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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 정리노트] 진(秦)나라와 진 시황제

취미와 문화 2021. 4. 21.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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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 정리노트] 진()나라와 진 시황제

 

 

 


1. 정()의 집권

 

1. 진 시황제 정()의 출생 : 진시황제의 부친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사기 권 6 진시황제본기에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사기 여불위전에서는 진시황제 부친 장양왕이 조나라에 인질로 있을 때 조나라 거상 여불위가 자기의 여자(애첩)을 장양왕에게 바쳤는데 이때 여불위의 애첩은 이미 임신하여 장양왕에게 보내졌기 때문에 시황제는 장양왕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자식이란 설도 있다.” 

  진시황제의 부친이 누구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불위 주변에 재상으로 진나라에 들어오는데, 여불위의 세가 점점 강해진다는 것. 여불위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이 진나라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 씨족집단에서 유력했던 제후나 경-대부들의 권세는 점차 새로운 왕권에 눌리기 시작하는데, 주로 유력자에게 학식이 있는 빈객들이 왕권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

  종래의 씨족집단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벗어나, 관료화된 빈객을 새로운 개척지 지배에 활용하면서 가부장적 군주의 권력을 형성. 빈객은 진나라 때 여불위의 권력의 뒷받침. 위의 설 중에 하나를 따르자면 여불위는 대상인 출신으로, 진나라 왕족에게 자신의 아들을 임신한 애첩을 헌납하여 아들도 왕의 후계자로 만들었음. 그리고 그 여불위의 아들로 알려진 이가 진왕 정 - 진시황. 그리하여 여불위는 승상을 거쳐 상국의 지위에 오르게 됨.

 

2. 노애의 난과 축객령, 축객론 : 진시황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진나라에서 - (남근에 수레바퀴를 매달 만큼 정력이 좋아 태후의 비밀 남편으로 여불위가 채택한) 노애의 난 같은 - 쿠데타가 벌어짐. 노애의 난이 평정되고 나서 태후와 노애와의 관계가 폭로되면서, 그것을 주도한 여불위는 상국에서 파면당하고 유배당하려는 판국에 자살을 택함. 사실 노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진시황 나름대로의 문제점을 생각하는 것은 이 빈객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들(타국인)을 모두 국외로 내보내는 축객 정책을 시행하는 것. , 축객령.

  이러한 축객령에 대해서 반발하는 사람이 사실 진을 세운 일등공신인 이사. 이사가 그 축객령을 반대하면서 상소를 올린 것이 축객론. 나라를 망치는 것이 빈객이 아니며, 오히려 능력있는 사람들을 쫓아내서 다른 나라를 이롭게 하지 말라는 것. 한편 초나라 출신인 이사가 축객령의 대상이었던 것도 염두에 둘 수 있음.

 

진왕국은 과거에도 목공(穆公), 효공(孝公), 혜문왕(惠文王), 소양왕(昭襄王)과 같이 국가를 융성 강대하게 한 군주는 모두 타국인을 중용함으로써 그 사업을 성공시켰다. 그런데 지금 진이 타국인을 추방하려고 하는 것은 타국의 재능있는 인재를 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로 인해 타국이 강력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예를 들어 적국에게 무기를 주고 강도에게 곡물을 지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축객론(출처 : 중국의 역사)

 

 


2. 진나라의 천하통일

 

 

1. 천하통일의 배경

 - 먼 배경

  1) 평화에 대한 염원.

  2) 맹자와 묵자 등의 '비공(非攻)'의 논리가 전파 

  3) 경제적 통일 욕구. 너무 뿔뿔이 흩어지면 경제도 성장을 하지 않겠죠. 그리하여 화폐와 도량형 통일 조치를 취합니다. 진나라 화폐는 반량전. (오수전은 한나라의 것) 

  4) 전국시대부터 통일이 조금씩 이루어지면서 중화민족이 성립.

 

 - 가까운 배경

  1) 상앙의 변법 

  2) 진의 부국강병책 

  3) 변법이 불가피한 지정학적 요소.

  4) 법가주의

  5) 음양오행설이나 오덕종시설. 오덕종시설은 결국 새로운 국가가 탄생한다는 설을 결합시킨 것이었고, 진의 통일에 영향을 준 것.

