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

[고려시대사 정리노트] 견훤의 후백제, 궁예의 후고구려~태봉

취미와 문화 2021. 5. 26.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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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 원종과 애노의 봉기는 결국은 전국적 농민 봉기의 기폭제가 되었고 지방세력 즉, 호족의 형성과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됨. 이 때 형성된 대표적인 지방세력 즉 호족으로는 북원의 양길, 죽주의 기원, 완산의 견훤, 양길의 부하 궁예, 경주 지방의 적고적 등.신라 말 고려로의 이행과정 교체과정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지방 세력을 우리는 '호족'이라고 부름.

  이들은 대체로 지방 토착세력으로서 대토지를 소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키운 경제력으로 무력 즉, 군사력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 이들은 주로 '성주'나 '장군'들을 스스로 칭하면서 지방사회를 통치하고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갖추었음.

 

1. 견훤 : 견훤이라는 사람은 전라도 지역 무진주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음. 이 견훤이 후백제를 지음(900).

           견훤의 부친께서는 상주에 살던 아자개라는 농민. 농민의 아들인 견훤은 서남해 지역에서 신라 왕실 아래에 호족들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중앙군(방수군)과 새로 아래에 들어온 이들을 합쳐 독자적인 대호족으로 성장하였음. 

신라와 당이 백제를 무너뜨렸으니, 내가 이제 의자왕의 오랜 분노를 갚겠다[설의자숙분(雪義慈宿憤)].’ -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견훤

전주지역, 당시 지명은 완산주. 완산주 - 이게 지금의 전주. 전주인 완산주에다가 도읍하고 후백제 건국. 그 당시 중국은 5대 10국. 그 중 후당, 오월 등 나라들과 서로 간에 교역하면서 친교 관계. 그리고 저 북쪽에 있는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켰지만 그 나라도 수교.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과도 교류하였으니, 해상세력이 상당히 융성했음.

 

2. 궁예 : 출신 불명. 신라 귀족의 후예로 추측되고 있음. 죽주지방에서 기훤이라고 하는 호족세력에게 투항을 해서 힘을 발휘한 다음에 다시 북원의 양길에 의탁. 궁예는 양길 휘하에서 원주, 영월, 강릉, 강원도지역을 공략하면서 화천, 철원 지역을 점령. 그리고 마침내 양길을 치고 901년 개성, 송악(개성)에 도읍을 하게 됨. 그리고 강원도 경기도 지역을 지배하게 되고, 궁예 역시 광평성, 병부, 대용부 등 관부를 설치하고 정광이나 원보, 대상과 같은 새로운 관계를 마련하는 등 오롯한 국가로 건국.

 

... 양길의 신임을 받은 궁예는 강원도와 경기도, 황해도까지 세력을 넓힌 후 양길을 치고 스스로 독립하였다. 이후 궁예는 스스로 왕이라 하고, ‘신라가 당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였기 때문에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오필보기수(吾必報其讐)]라고 말하였다. - 삼국사기 열전, 궁예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옛 고구려 지역에 있었던 그 지역의 백성들에게 내가 고구려 원수를 갚겠다는 유민의식, 노스텔지어를 자극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는 것. 즉, 이 지역 사람들 또한 신라왕조에 모순과 왜곡된 사회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하는데 기왕이면 내가 살고 있던 지역의 옛 왕조가 부활되면 좋겠다. 라고 하는 궁예의 선동에 호응하게 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함.

 

1) 후고구려 건국(901) : 궁예는 처음에는 죽주지역의 기훤에게 의탁해있다가, 다시 세력을 강원도에서 철원쪽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당시 원주 북원경에 있던 양길이란 인물의 휘하에 있게 됨. 궁예는 이로부터 독립하여 ‘후고구려’를 세움.(901년) 당시 궁예에게 재정적 뒷받침을 해 주었던 호족이 될 법 직한 상인 왕륭이라는 자의 아들 왕건이 있었음. 궁예는 왕건의 주 거점이었던 송악[지금의 개성[에 도읍하고 나라를 세웠으니 그 나라를 ‘후고구려’라고 한 것임.

 

2) 나주 전투(903) : 왕건은 선단을 가지고 있었음. 그래서 궁예는 왕건 후백제의 후방 쪽에 전라도 나주 쪽을 급습하게 하였음. 결정적으로 후백제 해상무역 중심지인 전라도 나주지역을 공략한 것이 나중에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게 되는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나주지역을 공략함으로써 서남해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기 때문.

