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중국 고대사 정리] 상(은), 주, 춘추전국시대(공자, 묵자)

취미와 문화 2021. 4. 15.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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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사 정리] 상(은)나라의 건국

 

1. 상(은)

 1) 상나라란 : 연대 확인이 가능한 최초의 중국 내 국가. 은대 중기의 도읍 유적지 정주 이리강 유적과 휘현의 유적, 그리고 용산문화와 연계되는 은나라 초기의 도읍인 하남성 언사현 이리두 은허 등이 발굴되면서 은(상나라 수도)의 역사도 더욱 명확하게 되고 은대 초기, 중기, 후기의 도읍지가 확인되었다.(동양사개론)”

 2) 건국 : 기원전 1600년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인 걸왕을 몰아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음. 

 3) 상나라에서 은나라로 : 기원전 1300년 경에 ()’ 지역으로 도읍을옮겨 마지막 마지막 주왕(紂王)까지 273년간 왕조를 유지

 4) 상나라? 은나라? : 상나라와 은나라의 왕조 성씨는 같음. 은나라 국호는 후대에 은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기에 은나라라고 부르는 것임

 5) 하나라 이전 요순시대 선양 의식 : 요-순-우 왕 시대에 이상적인 사회라고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는 능력있는 사람에게 선양의식을 했기 때문.

 

  제순(帝舜; 순 황제)은 하늘에 우를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17년 뒤 제순이 세상을 떠났다. 3년 상을 마치고 우는 순의 아들 상균에게 양보하고 양성()으로 피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상균을 떠나 우에게 인사를 드렸다. 우는 그제야 천자 자리에 올라 남면하고 천하에 임했다. 나라 이름을 하후()라 하고, 성을 사씨()라 했다.

  제우
(帝禹)가 자리에 올라 고요를 천거하고 정권을 주려 했으나 고요가 죽었다. 고요의 후손을 영()과 육() 또는 허()에 봉했다. 그 후 익()을 천거해 정사를 맡겼다.

  10년 뒤 제우는 동쪽을 순수하다가 회계()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하는 익에게 주어졌다. 3년 상이 끝나자 익은 제우의 아들 계()에게 양보하고 기산() 남쪽으로 도망쳐 숨었다. 우의 아들 계는 현명하여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익에게 주었지만 익은 우를 보좌한 날이 얼마 되지 않아 천하가 미흡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후가 모두 익을 떠나 계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군주 제우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계자 마침내 천자 자리에 올르니 이가 하후 제계
(夏后 帝啓)이다.
- <<사기>> 2 <하본기>, (출처 : 이화여대 사회교육과 박민수 교수님 강의, 네이버 지식 백과)

 

그런데 하나라 시기부터는 선양의식 아들이 왕위를 잇게 됨.

 

공갑이 세상을 뜨고 아들 제고(帝皐)가 섰다. 제고가 세상을 뜨고 아들 제발(帝發)이 즉위했다. 제발이 세상을 뜨자 아들 제이계(帝履癸)가 즉위했는데 이가 걸()이다. 제걸 때 공갑 이래로 제후들이 하를 많이 배반했는데 걸은 덕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치니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제걸이 탕()을 불러 하대(夏臺)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탕이 덕을 닦으니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로 귀의했다. 탕이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하걸을 정벌했다. 걸은 명조(鳴條)로 달아났다가 결국은 추방되어 죽었다. 걸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다라 했다. 탕이 천자 자리에 올라 하 왕조의 천하를 대신했다. 탕은 하의 후손을 제후에 봉했고, () 왕조 때에는 기()에 봉해졌다. - <<사기>> 2 <하본기> : 출처 : 이화여대 사회교육과 박민수 교수님 강의, 네이버 지식 백과)

 

  하나라의 왕위는 아들에게 계승이 되는데, (제)걸 때 폭정이 심했음. 결국 탕이 걸을 몰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오름. 비로소 상나라가 건국됨. 또한 은나라 시기에 왕위계승은, 은왕세계표(殷王世系表)에서 볼 수 있듯이 은대 초-중기까지에는 형제상속이었으나 후기에 비로소 부자상속이 정착되었다.

 

  6) 상나라의 문화 : 갑골문 사용 흔적[점치는 사람 : 정인(貞人) 혹은 복인(卜人), 점복 해석은 왕이 함.], 은나라 수도 안양 은허 지역에서 기원전 14~11세기의 여러 문자들이 새겨진 청동기 발견. 제사를 통해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모습. 갑골문을 분석해보면 전쟁과 관련있는 무사직명(武士職名)이 많음. 고로 은대의 관직은 제사 혹은 군사 직책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음.