 

 

  2. '황제' 체제 운영' : 진나라는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형성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어 운영되었는지를 살펴보겠음. 진나라가 기원전 221년에 전국을 통일. 황제가 있는 진의 수도 함양이 중원에서 서쪽에 있는데, 그곳이 장안 근처. 중국은 서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고 척박하며 오랑캐들과 접하고 있으니, 그 조건이 불리했음. 고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체제 전반을 뜯어고치는 변법에 모든 걸 걸어야 했던 것.

옛날 오제(五帝) 때는 그 땅이 사방 천 리에 그 밖은 후복(侯服), 이복(夷服) 등 제후였는데 조회를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하여 천자가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정의로운 군대를 일으켜 잔적들을 없애고 천하를 평정하시어 해내를 군현으로 삼고 법령을 하나로 통일하시니 이는 상고 이래로 없던 일이자 오제도 따르지 못할 일입니다. 신 등이 삼가 박사들과 논의하길 예날 천황(天皇)이 있고, 지황(地皇)이 있고,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태황이 가장 귀하다고 했습니다. 신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존호를 올리니 왕은 태황(泰皇)’으로, ()()’, ()()’로 하시옵고, 천자가 스스로를 부를 때는 ()’이라 하옵소서.진왕은 태자는 떼고 황자를 취하고, 상고의 제라는 이름을 가져다 황제(皇帝)’라 하고 나머지는 그대들이 논의한 바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좋다고 명하고는 장양왕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촌했다. 이어 이렇게 명했다. 짐이 듣기에 태고에는 호만 있고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에는 호가 있고 죽은 뒤에는 행적에 따라 시호를 정했다고 한다. 그랬다면 자식이 아비를 논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하는 것이니 이는 진짜 도리가 아니다. 짐은 이를 취하지 않고 지금부터 시호법을 없애겠노라. 짐을 시황제라 부르고, 그 뒤는 수를 헤아려서 2, 3세하여 만 세에 이르기까지 무궁하게 전하라.” - <<사기>> 6. 진시황본기(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2. 군현제 - [3공-9경-수-승-위,감] : 옛 봉건제를 넘어, 이제는 모든 법령이 하나로 통일 되었음. 이것은 삼황오제 중 오제도 못했다는 것. 그래서 그들보다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태황을 하려 했으나, 황제로 지칭하였다더라. 물론 진나라는 황제 2세로 끝나버림.

 

승상 왕관 등이 이제 막 제후들을 평정했지만 연, , 초나라의 땅은 너무 멀기 때문에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황자들을 왕으로 세우는 일을 허락하시길 청합니다라 했다. 시황제가 군신들에게 이에 대해 의논하게 하자 군신들 모두가 그게 편하겠다고 생각했다. 정위 이사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냈다. “주의 문왕과 무왕이 제후로 봉한 많은 친인척들이 성은 같았지만 갈수록 멀어지고 서로를 원수처럼 공격했고. 제후들끼리는 더더욱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주 천자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하가 폐하의 신령으로 통일을 이루고 모두 군현이 되었습니다. 여러 아들과 공신들에게는 공적인 세금으로 큰 상을 내리시는 것으로도 그들을 통제하기에 충분합니다. 천하가 다른 뜻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술책입니다. 제후를 두는 것은 불편합니다.”
시황이 말했다.
전쟁이 모두 끊임없는 전쟁에 고통을 받은 것은 제후들이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종묘의 신령이 보우하사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는데 다시 나라를 세우는 것은 화근을 심는 것이다. 그러고도 안녕과 휴식을 바라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말이 옳다.” - <<사기>>6. 진시황본기 [卷六. 秦始皇本紀]

 

  6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신하들로 하여금 군현제와 봉건제의 장단점을 의논케 하였음. 승상인 왕관은 봉건론을 주장하였으나, 정위 이사는 춘추전국의 혼란이 봉건제에 그 원인이 있음을 들어 군현제를 내세우자 결국 시황제가 군현제를 채택한 것을 확인할 수 있음.