 

3) 철원 천도 :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고, 궁예의 본거지 철원으로 후고구려의 수도를 이전. 이 때의 연호는 ‘무태’, ‘성책’.

 

4) 마진, 태봉 국호 사용 : 904년부터 마진 국호를 사용했고, 911년에는 '마진'에서 '태봉'으로 이름을 바꾸었음. 태봉시기의 연호는 ‘수덕만세’, ‘정개’ 등의 연호를 썼음. 하여튼 이렇게 마진과 태봉을 세우면서 후 고구려는 여러 가지 관제도 만들고 마진 때부터 있던 관제인데 - 광평성이라는 관청도 설치. 관등제도 만들었는데, 신라는 17 관등이었는데 반해, 태봉은 9관등제였습니다. 또한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골품제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제를 모색했음.

  어차피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이 태봉의 정치제도를 차용하였기에, 태봉의 제도는 중요함. 태봉의 최고 관부는 광평성이었음. 이에 904년(마진시기 ~)에 이루어진 중앙정치조직 정비를 광평성체제의 성립이라고 함.

新 羅 신 라 摩 震 마 진 高 麗 고 려     
官 府 관 부 序 列/官 府 서 열/관 부 官 府 관 부 所 管 業 務 소 관 업 무


(1) 廣評省 (1) 광평성



兵 部 병 부 (2) 兵 部 (2) 병 부 (兵 部) (병 부) 掌武選·軍務·儀衛·郵驛之政 장무선·군무·의위·우역지정
倉 部 창 부 (3) 大龍部 (3) 대룡부 倉 部 창 부 掌戶口·貢賦·錢粮之政 장호구·공부·전량지정
禮 部 례 부 (4) 壽春部 (4) 수춘부 禮 部 례 부 掌禮儀·祭享·朝會·交聘·學校·科擧之政 장례의·제향·조회·교빙·학교·과거지정
領客府 령객부 (5) 奉賓部 (5) 봉빈부 禮賓省 례빈성 掌賓客燕亭 장빈객연정
左·右理方府 좌·우리방부 (6) 義刑臺 (6) 의형대 刑 部 형 부 掌法律·詞訟·詳讞之政 장법률·사송·상얼지정
(7) 納貨府 (7) 납화부 大府寺 대부사 掌財貨廩藏 장재화름장
調 府 조 부 (8) 調位府 (8) 조위부 三 司 삼 사 掌摠中外錢穀出納會計之務 장총중외전곡출납회계지무
(9) 內奉省 (9) 내봉성



(10) 禁書省 (10) 금서성 秘書省 비서성 掌經籍祝疏 장경적축소
例作府 례작부 (11) 南相壇 (11) 남상단 將作監 장작감 掌土木營繕 장토목영선
船 府 선 부 (12) 水 壇 (12) 수 단 水 部 수 부 掌山澤·工匠·營造之事 장산택·공장·영조지사
詳文師 상문사 (13) 元鳳省 (13) 원봉성 翰林院 한림원 掌制撰詞命 장제찬사명
乘 府 승 부 (14) 飛龍省 (14) 비룡성 太僕寺 태복사 掌輿馬廐牧 장여마구목
物藏典 물장전 (15) 物藏省 (15) 물장성 小府監 소부감 掌工技寶藏 장공기보장
(16) 史 臺  (掌習諸譯語) (16) 사 대  (장습제역어)



(17) 植貨府
 (掌裁植菓樹)
(17) 식화부
 (장재식과수)




(18) 障繕府  (掌修理城隍) (18) 장선부  (장수리성황)



(19) 珠淘省
 (掌造成器物)
(19) 주도성
 (장조성기물)




(출처 : 신편한국사, 한글 번역은 취미와 문화가 덧붙임)

 

896년~904년, 즉 태봉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까지가 광평성이 최고, 한편 904~918년까지 왕건에 의해 궁예가 축출될 때까지 체제의 개편이 있었을 것. 궁예는 896년 철원을 첫 도읍으로 정하였을 무렵 나라를 열고 임금을 칭할 수 있겠다고 자부하면서 처음으로 중앙과 지방의 관직을 두었음. 이후 계속 제도가 바뀌고 정비되어 왔을 것.

