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

후삼국 시기의 배경

취미와 문화 2021. 12. 1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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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골품제도의 동요

1. 지배계급의 분열 문제 : 왕위쟁탈전의 전개

 

  1) 혜공왕 4768대공의 난 : 우선 혜공왕 초기부터 애초에 귀족들의 반란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혜공왕 4(768) 대공(大恭)의 난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혜공왕 초년의 왕당파들에 대하여 귀족세력들의 정치적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2) 혜공왕 4768(?) ‘96 각간의 난

  3) 혜공왕 16780김지정의 난: 이 과정에서 왕이 피살됩니다. 

  4) 헌덕왕 시기 - 김헌창의 난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난 김주원은 원성왕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의 강릉지역인 당시 명주라는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김주원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아들 김헌창이 헌덕왕 때 난을 일으켰습니다

 

[헌덕왕 14년(822)] 3월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年號)를 세워 경운(慶雲) 원년이라고 하였다. 무진(武珍)⋅완산(完山)⋅청주(菁州)⋅사벌(沙伐)의 네 주 도독과 국원경(國原京)⋅서원경(西原京)⋅금관경(金官京)의 사신(仕臣)과 여러 군현 수령을 위협하여 자기 소속으로 삼으려 하였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은 몸을 빠져 나와 추화군(推火郡)으로 달아났고, 한산주(漢山州)⋅우두주(牛頭州)⋅삽량주(歃良州)와 패강진(浿江鎭)⋅북원경(北原京) 등은 헌창의 반역 음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 삼국사기

 

  김헌창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 웅천주(지금의 공주)입니다. 결국 김헌창의 난은 진압됐는데, 김헌창의 아들 김법문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의 근거지는 여주 고달산이었는데 고달산을 근거지로 난을 일으켰다가 지금의 서울, 북한산까지 먹었던 인물입니다.

 

2. 6두품의 도전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경주 최 씨이면서 6두품출신이면서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을 대표합니다. 이런 6두품들은 신라의 17관등 중에서 제 6위 아찬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가령 최치원은 12세의 어린나이에 당 빈공과에 급제하고 신라의 귀국해서 자기의 뜻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신분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럴 수 없었습니다.

 

3. 대토지겸병과 전장의 확대

일반 백성들이 새로운 땅을 개척해봐야 권력에 의해서 그 토지를 뺏기게 되고 강점당하게 되고 또 일반백성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귀족에게 고리의 이자를 대면서 돈을 빌리게 되고 또 그 대가로 토지를 뺏기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지방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에 비해서 중앙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촌락에 대한 장악 기능이 상실되게 되겠죠.

두 번째, 이렇게 귀족들뿐만 아니고 사원의 전장 또한 문제가 됩니다. 불교의 사원이 대토지를 소유하여 전장 경영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신라 하대 사원들의 대토지겸병은 결국은 국가의 토지질서를 문란하게하고 국가 재정을 고갈시킴으로써 신라를 멸망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귀족들의 토지겸병, 사원의 전장 확대 등은 결국 농민의 불안한 삶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고, 이에 따라서 농민들이 봉기하는 현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원종과 애노의 봉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성여왕 3889년에 발생하게 됩니다. 이 원종과 애노의 봉기 다음 46년 만에 신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眞聖王] 三年, 國內諸州郡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所在盜賊蜂起. 於是元宗⋅哀奴等㩀沙伐州叛, 王命奈麻令竒捕捉. 令竒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力戰死之. 王下勑斬令竒, 祐連子年十餘歲, 嗣爲村主. - 『三國史記』卷11, 「新羅本紀」11 眞聖王 3年
[진성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州)⋅군(郡)에서 공물과 조세를 보내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봉기했다. 이에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沙伐州)를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나마(奈麻)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붙잡아 오도록 하였다. 영기가 적의 보루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촌주(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의 목을 베고 나이 10여 세 우련의 아들에게 촌주직을 잇게 하였다. -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11 진성왕 3년

 

이러한 원종과 애노의 봉기는 결국은 전국적 농민 봉기의 기폭제가 되었고 지방세력 즉, 호족의 형성과 성장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대표적인 지방세력 즉 호족으로는 북원의 양길, 완산의 견훤, 양길의 부하 궁예 등을 뽑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등장한 신라 말 고려로의 이행과정 교체과정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 지방 세력을 우리는 호족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대체적으로 지방 토착세력으로서 대토지를 소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키운 경제력으로 무력 즉, 군사력을 가지고 지역사회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성주나 장군들을 스스로 칭하면서 지방사회를 통치하고 독자적인 지배기구를 갖추게 됩니다.

이처럼 호족들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중앙정부의 비견되는 자체적인 행정조직도 구성하게 됩니다. 이러한 중앙정부에 비견될 행정조직을 갖고 있는 호족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정한 지역을 점거하고 세력권을 형성한 독립적 존재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견훤과 궁예라고 하는 큰 세력과 결합되어 신라를 멸망시키고 후 삼국, 삼국통일전쟁을 통해서 고려건국을 이끄는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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