 

  7) 멸망 : 주왕의 폭정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던 와중에, 주나라 무왕의 침입을 받아 목야의 전투(기원전 1122)를 패배하고 멸망하게 되었음.

 

 

 

2. 주

  1) 주의 건국 : '천명사상'에 따라 상나라 임금 주왕을 몰아내고, 주 문왕의 아들 주 무왕에 의해 주나라가 세워짐.  * '서주'시대 : 낙읍(낙양)이 주나라의 첫 도읍. 천명사상은 '예'라고 하는 '본분'이라고 하는 윤리를 강조함. 아버지는 아버지 답게, 어머니는 어머니 답게, 선생은 선생 답게.

  "혁명은 본래 천자가 덕을 잃으면 하늘의 명이 다 되었기 때문에 이를 바꾼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은나라 탕왕이 하나라의 마지막 걸왕을 토벌한 것이나, 주나라 무왕이 이 은의 주왕을 토벌한 것이 대표적인 예로 꼽는다. 후대의 왕조 교체는 이러한 혁명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우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예를 가지고 선양혁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양의 역사는 전한을 찬탈한 왕망의 신과 삼국시대 위나라 조비에서 나타나고 있다.”(동양사개론)

 

 

지금 상나라 임금인 주왕(紂王)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제멋대로 해, 늙은이를 내치고 죄인들과 가까이 하여 방탕과 주정과 방자함과 포학한 짓을 일삼고 있다. 신하들 역시 그에게 동화되어 무리를 짓고, 한 집안끼리도 원수를 삼고, 권세로 협박하면서 서로를 망치고 있다. 이에 죄 없는 사람들이 하늘에 호소하니, 더러운 행위가 역사의 심판 위에 오르게 되었다. ... 하늘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임금은 하늘을 받드는 법이다. ()나라의 걸왕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못했다. 또한 아래로는 나라와 백성에게 해독을 끼쳤다. 이에 하늘은 은나라의 성탕(成湯) 임금에게 천명을 내려, 걸왕을 내치도록 했다. ... 하늘은 나에게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한 나의 꿈과 복점(卜占)이 서로 도와 좋은 조짐이 거듭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상나라 임금인 주왕과 싸워 반드시 이길 것이다. ... 하늘은 우리 백성들을 통하여 보시고 또한 들으신다. 백성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나 한사람의 책임이다. - <<서경>>(*출처 : 이화여대 사회교육과 박민수 교수님 강의)

 

  2) 주의 봉건제 : '봉건제'에 따라 제후를 봉건지에 임명하고, 제후는 경제적 공납(세금)과 백성을 이용한 군사적 보호의무를 가짐. 영역 확장에 따라 읍제국가에서 발전한 도시국가 형태이기에 필요한 제도적 조치. 서양과는 달리 혈연적 매개가 중국적 봉건제의 특징.

  은나라 왕의 아들 무경은나라의 제후로 봉해졌음. 그 밖에 일족과 공신을 각지에 분봉하니 유명한 주초(周初)의 봉건제도가 성립됨. 여기에서 특히 은나라 왕통 무경은 훗날 '삼감의 난'에 가담. 물론 봉건제의 기원 역시 무경을 제후로 봉하면서 시작되는 것.

  최근 연구에 의하면 봉건제도는 이미 은대에 실시되었고, 주나라 초에 들어와서 각지에 봉건을 확대 실시했을 뿐. 이것은 주왕실이 새로 정복한 영토에 왕실의 일족과 믿을 수 있는 공신을 제후로 봉하여 -주 교체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려는데 그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 이와 함께 종래 은왕조에 종속되었던 유력한 읍의 지배자를 새로 서주의 지배 하에 복속시키려는 사회적 의미도 강하게 내포되어 있음.