 궁예는 904년에「百官(백관)」을 두고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로 하였음. 그리고 광평성과 병부를 설치한 것이죠. 병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곧 후삼국 시기에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 부서가 필요했다는 것.

 

  광평성은 신라의 집사부에서 이어진 것으로 해석됨. 한편 내봉성이 있는데, 그것은 왕명을 직접받드는 기관(마진~태봉 시기에는 그리 높지 않은 순위로 확인됨).

고려 초의 인사행정 양상을 보면 태봉의 사람들을 기반으로 하고있었음. 서열 1위인 것이 광평성인 것은 변함없으나, 내봉성이 2위로 급상승. 그만큼 정치적 비중이 늘어났다는 . 그리고 순군부라는 시위부대를 904년 이래 신설한 것으로 보임.

序列/官府 서렬/관부 長 官 장 관 次 官 차 관 下 級 職 하 급 직
1) 廣評省 1) 광평성 侍中(韓粲 金行濤) 시중(한찬 금행도) 侍郞(閼粲 林積璵) 시랑(알찬 림적여) 郞中(前徇軍部郞中
韓粲 申一)
   (前徇軍部郞中
   韓粲 林寔)
員外郞(前廣評史 國鉉)
랑중(전순군부랑중
한찬 신일)
   (전순군부랑중
   한찬 림식)
원외랑(전광평사 국현)
2) 內奉省 2) 내봉성 令(韓粲 黔剛) 령(한찬 검강) 卿(前守徇軍部卿 能駿)
 (倉部卿 權寔)
경(전수순군부경 능준)
 (창부경 권식)
監(前廣評郞中 康允珩)
理決(前廣評史 倪言)
評察(內奉史 曲矜會)
郞中(前內奉史 劉吉權)
감(전광평랑중 강윤형)
리결(전광평사 예언)
평찰(내봉사 곡긍회)
랑중(전내봉사 류길권)
3) 徇軍部 3) 순군부 令(韓粲 林明弼) 령(한찬 림명필)



4) 兵 部 4) 병 부 令(波珍粲 林曦) 령(파진찬 림희) 卿(閼粲 金堙)
  (閼粲 英俊)
경(알찬 금인)
  (알찬 영준)


5) 倉 部 5) 창 부 令(蘇判 陳原) 령(소판 진원) 卿(閼粲 崔汶)
 (閼粲 堅術)
경(알찬 최문)
 (알찬 견술)


6) 義刑臺 6) 의형대 令(韓粲 閻萇) 령(한찬 염장)



7) 都航司 7) 도항사 令(韓粲 歸評) 령(한찬 귀평) 卿(林湘煖) 경(림상난) 904년 이후 태봉 기구도 복원
8) 物藏省 8) 물장성 令(韓粲 孫逈) 령(한찬 손형) 卿(姚仁暉) (香南) 경(요인휘) (향남)
9) 內泉部 9) 내천부 令(蘇判 秦勁) 령(소판 진경)

10) 珍閣省 10) 진각성 令(波珍粲 秦靖) 령(파진찬 진정)

11) 白書省 11) 백서성

卿(一吉粲 朴仁遠)
 (一吉粲 金言規)
경(일길찬 박인원)
 (일길찬 금언규)
12) 內 軍 12) 내 군

卿(能惠)
 (曦弼)
경(능혜)
 (희필)

(출처 : 신편한국사, 한글은 취미와 문화 편집)

 

광평성의 성격을 보면, 이게 행정기구로서 국정 논의 기구이긴 하나 문벌귀족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했음. 국정을 논의한다는 것은 왕을 돕는다는 것인데, 문벌귀족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두 기능이 모순적이라는 것. 901~904년 간 마진시기에는 아직 호족들을 궁예가 제압을 못한 상태라는 이야기. "그래서 2위 기구로 내봉성이 904년 이후로 2위 기구로 격상한 것이죠. 내봉성은 ‘내’라고 하여 왕과 직접적인 기관이나, 인사권까지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궁예가 드디어 조직에 대한 장악력이 강해졌다는 것입니다. 부가적으로 궁예가 자신의 친위부대인 순군부를 설치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병부보다 지위가 높다는 것입니다."(장준호, 한국제도사 강의)

 

 

[왕건의 성장 - 고려의 성립]

1. 910 나주 전투 : 궁예의 아래에 있던 왕건이 거느리고 있던 선박들을 이용하여 후백제의 후방을 찌르려는 시도. 서남해안 해상무역권 장악.

