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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무제 시기 정리 ~ 전한말의 정치 개관

취미와 문화 2021. 4. 2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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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 정리노트] 한무제 시기 정리 ~ 전한말의 정치 개관


1. 한무제 시기 내조와 외정의 대립 - 염철논쟁

 

  한대에 들어와서 황제의 비서라고 볼 수 있는 상서와 중서(궁 안에 있으니 내조’)가 중요해지고, 삼공(궁 밖의 외정’)은 그 지위가 하락해가는 과정이 곧 '내조와 외정의 대립'. “한나라 초기의 정치는 3(승상, 태위, 어사대부)에 의해 운영되었다. 승상은 백관을 총괄하는 최고직이기 때문에 승상부는 황관 밖에 있던 최고행정기관이었다. 그러나 전제군주인 무제는 국정을 중심으로 궁정 밖으로부터 황제가 있는 궁안으로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내정(궁정안)에서 황제 측근에 있는 조신(상서, 중서)과 좌우에서 시중을 드는 시중 및 급사중과 같이 긴밀히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내정에서 결정된 국가정책은 궁 밖의 승상부로 넘겨져 승상은 다만 정책을 집행하는 직위로 그 격이 떨어지게 되었다. 무제 일대의 전제지배체제는 내정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니, 여기에 궁정안에서 내조 정치가 성립되었다.”

  특히 곽광이 손에 쥔 상서 직책이란 황실 재정을 담당하는 소부(少府; 작은 부서)의 속관으로 그리 높은 지위의 관직은 아니었음. 그러나 그 직무만 따진다면, 승상부와 어사부를 비롯한 각 관청 및 일반 관민으로부터 상주를 황제에게 전달하고, 황제의 조서를 하달하는 것이므로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음. 상서는 그 상주를 취사선택해서 전달할지 말아야할지 취사선택하였고, 조서를 하달하는 것을 담당하기에 실질적인 권한을 쥐게 된 것임(중국의 역사 - 진한사)

  곽광은 내조의 대표자로서 염철 전매를 반대하게 되고, 상홍양이라는 자는 염철 전매/평준/균수를 추진한 외조의 대표자라는 구도가 형성. 소제 때가 되면 내정정치가 극에 달하는 한편, 무제의 억압도 이제 없으니, 외조가 반발할 수 밖에 없음. “이러한 내정정치에 대해 궁궐 밖에 있던 외조의 승상부와 어사대부는 강력히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어사대부 상홍양은 무제시대에 소금, , 술의 전매제도를 입안 추진하여 국가재정을 회복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로 무제 사망 후 궁중 내의 밀실정치에는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내조의 실력자인 곽광은 상홍양의 경제 통제정책에 비판을 가하고, 그의 염철주의 전매제도와 평준/균수법에 비판을 가하였기에 내/외조 간의 정치적 충돌이 일어나게 되고, 이는 그 후 유명한 염철논쟁으로 발전하였다.(기원전 83)

 

시원(始元) 6년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승상과 어사로 하여금 천거된 현량 및 문학들과 토론하여 민간의 고충을 물어보도록 하였다. 이에 문학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제가 듣건대 백성을 다스리는 길은 지나친 안락의 근원을 방지하고 도덕의 단서를 발전시키는 데 있으니, 상공업을 억누르고 인의(仁義)를 선양해서 군주가 이익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모범을 보인 연후에야 백성들의 교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민간의 풍속도 선량하게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각 군국(郡國)에는 염관(鹽官), 철관(鐵官), 주각관(酒榷官; 술의 통행세를 매기는 관리), 균수관(均輸官) 등이 있어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고 있어서(여민쟁리, 與民爭利), 인정 많고 순박한 풍속을 해치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풍조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백성들은 본업인 농업에 나아가는 자가 적고, 말업인 상공업을 좇는 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겉모양이 화려해지면 속 내용은 쇠약해지고, ()이 성하게 되면 본()이 훼손되는 법입니다. 사람이란 상공업에 종사하다 보면 사치스럽게 되고, 농업에 종사하면 근실하게 됩니다. 백성이 근실하면 경제가 넉넉해지고, 백성이 사치스러우면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이 생기게 됩니다. 바라옵건대, 소금, , 술의 전매제도와 균수법을 폐지함으로써 농업을 진작시키고, 상공업을 물리치게 하여 농업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됩니다.
(어사)대부가 반박하였다. 흉노는 한을 배반하여 신속(臣屬)하지 않고, 여러 차례 변경을 침략해 왔습니다. 이를 방비하자니 중국 내지의 병사들을 고생시키게 되고, 이를 내버려 두자니 그들의 침략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에 선제(先帝)인 무제께서는 변경 주민들이 오랫동안 피해를 입고 오랑캐들에게 붙잡혀 가는 고초에 시달려 온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고 봉수를 갖추는 한편, 군대를 주둔시켜 변경을 방비토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경 방비에 소용되는 재정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소금,,술에 대한 전매제도를 시행하고 균수법을 실시해서 재정을 확충하여 변경 방비에 소용되는 비용을 충당하고자 한 것입니다. 지금 토론하는 자들은 이러한 제도를 폐지하고자 주장하는데, 그렇게 되면 안으로는 국고가 텅 비게 될 것이고, 밖으로는 변경 방비에 필요한 비용이 부족하게 되어 요새를 지키느라 성루에 올라가서 고생하는 병사로 하여금 변경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게 할 것인데, 장차 이를 무슨 비용으로 충당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제도를 폐지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 <<염철론>> <본의편
>;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pp.42~43.

