 있음. 당시 후한 시기부터 유교적 향촌질서인 군현-향삼로-부로-향-리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음. 유교를 밀어주며 전한대 50명 정원의 태학을 설치한 한무제 이래, 태학 학생의 수는 늘어났고, 후한대에는 1000명 정원으로 늘어났음. 한 수도 낙양 뿐만이 아니라 지방까지 지식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고, 후한 말기에 정현(鄭玄) 같은 대학자는 사실 차지농 출신이었으니, 지식인 계층이 그리 상층부에 한정되어 있던 것 같지는 않음. 후한 중엽 이후가 되자, 학문을 이루고 돌아온 자는 각각 고향에서 문도를 가르쳤..

중국사 2021.04.29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조위와 서진 - 병호제, 둔전제, 중랑장

[중국중세사 정리노트] 조위와 서진 - 병호제, 둔전제, 중랑장 1. 위-촉-오 중에 무엇을 정통으로 볼 것인가. 1) 진수(233~297)의 : 위나라에만 제왕의 본기를 두어 정통왕조로 서술.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진수가 아버지 때에도 촉 출신이었지만, 제갈량에게 미움을 받아 추방을 당했고, 서진으로 귀양했기 때문일 수도 있음. 서진이 위나라를 계승했으니, 정통을 위에 둔 것이지요. 실제로 위나라가 강성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촉과 오의 왕은 신하로 취급하였는데, 세가가 아니라 열전으로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사마천의 이후로 세가는 없기 때문. 2) 북송 시기 사마광 : 무통론 - 정통이 없다고 주장. 중립인 것처럼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 사마광의 태도에 대해 주희가 비판함. 왜냐하면 애초에..

중국사 2021.04.29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후한의 광무제 시기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후한의 광무제 시기 1. 후한이 세워지기 전까지 1) 적미의 난 : “적미의 난은 산동지방의 낭사에서 번숭을 우두머리로 한 농민반란이다. 이들은 눈썹을 붉게 칠하였기 때문에 적미군이라 하였다. 적색은 전한왕조를 상징하므로 적미군의 목표는 왕망을 타도하고 한을 부흥하는 반왕부한(反王復漢)에 두고 있다.”(동양사개론) 신나라 황제 왕망 측은 번숭 집단을 공격하였으나, 쉽게 진압할 수 없었음. 왕망의 파견군은 몇 차례나 크게 패하였고, 성창전투에서 적미군이 승리하였을 적에는 적미군이 10만에 달했다고 함. 이 즈음에 남방의 남양군에서 북상한 남양유씨 세력이 강성하고 있었는데, 그 맹주 유현(劉玄)이 제위에 올라 그 수도를 낙양으로 하니 그가 바로 갱시제(更始帝)임. 반왕부한을 꿈꾸던 적..

중국사 2021.04.27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무제 시기 정리 ~ 전한말의 정치 개관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무제 시기 정리 ~ 전한말의 정치 개관 1. 한무제 시기 내조와 외정의 대립 - 염철논쟁 한대에 들어와서 황제의 비서라고 볼 수 있는 상서와 중서(궁 안에 있으니 ‘내조’)가 중요해지고, 삼공(궁 밖의 ‘외정’)은 그 지위가 하락해가는 과정이 곧 '내조와 외정의 대립'. “한나라 초기의 정치는 3공(승상, 태위, 어사대부)에 의해 운영되었다. 승상은 백관을 총괄하는 최고직이기 때문에 승상부는 황관 밖에 있던 최고행정기관이었다. 그러나 전제군주인 무제는 국정을 중심으로 궁정 밖으로부터 황제가 있는 궁안으로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내정(궁정안)에서 황제 측근에 있는 조신(상서, 중서)과 좌우에서 시중을 드는 시중 및 급사중과 같이 긴밀히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내정에서 결정된 국가..

중국사 2021.04.27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 무제 시기 (3) - 대외관계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 무제 시기 (3) - 대외관계 지금까지 한무제 시기의 내부 경제정책을 보았음. 이번에는 외부에서 어떻게 오랑캐들을 몰아내느라 돈을 쓰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음. 5. 한무제의 대외관계: "한무제는 사실 경제의 아들이지만, 황제가 될 유력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꼬이고 꼬여서 그렇게 된 것인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오른 황제는 권력을 강화하려 하고, 그 방식이 외부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정복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고, 베트남의 남월이라는 토착정권을 무너뜨리게 됩니다."(박민수 교수님) 1) 장건의 서역 사행과 실크로드(하서주랑) 장건(張騫)의 서역(西域) 사행(使行)은 흉노라는 적을 공격할 때 혼자하기는 힘드니까 서역의 월지라는 세력과..

