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

조선후기 탕평정치 설명틀 - 임오의리

취미와 문화 2023. 1. 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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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라는 일종의 곡식 담는 상자에 갇혀 사형당했다.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고 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정치 견해들과 인물들을 최대한 줄이고, 연도도 대충 영조-정조 시대로 단순화하여 살펴보자.

(... 정리중)

 

조선 후기 : 인 - 명 - 선 - 광 - 인 - 효 - 현 - 숙 - 경 - 영 - 정 - 순 - 헌 - 철

 

이 조선후기에서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먼저 이 시기를 이해하려면, 조선후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조선후기는 청나라에 의해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성리학적 세계관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선비들이 위기의식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무너진 성리학 질서를 다시 보수하려는 과정에서, 점점 더 성리학은 단단하게 조선 사람들을 옥죄어갔다. 양반관료들은 진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건 트라우마적으로 거부하게 되었다.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도 각 가문마다 질서와 전통을 더더욱 강조하며 여인들을 더 강하게 억압하는 꼴이 되었다.

 

[현종 시기 예송]

숙종 이전에 예송논쟁이 있었다. 예송은 효종, 효종비가 각각 죽었을 때, 인조의 계비(새로 들인 중전) 장렬왕후가 얼마나 길게 상복을 입게 되는가의 문제이다.

 

문제는 효종 위에 ('청나라에 들어온 신문물들과 친한 것'으로 유명한, 효종의 형) 소현세자가 죽었고, 동생인 둘째 효종이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다. 왕은 원칙적으로 장자가 물려받는다. 그렇다면 효종을 장자로 인정할 것인가? 

 

1. 기해예송 때는 효종이 죽었을 때 일어났다. 인조 비가 얼마나 입어야 할지, 의례서인 <<국조오례의>>에 나오지 않았기에 군신 모두 곤란했다. 남인의 (형인 소현세자가 죽었으니) 윤휴는 효종을 장자로 인정하여 3년복제, 서인의 송시열은 효종이 차자이며, <<경국대전>>에 적자가 아닌 경우['서자(庶子)일 경우 상복제' = '중자(적장자 아닌 아들, 衆子)일 경우 상복제'로 보면 된다]로 보고 1년복제를 주장한 것이다. 결과는 어설프게나마 근거가 있는 서인 송시열의 승리.

남인은 탈락, 서인은 득세했다.

 

2. 갑인예송 때는 효종비가 죽었을 때 일어났다. 이번에는 <<경국대전>>에 장자의 아내, 장자가 아닌 아들의 아내가 죽었을 때의 상복 기준이 나와 있었다. 이번에는 인조 계비가 서인 말에 따라 상복을 9개월 입느냐, 남인 말에 따라 1년 입느냐의 문제였다. 기준이 나와 있는 이상, 문제는 명확했다. 9개월복을 선택하면 효종은 적장자가 아닌 것이고, 1년복을 선택하면 효종은 적장자다. 현종은 여러 신하들과 장인어른 등의 의견을 묻고 결국 남인의 손을 들어준다.

 

이로써, 남인 집권으로 현종 시기는 막을 내린다.

 

어떻게 겨우 '옷 입는 것' 따위가 한 정치 세력의 흥망을 결정할 수 있었던 걸까?

분명 논쟁에서 패배한 상대 진영을 '무지한 것들' 취급하는 신경전이 있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치명적인 요인으로 '성리학 질서가 양란 이후 극도로 경직된 것'이 지적된다.

 

전통 동아시아 세계의 성리학 질서, '예'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말하는 '법'보다 상위 개념이다.

법은 본디 왕 또는 황제가 정하는 것이지만, 예라고 하는 것은 천하의 질서를 본뜬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천하의 질서는 병자호란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즉, 오랑캐의 왕을 황제로 인정하고 만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버리듯, 조선 왕이 천자를 버리고 오랑캐를 받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성리학을 기초로 세운 조선의 백성들은, 윗사람들도 지키지 않는 '천하의 질서'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문이 발생하는 것 자체가 조선의 정치가들, 선비들에겐 치명적인 위기였다.

정치가들의 위기감은 '누가 어떻게 천하의 진리를 수호할 것인가'라는 경쟁의식으로 연결되었다.

 

그런 맥락의 부산물이 바로 예송논쟁이었다.

 

 

[숙종 시기]

숙종은 환국 정치를 통해, 서인(소론, 노론), 남인 세력을 좌지우지 했다.

 

1. 경신환국 : 예송논쟁에서 승리 후 허적을 필두로 남인이 중앙 군사 통제에 간섭하는 요직(도체찰사)을 차지한다. 남인은 승승장구였다. 서인 세력은 남인의 정치가 선을 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몇몇 서인 인물들이 남인이 뭐 하나 잘못하길 주시하며 꼬투리잡고 공격했다. 결국 허적이 집안 잔치를 열 때 왕실에서 쓰는 유악(기름장막)을 마음대로 꺼내 썼다. 당연히 군신 간 질서가 철저했던 조선에서는 충분히 탄핵감, 사형감이 된다. 이 과정에서 서인이 호시탐탐 권력만 쫓아 타 진영의 허물만을 찾아 공격하는 모습에 실망한 이들이 있었고, 서인 내에서 논란이 일어나게 된다. 

서인 몇몇 인사들의 추한 남인 공격에 비판적인 서인들은 소론, 대내외적인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서인 집권을 우선시하는 노론으로 갈라졌다.