  결국 전국에 군은 36 - 후에 42 - 으로 나뉨. 지방관까지 파견. 각각의 군에는 장관인 수(), 부장관인 승(), 군대의 지휘관인 위(), 감찰관인 감() 등의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 물론 이 36군에 포함되는 여러 군 전부가 이 때 처음 설치된 것은 아니지만, 군현제를 채택하면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것. 한편 그렇게 편성된 군현을 통치하는 중앙행정기구를 보면, 3()-9()로 구성. [3공-9경-수-승-위,감]

 

* 3공 :

  1) 승상 : 일반적인 행정담당. 승상은 주대 이래 제후를 초빙하거나 향연을 베풀 때 예를 맡아보았는 관직. 여기에서 출발하여 춘추시대부터 군주를 도와 국정을 맡다가 국무를 총리하는 관직으로 바뀌었고, 전국시대에는 상의 지위는 더욱 높아져 최고 행정의 수반이 되었는데, 더욱 높아 행정 전체를 담당하는 관직으로 바뀌어 나갔음.

  2) 어사대부 : 감찰기능. 어사는 주대의 군주의 근신으로 사건을 기록하던 기록관이었음.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 백관을 감찰하는 군주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감찰직이 됨. 원래는 기록하던 직책이었다는 것.

  3) 태위 : 군사

3공 아래에 9.

[이러한 3 9경제는 한대로 그대로 이어지게 됨]

 

 

4) 경제 통일 : 경제적으로 각국에서 사용하던 도량형과 화폐, 차궤(마차궤도)를 통일했고, 문자도 통일. 이 때 화폐는 반량전

  이것은 그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서체에서도 진나라 행정체계의 통일에 대해서도 확인해 보는 수단이 된다. 은나라 시기 청동기에 새긴 글자와 진나라 시기 석각(돌에 새긴 글자) 간에도 분명한 차이가 지적되어 왔다. ‘보고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문서로 하라. 구두로 청하거나 타인을 통해 청하지 말라.’ - “진률”. 문서 행정은 진나라가 이전에 비해 문자와 문자 작성 재료를 행정 실무에 사용했던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면 221년 시황제가 도량형, 수레바퀴, 문자를 통일했다는 서술이 나온다. “천하를 36군으로 나누고, 군에는 수(守), 위(尉), 감(監)을 설치한다. 백성의 이름을 고쳐서 검수(黔首; 머리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검은 머리)라고 한다 ... 법도(法度), 형석(衡石), 장척(丈尺)을 통일하고, 수레의 폭을 통일하며, 서(書)는 문자를 통일하게 한다.(서동문자)”

  전국 시대에 각지에 다른 서체가 사용되니, 본래 전서체를 사용한 진나라가 다른 국가의 행정까지 보려면 전서체(정확히는 쉽게 받아들이도록 간략화한 ‘소전(小篆)’서체)로 문자를 통일했다. 그리고 이후 한대에 예서체가 전성시대를 맞았고, 그 후 초서체, 해서체가 나아갔다고 한다. 사실 학자들도 소전서체 - 전서체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글자 서체 분류는 힘든 작업이다. 어쨌건 진대에 만들어진 석각과 도량형기에는 전서체로 새겨진 글자들이 보이곤 했다.