 

  기원전 81년에 소제가 전국의 지식인들을 수도 장안으로 소집하여, 무제 시기의 경제정책을 논하게 하였음. 그것을 바로 염철논의라고 함. 전한 말기 환관(桓寬; 직책이 아니라 사람 이름)이라는 자가 논의의 내용을 정리 및 편집하여 <<염철론>>이라는 제목의 책을 만든 것.

  현량과 문학들의 제안은 농본주의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전매를 중지하라는 제안은 민간 상공업을 활성화하라는 제안과 다를 바 없음. 지방에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있는 지방호족의 이익을 대변했다고 추론해낼 수 있는데, 내조의 권력자 곽광이 이 지방호족들의 인맥망을 고려했다고까지 나아갈 수 있음. 곽광은 염철, 주각, 균수 등의 조치로 인해 규제를 받는 지방호족층과 제휴하여 외조권력을 타도하는 한편, 지방호족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그 핏줄인 현량, 문학들을 키우기 위함일 것.

  어쨌건 <<염철론>>에 따르면 이 회의의 결과, 정부 측의 판단은 현량, 문학이 국책에 대한 이해력이 없다는 것. 자기들 멋대로 소금과 철 전매 등의 불편에 말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렇게 반대한다면 잠시 달래주는 차원에서 군국의 술 전매와 관내의 철관만 폐지해보자고 하여 그 상주(上奏; 임금에게 올린 말씀)이 허가되었다고 함. , 현량과 문학의 주장이 통해 폐지된 것은 전국의 술 전매와 관내 - 즉 장안 - 를 중심으로 하는 삼보지역의 철관뿐이었고, 다른 지방의 염철전매제나 균주 및 평준법에는 현실적으로 전혀 손을 댈 수 없었음.

 

 


2. 소제 시기 - '윤대의 조'

 

  이후 소제 시대의 내조 정치는 곽광이 주도해나갔는데, 곽광은 무제의 유언을 정책의 기본방향으로 삼았음. 무제의 유언이란 바로 윤대에서 남긴 유언 - ‘윤대의 조라고 하는 것. 무제 말년 소속도위 상홍양은 승상, 어사대부와 함께 윤대(투루판)지방에 둔전을 개설할 것을 건의했지만, 무제는 백성을 쉬게 한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음. 윤대의 조는 대개 과거에 대한 후회로도 이야기됨. 즉, 부세와 요역을 경감하고, 흉노와 화친하라고 하는 것.

 

 


3. 선제 시기 - 내조의 몰락

 

  소제는 21세에 죽고, 18세의 선제가 올랐음. 선제 즉위 초에 곽광이 정치를 주관했으나, 곽광이 죽고 나서는 선제의 친정이 시작. 내조의 중추인 곽씨 세력을 제거하니, 궁정 내의 권신정치가 끝을 맺고 내조는 힘을 잃고, 내조와 외정의 정치갈등이 해소. 선제는 애초의 것으로 돌리려, 승상에게 다시 전권을 돌려줌.

 

 


4. 정리

 

  무제와 선제까지의 갈등은 내조와 외조의 갈등이었고, 그 과정에서 염철논쟁으로까지 비화했음. 그리고 이후에 왕망을 비롯한 외척이 나오는 것이고, 환관 역시 그들과 결탁하게 됨. 이제는 외척과 환관에 의해 혼란의 시대로 들어섬

 

왕망의 '신'은 생략하도록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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