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 무제 시기 (3) - 대외관계
지금까지 한무제 시기의 내부 경제정책을 보았음. 이번에는 외부에서 어떻게 오랑캐들을 몰아내느라 돈을 쓰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음.
5. 한무제의 대외관계: "한무제는 사실 경제의 아들이지만, 황제가 될 유력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꼬이고 꼬여서 그렇게 된 것인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오른 황제는 권력을 강화하려 하고, 그 방식이 외부로 나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정복하는 과정에서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고, 베트남의 남월이라는 토착정권을 무너뜨리게 됩니다."(박민수 교수님)
1) 장건의 서역 사행과 실크로드(하서주랑)
장건(張騫)의 서역(西域) 사행(使行)은 흉노라는 적을 공격할 때 혼자하기는 힘드니까 서역의 월지라는 세력과 연합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던 것. 원래 월지는 하서회랑에 있었음. 하서회랑의 월지가 흉노를 뒤에서 공격할 수 있기에 한과 연대한다면 흉노를 공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물론 월지도 흉노에 뼛속깊은 한이 있었음. 그런데 이미 월지는 아주 멀리 떠난 채 대월지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고, 장건이 오랜 시간에 걸려 월지를 오는 동안 대월지는 정주민족이 되어 옛 한을 잊어버렸음.
어쨌건 장건이 다녔던 온갖 오아시스 도시들을 연결한 것이 실크로드. 장건이 서역 사행의 결과 여러 값진 정보들을 가지고 오게 되면서, 비단 무역길에 상인들이 뛰어들게 됨. 물론 이 비단길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은 당 제국 시기입니다. 일단 장건이 월지의 연합군을 데려오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흉노에게 선전포고하고 전쟁에 돌입함.
장건은 한 번 더 기원전 119년에 2차 서역행을 추진. 이번에는 오손(烏孫)이라는 이들과 연합하고자 함. 이번에도 역시 오손과 연합 협상에 실패했지만, 오손은 대신 장안으로 와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음. 각종 오아시스 도시들과 조공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던 2차 서역행.
흉노와의 전쟁 와중에 위청, 곽거병 등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위청과 곽거병은 한무제와 인척관계에 있는 이들로 유명한데, 이 유명 장수들의 활약으로 서역지역을 정벌합니다. 하서사군이라는 지역에 군대를 파견해서 동서교역로를 확보. 기원전 115년에 하서를 직할령으로 만들어, 하서사군을 장악. 이 서쪽의 사막 지역에는 사실 군대가 주둔하는 것이 어려웠으나, 하서 지역에 4개 군을 설치한 것이 바로 ‘하서사군(河西四郡)’. 하서사군은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 지역을 일컬음.
기원전 60년에는 흉노가 이미 일축왕이라는 이들을 두어 하서회랑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음. 그런데 이렇게 한나라가 직할하게 되면서 실크로드 요충지를 두고 한과 흉노가 서로 대립하게 됨. 또 한편 한무제는 서쪽에 대완이라는 곳에 뛰어난 말인 천마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이광리를 보내 대완(大宛)을 정벌시킴. 그래서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 서쪽 끝에서 나의 은덕을 본받고 싶어 사막을 건너 천마가 온다고 하여 이런 노래를 불렀다고 함.
흉노와의 전쟁은 장성을 넘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데에 주목해야 함. 장성은 물리적이자 심리적 장벽이기 때문. 게다가 흉노도 그에 대해서 반응하는데, 장성 안쪽에서도 전쟁이 일어난 것. 티벳고원 서북부에 장성을 따라 돈황, 주천, 장액, 무위 지역의 하서사군이 있는데, 이 하서사군이 티벳고원 북부 산맥과 만리장성으로 양면이 복도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하여 ‘하서주랑[河西柱廊;하서회랑(河西回廊)]’이라고 함. ‘주’는 걷는다는 것이고, ‘랑’은 복도를 뜻함. 남쪽으로는 티베트 고원과 티베트족이 있고, 북쪽으로는 흉노가 둘러싸고 있는 매우 위험하나 서역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요충지인 것(박민수 교수님).