  주나라 사회의 실제 운영 양상을 보면 왕이 직접 다스리는 '왕기'가 있고, '국'이 있음. "봉건영토 가운데 주왕실이 지배하는 직할지를 왕기라고 하고, 제후에게 봉건된 땅을 국()이라 하였다. 편 제후도 그가 지배하는 봉토를 다시 공읍과 채읍으로 구분하여 가신집단인 경-대부에게 하사하였다. 주 왕실이 봉건한 읍을 국이라 하고, 제후가 부봉한 읍을 도()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분봉된 봉토는 위로 왕기로부터 아래로는 도에 이르기까지 피라미드 같은 구조를 갖게 되었다.” 주대의 봉건제도는 기본적으로 혈연관계가 사회적 신분질서를 규정하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러므로 토지를 매개로 보호와 봉사의 계약관계 위에 성립된 서양 중세의 봉건제도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밖에 제후를 통솔하고 주왕실의 권위를 지방에 떨치기 위한 방법으로 조공제도를 실시하였다. 조공은 지방에 있는 제후가 특정한 시기에 수도에 올라와서 천자를 배알하고 자기 고장에서 생산되는 토산물을 예물로 증정하는 것이었다. 조공을 통해 천자는 제후와 상견함은 물론이고 중앙과 지방간의 군신관계를 확인하는 의식으로써 그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동양사개론)

 

 

3) 서주 시대 위기의 극복 - 삼감의 난, 동방 통제를 위한 동도 설치

  무왕이 죽고 그의 조카 성왕(成王)이 왕에 올랐음.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라는 사람이 일단 섭정을 하는데, 주공 단이 섭정을 할 때 불만을 가진 세력이 있었음. 주공 단은 성왕에게 평화적으로 다시 권력을 내어줬지만, 다른 '관숙'과 '채숙', '곽숙'이라는 동생들이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는데, 그것을 삼감의 난이라고 함. 그 중 한 명이 은나라 왕자인 무경 역시 포함됨. 무경의 또다른 이름은 녹보.

  주공은 2번의 동방원정으로 3년만에 어렵게 난을 평정하고 이후 동도(東都), 낙읍을 건설하여 동방통치의 중심지로 하였다. 그리하여 서방의 수도 호경은 종주라 하였고, 낙읍(낙양)을 성주(成周)라 하였고, 은의 유민을 동방에서 성주부근으로 대거 이주시켜 주왕실에 복속시켰다. 서주는 성왕에 이어 강왕과 소왕 목왕때에 더욱 번영하였다.(동양사개론)

 

“[자어(子魚)가 말하기를] 옛날 무왕께서는 상나라를 정벌하셨으며, 성왕께서는 그것을 안정시키시고 밝은 덕을 가진 자를 가려 뽑아 주 왕실의 울타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옛날 주공께서는 왕실을 도와 천하를 다스리시며 주왕실을 돈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공의 아들인 노공에게 청동으로 장식한 수레와 교룡이 그려진 깃발, 하후씨의 옥, 봉부의 번약, 그리고 멸망한 상나라 유민 6개 종족을 하사하시고, 노공으로 하여금 종실을 거느리고 분족을 통합하여 무리를 거느려 주공을 본받도록 하셨습니다. .... 노공에게 토지와 부용(附庸; 복속된 곳 혹은 의존하여 살아가는 곳), 그리고 제사를 담당하는 관리, 여러가지 물건과 책, 관리와 제기를 주시고, 상나라와 엄(; 노나라가 있던 산동성 곡부 일대)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 한편 강숙에게는 청동으로 장식한 수레, 소백이란 이름의 깃발, 붉은 색의 깃발, 장식이 없는 비단 깃발과 깃털을 장식한 깃발을 하사하시고, 상나라 유민 7개 종족을 나누어주셨습니다. 흙을 쌓아서 나누어 준 토지의 경계를 표시하였는데, 그 경계는 무부의 남쪽부터 보전의 북쪽 경계까지 미쳤습니다.” - <좌전> 정공 4년조 '

“4월 정미일, 왕께서는 [()] 무왕(武王)과 성왕(成王)께서 개척하신 상()나라의 지역을 돌아보시다 동쪽 나라의 지역까지 오시게 되었다. 왕께서는 의() 땅의 종묘사직(宗社)에 들어가 남쪽을 바라보시고는, 나 호후(虎侯) 측에게 명하시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 너는 의 땅에서 제후를 하도록 하라. 너에게 술 한통과 상나라 청동기 하나, 붉은 활 하나, 붉은 화살 100, 검은 활 10, 검은 화살 1000개를 하사하노라. 땅도 하사하겠노라. 그 땅에는 내()300, 120, (宅邑)35, 그리고 140이 포함된다. 의 땅에 있는 왕인(王人) 17, 전사(甸師; 왕성 주변, 경기, 교외~) 7, 그에 배속된 력부(鬲夫; ~) 1050, 그리고 의 땅의 서인 66부를 하사하노라.” 이제 의후가 된 내가 왕의 은총을 널리 알리기 위해 호공(虎公)이셨던 아버지 정()의 제기(祭器)를 만드노라. - <은주금문집성> 84320 의후측궤, (출처 : <<중국의 역사 - 선진시대>>)

 

  의후측궤에서 볼수 있듯, '의후'를 물려받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물려받는 땅과 백성, 무기들까지 증거로 남기기 위해 문자를 남기고 있음.  