중국사 2021.04.27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 무제 시기 (2) - 조세제도, 유학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 무제 시기(2) - 조세제도, 유학 지난 시간까지 상홍양이라는 경제관리가 한무제 시기에 확장정책-경제정책의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였던 것을 보았음. 이어서 경제정책을 더 살펴보고, 내정에 관련된 무제시기 유학을 살펴보도록 하겠음. 1. 한무제의 조세제도 1) 국가 재정과 황실 재정의 분리 : ‘황실재정이 분리되었다’는 것은 황제 전제지배에 필요한 수단을 마련하는 데에 따로 돈이 들였다는 것. “국가재정이란 황제가 인민을 지배하고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공공재정을 말한다. 이에 대해 황실재정은 황제 개인의 사생활을 위한 것으로 사적재정(私的財政)의 성격을 갖고 있다. 국가재정은 중앙의 9경 가운데 대사농에서 이를 관할하였고, 황실재정은 9경의 소부(少府)에서 담당하였..

중국사 2021.04.27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무제 시기(1) 건원, 추은령, 주금률, 대사농 상홍양

한무제 유철 시기(기원전 141~87) * 경제(景帝) 사후 그 아홉째 아들 황태자 철(徹)이 즉위하게 됨. 그의 시호는 무제인데, 그가 강력한 무력을 뽐냈기 때문이라고 함. 다만 그는 전장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음. 1. 건원 연호 사용 2. 봉건제후 견제 - 추은령과 주금률 : 경제 시기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했는데, 무제가 다시 내부정비에 들어감. 그 일환이 바로 ‘추은령(推恩令)’과 ‘주금률(酎金律 금을 바치다)’이라는 것. ‘추은’에서 ‘추’는 ‘밀다’라는 뜻. 그렇다면 추은이란 은혜를 퍼트린다/밀어준다는 것인데, 사실 제후왕에 대한 억제책이라고 해 놓고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 본래 제후왕이 죽으면 그 모든 권리는 적장자에게 돌아감. 그런데 추은령 아래에서는 봉건제에서 동생들이 소외되지 않고, 적..

중국사 2021.04.22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문경지치 - 문제, 경제, 오초칠국(오초7국)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문경지치 - 문제, 경제, 오초칠국(오초7국) 1. 고조의 아내, 여후 통치 시기 고조의 황후 여후가 실권을 장악하여 여씨일족의 전횡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사실은 이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 중 하나가, 이를 통해 상앙의 법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조의 황후 여후가 실권을 장악하여 여씨 일족의 전횡이 시작되었다. 이리하여 한 왕조는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여후가 사망(기원전 180년)하자 한의 고관들과 장군들이 모의하여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새로 문제(기원전 180~157)를 옹립하였다." 밭을 폭 1보(步), 길이 240보로 나누어 1무(畝)로 삼는다. 길이 240보가 되는 지점에 진(畛)이라고 부르는 둑을 만들어 길이의 경계로 삼는데, 그렇게 되면 1무에는 앞뒤로 2..

중국사 2021.04.21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나라 고조 유방의 치세

[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나라 고조 유방의 치세 1. 진나라의 붕괴 - 법가주의의 한계 법가주의의 한계는 진승 오광의 난으로 나타나게 되었음. 이것 역시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이라는 의의를 둘 수 있음. 난의 배경은 진시황의 어리석은 막내아들 호해의 황위 계승. 이미 진시황제는 기원전 210년에 동방순행 중 하북성 사구에서 병사하였고, 그는 임종 때 황위를 똑똑한 장남 부소에게 넘길 것을 바랐으나, 환관 조고와 재상 이사가 공모하여 유언을 조작하고, 어리석은 호해를 황제로 추대한 것. “진승은 하남성의 가난한 농민출신이다. 그는 북방 경비를 위해 군사 900명을 인솔하고 북으로 가는 도중 큰 비를 만나 도착날짜까지 목적지에 갈 수 없게 되었다. 진나라의 국법에는 도착 기한을 어기면 사형에 처하는 악법이 있..

중국사 202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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