“한 무제의 서역 경영이 동서교섭사에 있어서 특기할 것은 하서사군(기원전 121~119)와 이광리를 파견하여 파미르고원을 넘어 투르키스탄 지방의 대완을 정벌하고(기원전 104), 흉노를 몰아내 서역로를 제압한 일이다. 하서사군의 설치는 전한의 제1차 서방진출이라고 볼 수 있고, 이에 따라 한은 비로소 실크로드의 길목을 확보하게 되었다. ... 그 결과 중앙아시아의 심장부인 타림분지 부근의 오아시스 농경지역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이 한의 지배 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오아시스 지역의 도시국가들은 동방과 서방의 교역로 상에 위치하면서 중요한 역참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제는 돈황에 주천도위를 도고 둔전을 설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자교위를 두어 외국으로 나가는 사자에게 식량과 말먹이를 공급하도록 하였다.”(동양사개론)
* 한무제 이후 실크로드 : 반초가 기원후 91년에 서역정복으로 다시 서역과의 왕래가 활발해짐. “반초는 타림분지를 평정하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쳐들어온 월지를 제압하였다. 반초는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을 중개로 하여 대진국(大秦國; 로마)과 직접 교역을 하기 위해 부하인 감영을 기원후 97년에 서방으로 파견하였다. 감영은 서쪽으로 조지(條支; 시리아)에 도착하여 지중해를 거쳐 로마에 가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감영이 도달한 안식, 조지, 서해지방의 사정이 처음으로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2) 무제의 대외원정
“무제는 위청과 이광리 등을 파견하여 흉노정벌을 시작하고(기원전 129) 이어 수십만에 달하는 대규모의 원정대를 연속으로 보내어 대대적인 정벌을 단행하였다. ... 흉노정벌 중 규모가 큰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제1차 시기는 기원전 129년에 이광리가 3만 명을 거느리고 원정하였다. 기원전 127년 장군 위청의 오르도스 지방 정복 후 삭방(朔方), 5원(原), 2군(郡) 설치 그리고 기원전 124년에 위청이 기병 3만 명을 이끌고 흉노를 정벌한 일, 기원전 121년에 장군 곽거병이 두 차례 흉노를 정벌하여 무위, 주천의 2군 설치 그후 기원전 119년에 위청, 곽거병을 다시 파견하여 흉노를 크게 유린한 것 등이다. 그 후 기원전 99년에 이능이 5천명의 기병을 이끌고 정벌에 나섰다.” 사마천은 이능이 실패한 것을 옹호하는 바람에 궁형을 당함.
그 이듬해(기원전 119년)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이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공격하여 적의 머리와 포로 8~9만을 데리고 왔다. 상으로 내린 하사금이 50만금에 달하였다. 거기에는 한나라 군대의 죽은 말 10여 만 필과 운송비, 병거(兵車), 병갑(兵甲)의 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때 이미 재정은 궁핍해져 병사들은 거의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 <<사기>>(출처 : 09개정 교학사 세계사)
흉노를 몰아내는 데에도 경제 문제는 상당히 중요했음. 군사들의 장비와 군량 등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갔기 때문.
“무제의 정복 전쟁은 남으로 복건, 광동지방과 남월을 정복하여 남해 9군을 설치(기원전 112년)하고 남해 무역의 기초를 열게 되었다. 또 월남 북부까지 차지하여 이후 천년에 이르는 중국의 월남북부 정복이 시작되었다.(기원전 111년) 또한 동으로 위만조선을 멸하고(기원전 108) 그곳에 한의 4군을 설치하여 한문화의 동방진출이 시작되었다.”
* 2020년 영남대학교 손승회 교수 강의 "실크로드 역사와 문화" - '유목국가의 등장과 성장', 이화여대 박민수 교수 강의, 동양사개론, 09개정 교학사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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