2. 925 조물근 전투

* 927 포석정 사건(신라 경애왕이 후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피살)

3. 927 공산(성) 전투(대구 팔공산 고려 왕건이 후백제에 패배)

4. 930 고창(안동) 전투(안동 고려 왕건의 승리)

5. 934 운주 전투

6. 935 신라항복(경순왕이 항복)

* 935 후백제 신검의 반란

7. 936 일리천 싸움(신검 진압) - (뿌리깊은 한국사 - 고려시대 편.)

 

이 즈음부터 궁예가 미쳐가기 시작함. 결국 그래서 918년에 많은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은 왕건이, 당시 광평성 시중이 궁예를 축출하게 됨. 그렇게 철원에서 고려가 성립됨.(918년)  이듬해 왕건이 다시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겼음. 왕건은 불안한 고려의 내부 안정을 위해 '중폐비사(重幣卑辭)' 작전을 썼는데, 나를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저자세 외교 방식이었던 것. 

 

八月 己酉(8월 기유) 諭群臣曰(여러 신하들에게 타이르기를(諭)), “朕慮(짐이 우려하기를,)諸道寇賊(각 도(도처)의 도적(구적)들이) 聞朕初卽位(짐이 처음 즉위했다는 것을 듣고는), 或構邊患(나라(或)를 음해하여 변방이 걱정된다). 分遣單使(단사를 나누어 보내), 重幣卑辭(중폐비사-넉넉한 선물과 겸손한 말을 하라), 以示惠和之意(존중(惠)과 화친을 나타냄으로써 말이다).” - 고려사 권 1 세가, 태조 원년

 

이 중폐비사 정책은 견훤에게는 일단 먹히지 않았음. 견훤은 신라에 대해서 적대적이었는데 결국 둘이 부딪칠 수 밖에 없었음, 927년에 견훤은 신라를 쳐들어갔음. 포석정이라는 곳에서 경애왕이 있었는데, 거기에 쳐들어가서 신라 왕을 살해하였음.(포석정 사건) 927년에 포석정에서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즉위시켜 버린 것임.

경애왕은 죽기 전에 고려에 도움을 요청한 바 있음. 왕건의 지원군과 견훤의 군대가 서로 맞붙게 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공산성(대구에 팔공산)이었음.(927년) 이 싸움에서는 후백제의 승리. 왕건은 크게 위축되었음.

왕건은 고려를 재정비하고 3년 뒤 고창에서 견훤군과 맞붙는데, 고창은 지금의 안동지역. 고창전투에서는 고려가 승리.

 

4년(930년) 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항복하니, 태조가 그를 후한 예의로 대하고 상보(尙父)라 일컬었다. 앞서 태조가 신라와 우호를 통하려고 할 때 선필이 이를 인도하여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복한 것이다. 그가 공이 있고 또한 나이가 많은 점을 생각해, 그를 총애하고 칭찬한 것이다. 태조가 견훤(甄萱)과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 아래에서 싸웠는데, 크게 이겨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들이 매우 많았다. 영안(永安)·하곡(河曲)·직명(直明)·송생(松生) 등 30여 군현(郡縣)이 차례차례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降髙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尚父. 初太祖將通好新羅, 善弼引噵之, 至是降也. 念其有㓛且老, 故寵褒之. 太祖與甄萱戰古昌郡甁山之下, 大捷, 殺虜甚衆. 其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降於太祖.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2 경순왕

 

926년에 망했던 발해 유민이 934년에 고려 쪽으로 귀순. 왕건은 포용. 그리고 935년 신라 경순왕이 왕건에게 투항. 같은 해에 후 백제에서 견훤은 큰아들 신검이 후계자 계승에 배제된 것을 불만으로 삼아,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둬버리고 왕이 되어버림(‘신검의 반란’)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이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였음.

936년에 드디어 마지막으로 후백제의 신검과 붙었으니, 이것이 일리천 전투. 일리천은 구미 지역. 여기에서 왕건이 또 한 번 승리를 거두고 신검을 몰락시킴. 

 

* 참고 : 2018 김정현 한국사 종합완성, 장준호 - 한국제도사 강의, 신편한국사, 뿌리깊은 한국사 - 고려시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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