 

  3) 주의 문화 :

    - 종법제 : 작은 아들보다는 큰 아들이 상속하는 원칙. 경, 대부, 사 신분 역시도 종법제에 따라 차등 상속.

    - 정전제 : 우물 정자로 땅을 9등분하여 정 가운데는 공전(公田)으로 삼아 공동 경작하도록 함.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백성을 토지에 안주시키는 것을 근본으로 한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보(;주나라 자()로 여섯 자)와 무(;이랑)의 기준을 세워 그 경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 6척을 1보로 하여, 100보를 1무로 하고, 100무를 1부로 하며, 3부를 1옥으로 하고, 3옥을 1정으로 하는데, 1정은 사방 1리이고 이것이 9부이다. 8가가 1정을 공유함에 각각 사전 100무와 공전 10무를 받는데 이것이 880무이고, 나머지 20무는 여사(廬舍;오두막-?)로 한다. 정전에서 나가고 들어올 때에는 서로 짝을 지어 다니고, 도둑을 지키고 망볼 때에는 서로 도우며, 질병이 있을 때에는 서로 구제해주니, 이로 인해 백성들은 화목해지고, 교화가 모두 같아지며, 공전에 대한 노동의 부담과 생산의 수익이 공평하게 된다.” - <한서> 식화지,(출처 : 사료로 읽는 동아시아사.)

 

  - 은에 비해 다양한 관제 : 주 왕조가 지방의 제후를 통치하는 데에 혈연의식과 천명사상을 동원하고, 전국토의 왕토사상을 이용하는 모습이 보임. 그저 점복과 군사를 이용하는 건 아님. 주대의 관제를 보면, 천자 아래 조정의 행정은 경사요의 장관인 태보와 태사가 천자의 고문과 행정을 수행하고, 천자가 어릴 경우에는 지도자역을 맡았다. 관직은 요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성립되고 있었다. 경사요-대사요-공족요 등의 관서가 그것이다. 경사요에는 장관 아래 사도가 토지와 부역을 관장하고, 사마는 군사를, 사공은 토목공사를, 사록은 호적과 봉록을, 사구는 형벌을 각각 분담하였다. 대사요에는 태재, 태종, 태축 등 주로 문관과 신관이 문서와 황실사무, 제사직을 관장하였고, 그 밑에 많은 속관이 있었다. 공족요는 주로 왕족과 귀족에 대한 업무를 장악하였다. 관리로는 대부분 귀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채읍으로 봉록을 받았으며 관직도 세습되었다.”(동양사개론)

   - 양경체제 : 삼감의 난 이후로 동도 설치. 양경체제로서 호경(‘종주’) - 낙읍(‘성주’, ‘신읍(新邑)’ 동방의 제2의 수도)

   - 감국제도 : 감국제도는 다음과 같다. 왕이 다스리는 지역이 있고, 지방에는 제후의 '국'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을 살피고 감찰하는 것. 제후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제도로서 감국제도가 있다는 것. 감국제도와 더불어 놀라운 사실은 의후측궤의 내용에서 의() 지방의 사정이 낱낱이 파악되어 있었다는 점. 그 외에도 토지조사 및 인민조사를 시행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최종적으로 농민에게서 조세를 걷기 위함이고, 봉건제도가 농업생산을 기초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이후 정전제의 시행이 진실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조세를 위함.(<<중국의 역사>>)

   - 군사제도 종주 6사, 성주 8사 : 호경을 종주라고 한다 했는데, 종주에는 주나라 사람으로 구성된 군대인 6사를 조직. 동도인 낙양에는 은나라 유민으로 성주 6사를 구성. 