  그런데 사기에 기록된 법률들은 1975년 호북성 운몽현 수호지(睡虎地)에서 1,155매나 출토된 목간들에서 ‘진률’ 관련 내용들이 확인되어 교차 연구된다. 보통 이 수호지 목간을 ‘운몽수호지진간’이라고 불리는데, 진나라의 법이 나와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목간에 쓰여진 글자체가 전서체라기보다는 [한대에 유행했다고 하는] 예서체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는 진나라 재상 이사의 문자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의 것이라는 뜻이다. 이미 예서체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진률 조문이 나온 다른 목간인 ‘운몽 용강진간’에 ‘황제’, ‘검수’ 등 용어가 사용되었는데도, 예서체가 사용되고 있었다! ‘문자 통일’이 이사가 만든 ‘소전’ 서체로 통일되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사가 문자 통일을 했다’는 표현이 말이 되는가? 이사가 서예가도 아니지 않은가? 물론 군현제, 도량형, 화폐통일, 수레바퀴 폭의 통일 등을 그가 추진했음은 말이 되지만, 그가 글자체를 만들어 보급했다니? 하긴, 그 옛날 어떻게 그 미약한 행정력으로, 넓은 땅 덩이를 가진 중국 전역에 전서체를 보급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문서행정 시스템’ 자체는 그가 구축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된다. 이후로도 서동문자 - ‘서는 문자를 통일하게 한다’ - 는 진시황본기 이외에도 나타나는 표현이니, 꼭 서체의 통일을 뜻하는 것은 아니리라.(pp.144~154 요약) 일단 ‘문서 행정’의 발전이 나타나있고, 그 명령이 관료체제 하부까지 내려갔던 것은 맞다. 결국 문자통일의 핵심은 문자의 통일의 대상은 관료의 공문서 체계를 정비한다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진나라 수호지 목간(2021년 교사 임용시험 기출)에서 추출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이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제도적 통치체제를 확립해 나갔다는 것. 전국시대의 군주 중심의 행정은 효율적인 관료제를 요구했습니다. 백성을 호적에 등록하여 토지분배를 바탕으로 조세-요역-병역 등을 부과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수레바퀴 폭, 도량형, 문자통일 등은 모두 이 관료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

 

 

5) 사상통일 - 분서갱유

  진시황은 기원전 213년 분서갱유를 저지름. ‘분서란 책을 태우는 것이고, ‘갱유는 유가들을 묻는다는 것. 그런데 모든 것을 태운 것이 아니라 역사서, 의약, 점복, 농업 관계서적은 제외시켰음. 다만 민가 소장의 서적과 사학(私學, 관학의 반대 격)을 금지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책의 원본은 중앙에서 보관하는 것.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생각해보면 다 태운 것 같지만, 각 지식을 국가가 독점하고 그걸 기반으로 다 통일하겠다는 것

 

  이사는 ...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옛날에는 천하가 몹시 흩어졌는데도 이를 통일하는 자가 없어 제후의 난립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모두가 옛날의 세상을 이상으로 생각하고 현세를 비판했고 저마다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여 현실을 혼란시키며 자기주장이 옳다고 하여 위정자를 비난하는 것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폐하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사물의 가치 기준을 분명히 했으며, 또 황제라는 유일한 지위에 올라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저마다 자기주장이 옳다고 하는 자가 여전히 자취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정하신 법을 비난하고 포고를 내려도 비난하며, 나아가서는 그 불만을 거리에 나가서 제멋대로 떠듭니다.
  또 그들은 폐하의 명에 이의를 나타냄으로써 그것을 기화로 헛된 명예를 얻으려고 무리를 이루어 비방으로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무리를 방치한다면 머지않아 폐하의 권위를 손상시킬 것입니다. 즉시 조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방법으로는 학술, 저서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이것을 거두어들여 불태워야 합니다. 가져도 좋은 것은 의약과 복서, 농사에 관한 서적에 국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학문을 좇는 자의 스승은 관리가 대행하게 합니다. 이것이 저의 계획안입니다.“ - <<사기>> 이사, 
왕전 열전

사관이 있는 문서 중 진의 기록이 아닌 것은 모두 태우도록 하시고, 박사관이 아니면서 감히 (), () 및 제자백가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으면 관에 바치게 한 후 군의 태수와 도위로 하여금 함께 불태우도록 하십시오. 또 감히 ,를 들먹이며 토론하는 자는 저자거리에서 처형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을 비방하는 자는 일족을 모두 처형하되 만약 관원이 그것을 알고도 처단하지 않으면 같은 죄로 처벌하시기 바랍니다. 이 법령이 하달된 후 30일이 지나도 불태우지 않는 자는 경위성단용(黥爲城旦舂; 경형(黥刑)을 가한 다음 장성 쌓는 중노동을 시키는 육형)에 처하십시오. 다만 제거하지 않을 서적은 의약, 복서(卜筮; 점 치기), 농업 관계의 책 뿐입니다. 그리고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관리를 선생으로 삼게 하십시오.” - <<사기>> <진시황본기>

 

  진시황의 과제는 내가 법가에 의거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게 초점이 있는 게 아니라, 국가를 통일시키는 데에 집중되어 있음. 어찌보면 분서갱유도 사상과 학문을 통일하려는 데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 진나라에서 편찬한 사상, 종교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지, 각지에서 자기들만의 학문으로 다시 반기를 들면 이 통일의 대업이 무너져버리니.

