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울증 이겨내기 - 약물 치료 추천

취미와 문화 2021. 5. 2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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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들 하지만, 요새는 감기로 쉽게 죽지 않는 한편 우울증은 치명적으로 발전하곤 한다. 우울증을 ‘고치기 위해’ 심리상담을 받곤 하지만 과연 해결책이 되긴 하는 건지. 가끔 심리상담은 그저 병원으로 가야하는 사람을 걸러내는 과정이 되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우울증 검사’를 받아본 적이 있을 테다. 마음을 되돌아보던 와중에, ‘나는 왜 이런 상태인지’ 알고싶은 마음이 들 때 그런 검사를 받는다. 자기자신에 대해 알고싶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을 때, 괴로움 속에 하는 것이 우울증 검사라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왜 우울한가.’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스스로 찾을 수 없다. 몸 속에 바이러스 위치를 우리 스스로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마음 수양이나 명상은 직접 효과를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렇게 어설픈 명상을 시도한답시고 병을 방치한다. 그건 고집이다. 아주 치명적인 고집.

나는 우울증 약물 신봉자다. 약을 먹으면서 우울증은 점점 ‘멀어진다.’ 중요한 건 그 치명적인 생각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명상이라는 것도 마음을 비우는 것이지 생각을 깊이 하는 것이 아니다. 우울증은 생각을 비워야 밀어내는 질병인데, 자꾸만 우울한 생각의 원인, 핵심, 답을 찾아내려다보니 더더욱 깊어진다.

우울증의 끝은 죽음인가? 나는 우울증 중증까지는 모른다. 목이나 손목이 깨끗한 걸 보니 말이다. 체험 정도는 한 것 같다. 세상 속에 더러운 잡티같은 내가 부유하고 있는 그 기분을 나는 경험해 보았다. 문제는 그 생각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리에 분비된다는 것이다. 죽음은 어쩌면 그 생각의 끝에 있을 테다.

그 생각은 어디에도 공감을 받지 못한다. 어쩌면 우울증 환자들끼리도 그 공감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환자는 무의식 중에 자기방어를 한다. 공감해주는 척 하지만, 사실 상대방을 의심하고 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그 생각을 공감해주는 일은 없다. 고쳐주려고 섣불리 손을 대는 한이 있더라도.

우울증은, 마치 목이 마른데 물을 마셔도 가시지 않는 갈증과 같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지친다. 남들이 생각하는 공감과 환자가 생각하는 공감의 의미는 어쩌면 다를 수도 있을테다. 좀 더 근본적인 공감, 나의 상태를 바꾸어줄 공감. 사실 그런 공감은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데.

이런 구제불능의 상황을 병으로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약물 치료를 준비하라. 보험 들 것 다 들어놓고, 병원을 가자. 우리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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