 

2. 기사환국 : 남인을 배경으로 한 희빈 장씨가 숙종에게 예쁨받고, 세자를 낳지 못한 인현왕후가 쫓겨났다. 이로써 남인이 재집권한다. 이 과정에서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이 사망한다.

 

3. 갑술환국 : 희빈 장씨가 나쁜 짓을 하다가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면서, 남인 세력이 권세를 잃는다. 인현왕후가 돌아오고, '동이'로 유명한 숙빈 최씨가 서인들을 배경으로 왕실에 세력을 키우게 된다. 숙빈 최씨가 숙종과 낳은 아들이 연잉군. 훗날 영조이다.

 

- 경종은 숙종 때 희빈 장씨의 아들이다. 몸이 약한 건지, 정신이 혼미한 건지. 여러모로 건강이 안 좋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왕이었다. 그래도 정식 세자로서 왕실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법도 아닌가? 법도를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소론은 이쪽을 지지하게 된다.

 

- 영조는 경종 다음 왕이다. 왕이 되기 이전에는 '연잉군'으로 불렸는데, 숙종이 세자인 희빈 장씨의 아들은 영 불안했는지, 죽기 전에 갑자기 서인 노론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갑자기 죽은 서인 노론의 거두 송시열이 생전에 서인 소론 윤증과 붙었던 문제를 다시 거론하여 송시열 편을 들어준다거나(병신처분), 정신이 불안정한 세자(훗날 경종)에게 대신 일을 보게 하거나, 넌지시 노론의 인사인 이이명을 불러 세자의 병환에 대해 한탄하거나. 정황상 숙종도 내심 연잉군에 마음이 가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노론은 영조를 지지하게 된다.

 

 

[경종 시기]

문제는 경종이 세자에서 왕으로 올랐고, 경종이 살아 왕위에 있을 적에 노론은 영조가 경종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왕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를 신하들이 논한다는 것은 거의 반역이다. 그러므로 많은 노론들이 죽거나 옥사를 치렀다. 그것이 바로 신축옥사와 임인옥사. 합쳐서 '신임옥사'라고 한다.

 

신임옥사는 노론과 영조의 정당성을 항상 위협하는 사건이다. 소론 세력은 궁궐 안에서나 밖에서나, 계속 영조를 이 문제로 괴롭혔다. 영조는 궁궐의 암묵적인 룰을 깨버린, 실질적 반역자라고.

 

[영조 시기]

경종이 죽고, 영조가 오르는 것은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신임옥사의 뒤처리를 하는 과정이 참 어려운 일이었다.

신임옥사 때 죽은 노론 인사들을 다시 복권시키는 과정에서, 노론 눈치도 봐야 하고, 소론 눈치도 봐야 하고.

노론이 너무 거만해졌길래, 소론으로 다시 인사를 꾸렸더니 노론들을 완전히 묵사발 내려 했다.

극단의 극단으로 치달은 이 상황.

영조는 온건한 '완론' 인사들을 중심으로 인사를 꾸려 이 갈등을 타개해보려 했다.

문제는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이 급변하는 정국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소론과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결국 노론과 소론의 갈등, 탕평과 준론의 갈등, 남당(반 세자)과 북+동당(친 세자)의 갈등 등은 사도세자의 문제로 다시 불거지게 되고, 영조는 결국 정치적 판단 아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다.

 

1) 사도세자 자체가 탕평 정국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2) 반 세자 세력이 '세자가 신임옥사에 찬성하여, 노론을 적대한다'라는 이간을 했다.

3) 사도세자의 정신적 병세가 악화했다.

 

이것을 '임오화변'이라고 부른다.

임오화변은 영조의 정치적 정신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영조는 왕실을 위해 부성애를 포기하는 것으로 '영조의 임오의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죄인의 아들'이 된,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훗날 정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인다.

 

[정조 시기]

정조는 막 즉위했을 떄,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모 대중 역사작가가 강조한 적이 있었다.

정조는 그런 멍청이가 아니다.

이 메세지의 전체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내가 비록 사도세자의 아들이나, 효장세자의 아들로 들어갔으니, 이제 임오화변에 대해 따지지 않겠다.'

고로, 정조 초기에 '영조의 임오의리'를 깰 만한 기반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점차 정조는 장용영 설치, 수원화성 건축, 준론탕평 정책을 통해 많은 인재 등용 등.

왕위에 오른 이후 계속해서 탄탄한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그 뒤에야 노론들에 의해 희생된 소론들과 남인들을 복권하고, 인재들을 등용하게 된다.

그런 연후에야 정조는 '영조가 사실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괴로워하고, 아들을 그리워했다'는 내용을 담은 <<금등>>을 공개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여러 역신(逆臣)들 때문에 잃었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는 사실 국가의 무예와 민생을 염려하는 왕의 씨앗이었다고.

 

[영조와 정조의 임오의리]

그래서 '영조의 임오의리' 위에 자신만의 '임오의리'를 덧씌운 정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그가 꿈꾸는 것은 왕실권위의 회복이었던 것 같다.

역신들은 곧 상대를 죽이려 드는 극단파들이요,

진정한 임오의리를 아는 자들은 정조와 함께 조선의 질서를 바로잡는 이들이다.

그 과정 중에 사도세자의 복권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정조는 순조가 성년이 되었을 때, 왕위를 넘겨주고, 자신은 수원화성에서 생부인 사도세자를 기리며 살고자 했다.

사도세자의 완전한 복권은 '영조의 임오의리'가 아직은 강렬하게 남아있는 탓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자신의 임오의리가 덧씌워지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열린 순조 시대는 외척과 각종 권신들의 세도정치가 판을 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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