 

 

6) 만리장성 : 진시황의 가장 악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은 만리장성을 포함한 과도한 토목사업. 물론 그 목표는 장성을 쌓고 천하통일 후에 장군 몽염으로 하여금 흉노를 몰아냄. 그렇게 장성을 완성. 이 장성 축조의 의미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근간이 되며, 농업과 유목민족을 구분하는 선이 된다는 측면이 있음. 진의 국토는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는 농경지대를 확보하면서 중국 영토의 고정화를 이룩하고, 중국 영토는 이후 분열과 통일시대가 반복되는 와중에도, 진의 통일영역이 대체로 유지되어 나갔음.

 

기사 1) 연나라에서는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을 두어 흉노를 방어했다. 이 무렵 의관 속대를 하는 예절이 있는 나라는 전국 칠웅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나라[(), (), ()]는 흉노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 뒤 조나라 자수 이목이 있는 동안은 흉노가 감히 조나라의 변경으로 쳐들어오지 못했다. 그 뒤 진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망시켰다. 시황제는 몽염에게 군사 10만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가서 흉노를 치게 하여 하남 땅을 모두 손에 넣었다. 황하를 이용하여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현성 마흔 네 개를 쌓고 죄수들로 이루어진 군사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했다. 그리고 구원(九原)에서 운양까지 쭉 뻗은 길을 개통시켰다. 험준한 산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기를 이용하여 참호로 삼았으며, 보수할 수 있는 곳은 보수하여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여 리에 달하는 대장성(大長成)을 쌓았다. 또 황하를 건너 야산과 북가까지 차지했다. - <<사기>> 흉노열전
기사 2)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진시황제는) 몽염에게 삼십만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을 몰아내게 하여 황하 이남 지역을 확보하였다. 장성을 쌓았는데 지형에 따라 험새를 이용하여 임조에서 요양까지 1만여 리나 펼쳐졌다. 이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을 차지하고 꾸불꾸불 북으로 올라갔다. - <<사기>> 몽염열전
기사 3) 신선을 찾아 장생 불사약을 구하러 나섰던 연 출신 노생이 바다에서 돌아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시황에게 보고하고, 아울러 예언서인 도참을 바쳤다. 그 도참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진왕조를 멸망시키는 것은 호()이리라
  그래서 시황은 몽염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 삼십만을 거느리고 북방의 호인(胡人)들을 공격케 하여 하남 지구를 점령하였다
. 시황 33, 병역과 요역을 비해 도망친 범법자들, 빚을 지고 팔려온 노예들 및 상인들을 징발하여 육량지구를 점령한 뒤 계림, , 남해군을 설치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이나 유배된 자들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했다. 서북쪽 흉노를 몰아내었다. 유중에서 황하를 따라 동으로 음산에 이르는 지역에 40개의 현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황하 연변에 성을 쌓아 요새를 만들었다. 또 몽염 장군을 파견하여 황하를 건너 고궐, 음산, 북가 일대를 점령하고, 보루를 축조하고 융인(戎人)을 내몰았다. 귀양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새로 설치한 현에 이주시켜 그곳에 살게 하였다. - <<사기>> 진시황본기(춣처 : 사료로 읽는 동아시아사)

 

  ‘기사 1)’을 보면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시기부터 흉노가 나타나 중국 민족들을 공격했고, 일찌기 장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음. 연나라-조나라-진나라는 북쪽 변경에 장성을 쌓았지만, ‘기사 2)’에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할 즈음에는 흉노는 황하를 건너 오르도스 일대를 장악한 상태. 그리하여 진시황제가 몽염 장군을 보내 오르도스 지역을 다시 수복하도록 하고, --진이 쌓았던 장성들을 고치고 잇게 된 것.