 

  4) 서주시대의 평가 : 서주시대는 이상향으로 비춰지기도 함. 서주시기를 이상화하는 쪽은 유가 쪽 의견. 이 때의 이상향을 무조건 믿는다고 하여 '고신파'라고 함. 이에 반해 서주사를 비롯한 중국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비판적으로 보는 의고파도 있음. 의고파의 등장은 1920년대 신문화운동이 전개되면서부터. 그 대표자는 고힐강으로 그는 고전에 나오는 삼황오제를 사실로 보지 않고 신화로 취급. 그는 삼황오제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에 의해 꾸며진 전설이라고 고증하여 유교의 복고적 권위에 타격을 가하였음(동양사개론)

 

5) 서주의 쇠망 :  “9대 이왕(夷王) 때에 이르러 지방의 제후가 주왕실에 대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서로 공벌(攻伐, 공격하여 정벌함)을 일삼았다. 그러나 주왕실은 이미 이를 제재할 힘이 없었다. ... 민족간의 분쟁이 격화되었다. , 소왕(昭王)의 남방정벌과 목왕(穆王)의 서방정벌은 서북-남방민족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대외원정이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서북방의 융적의 침략은 위수 중하류를 향해 계속되면서 전국이 장기간에 걸쳐 전란에 빠지게 되었다.” 내부는 봉건제의 붕괴, 외부적으로는 이민족의 침입이 문제였던 것.

  기원전 841년 호경에서 국인[, 대부 등]의 반란. “내외의 문제는 다음 여왕(勵王) 때에 더욱 심각하여졌다. 특히 여왕의 포악한 정치와 남방 초나라에 대한 빈번한 원정으로 국력이 고갈되자 농민을 착취하고 영주가 소유하던 산림천택의 이권을 빼앗아 왕실소유로 하였다. 이에 귀족과 소영주까지 왕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자 마침내 수도 호경에서 국인의 반란이 일어났다.(기원전 841)” 이러한 국인들의 반란으로 여왕은 산서성으로 도망가고 조정은 국왕 없이 제후의 공동관리로 넘어갔는데, 이것을 공화정이라고 함

  선왕(宣王)의 뒤를 이어 그 아들 유왕(幽王)이 즉위하고 2년만에 관중에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와중에 유왕의 질성이 거듭되고, 신후의 태자 의구를 폐한 후 애첩인 포사를 왕후로 삼아 그 아들 백복을 태자로 하였다. 이에 대하여 신후는 불만을 품고 기원전 771년 정나라와 연합하여 북방의 이민족인 견융을 끌어들여 호경을 공격하고 유왕을 살해하였다. 이 때 주의 제후들이 의구를 옹립하니 이가 평왕이다. 그러나 평왕도 견융의 공격을 평정하지 못하고, 호경이 파괴되어 낙읍(낙양)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결국 기원전 770년 서주는 멸망하고, 동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동양사개론)

 

 

3. 춘추전국시대

  1) 제자백가 : 중국 철학의 시작점. 100가란 여러 선생들과 제자들까지 포함하여 100가.

  2) 춘추 : 노나라 공자의 역사서 <<춘추>>의 이름을 땄음. 춘추시대는 서주시대가 끝나고 동쪽(낙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시작됨. 그 무렵에 혈연질서가 무너지고, 예악이 무너지게 되면서 혼란의 시기가 시작된 것임. 예악이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되어버렸고, 힘 센 대부들이 경의 지위를 넘보기도 하는 사태에 이르렀음. 이미 예악의 시대가 아니라 힘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임.

  3) 공자 : 공자는 예악이 붕괴되는 현실을 목도함. 그래서 인(仁), 즉 사랑을 강조하여 '예'라는 것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으려고 시도했음. 나를 아끼는 마음을 넘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질서를 지키는 일을 강조하게 됨. 또한 나의 운명과 나의 의지를 합일시키는 사고방식, '대인은 운명을 만들어간다'는 식의 사고방식까지 나아간 것이 유가임. 고로 주나라 때의 천명사상보다 더 세련된 방식의 철학이 탄생하게 됨.

  4) 묵자 : 묵자는 '겸애'로 유명함. 이 겸애라고 하는 것은 도덕보다는 실용적인 문제에 가까움. 묵가 집단은 전국시대 초기 살육 속에 있었던, 군인집단으로서 평화의 시대를 만들고자 하였는데, 그것을 호혜관계로 해결해나가려 하였음. 호혜관계란 혈연 중심의 종법사회, 유가와는 달리 이익을 중심으로 결합한 것임. 고로, 서로 사랑하라는 그 의미는 서로에게 이익을 주라는 뜻에 가까움.

  5) 문화적 특징 : 전쟁에 보병과 함께 마차가 이끄는 전차부대가 출동하였음. 나중에 전국시대에는 이 수레 - 전차 싸움은 힘들어져서 보병+기마 부대로 전환.

 

 

 

* 출처 : 정인재 교수 중국철학사 강의, 이화여대 사회교육과 박민수 교수 강의, <<중국의 역사 - 선진시대>>, <<동양사개론>>,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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