 

 

7) 아방궁과 여산릉

  아방궁은 진시황에 생전에 거처하던 곳이고, 여산릉은 죽은 후에 머무는 곳. 이 건물들이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1호당 1명 징발된 꼴로 전체 인구의 15% 10년가량 동원. 아버지든 남동생이든, 집안에 남자 한 명은 10년의 노역에 거의 징발되었다는 것.(출처 : 박민수 교수님)

 

시황이 즉위하자 바로 여산에 무덤을 축조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천하를 합병한 다음에는 천하에 노역을 위해 70여 만 명을 투입하여 우물 셋 깊이만큼 파고 곽에 이르도록 구리 녹인 쇳물을 붓고 궁궐의 모습, 백관 기이하고 진귀한 기물들을 옮겨 가득 채웠다. 장인에게는 화살이 발사되는 기관을 만들게 하여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바로 발사되게 했다. 수은으로는 수많은 하천과 강 그리고 바다를 만들어 기계장치로 계속 흐르도록 했다. 위에는 천문도를 갖추고 바닥에는 지도를 갖추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오래도록 꺼지지 않게 했다. 2세는 선제의 후궁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들은 내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모두 따라 죽게 명령하니 죽은 자가 아주 많았다. 장례가 끝나자 누군가 장인들이 기관을 만들고 기물을 옮긴 자들도 이를 다 알고 있으니 귀한 기물들이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큰일이 끝나고 기물들을 다 넣자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바깥문도 내려 장인과 기물을 운반한 자들을 모두 나오지 못하게 했다. (무덤은) 풀과 나무를 심어 산처럼 만들었다. <<사기>> 6. 진시황본기 [卷六. 秦始皇本紀]

 

 

이렇게 중국 대륙 통일 후 수습 및 관료행정체계의 합리화가 갖는 의의란

1) 최초의 중국 통일 제국의 출현

2) 황제 지배체제를 확립 : 황제 체제는 진시황제부터 시작하여 청나라가 멸망하는 1912년까지 계속됨.

3) 군현제의 완성 : 주의 봉건제를 버리고 군현제를 채택하여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한 것.

 


3. 진시황제 지배체제의 구조적 특성

 

 

1. 법가사상 : 진시황은 <<한비자>>를 읽고 법가를 채택하게 되었음. 법가주의자 이사를 중용한 것도 그런 맥락. 법가는 법(法)과 술(術)을 구분했는데, 법은 군주의 명령이고, 술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을 뜻함. 즉, 술은 관료를 임명하고 관료제를 운용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임. 

 

2. 황제권력과 옥새의 권위 : 군주의 명령 유형

진시황제 때 옥새 제도가 처음 시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음. 이 때 최소한 옥새에 대해서는 두 가지는 구분해야 함.

황제의 옥새는 그 인문에 의하여 여섯종류로 구분되는데, 한대 기준으로

1. 황제행새는 일반서무용,

2. 황제지새는 제후왕에게 글을 보낼 경우,

3. 황제신새는 발병(發兵) 및 대신을 부를 때,

4. 천자행새는 외국에게 황제의 명을 내릴 때,

5. 천자지새는 천지신을 제사할 경우 등에 사용되었고,

6. 천자신새는 그 사용처가 확실치 않음.

정리하자면 황제00는 대내용, 천자00은 대외용이나 제사.

옥새의 종류가 황제용과 천자용으로 나뉘고 게다가 각각 용도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은, 동일인이면서도 황제라고 칭하는 경우와 천자라고 칭하는 경우에 군주로서의 기능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황제라는 칭호에 따르는 기능은 국내에 대한 것으로서, 황제가 지상에 출현한 빛나는 상제로서 절대적 권위를 발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목간을 사용하는 시기였으므로, 옥새의 사용방법이란 진흙에 인장문양을 내는 봉니(封泥)’식이었을 것입니다.

 

* 전공수작제는 계속해서 시행.  “23세부터 군복무가 시작되었으나 필요에 따라 징병 연령을 15세로 내리기도 하였다. 특히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전쟁에 공로가 있는 자에게 작위를 주는 전공수작제를 채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 출처 : 박민수 교수님 강의, 동양사개론, 네이버 지식백과, 중국의 역사-선진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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