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

조선 후기 18~19세기사 - 성리학 vs 천주교 vs 동학 설명틀

취미와 문화 2023. 1. 20. 01:52
반응형

종교에서 신은 잘못이 없다.
단지 믿는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다.
성리학이든, 기독교든 간에 시대에 따라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다.
최소한 근대 초의 기독교는 비-기독교 국가에서는 악마임이 분명했다.

1. 성리학으로서 통치 : 성리학에서 통치란 곧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이다. 질서정연하게 하기 위한 학문이 곧 성리학이었고, 성리학이 곧 질서였다. 영-정조 시대부터 세도정치기까지는 서양세력의 출몰이 잦아지게 되는데, 천주교의 등장이 대두된 것이다.
천주교는 다양하게 받아들여졌다. 서학이란 이름의 기술이자 철학으로, 한편으로는 천주교라는 종교로 말이다. 천주교를 처음 접했을 때 조선의 선비들은 '서학은 유용하다', 혹은 '흥미진진하다'라는 반응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진다. 바로 진산사건, 즉 윤지충 사건이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윤지충이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신주를 불태워 버렸다.

미친 놈... 아니 그것도 아닌 무언가였다.
윤지충이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들은 수령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수령은 스스로 뭔가 조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사태에 대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도관찰사 역시 마찬가지.
결국 조정까지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에 윤지충이란 이름이 갑자기 폭증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왕 정조마저 분노가 아닌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다.

제사는 부모님, 그 위의 조상님을 모시는 행위이다.
당연히 제사를 지내는 큰집의 장자는 재산을 모두 물려받는다는 데에서 경제적 의미가 있고, 친척들이 모여 술도 마시고 제사음식도 먹는 잔치라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효, 인륜을 스스로 되새기는 정갈한 의식이다.
돌아가신 부모님께도 효와 인륜을 다하겠다는 의식이다.
이로서 조선이란 국가에 질서가 존재하게 된다.
인륜을 저버리는 인간은 이 질서 밖의 존재로서, 인간이 될 수 없다.
이 제사라는 의식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존재는 조선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
조선에서 아무리 조정에 불만을 가진 역적, 역도들이 등장했어도, 그들은 인륜마저 저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정약용이라는 선비의 집안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니?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정조 시대에 천주교가 확산되어가면서, 이 선교사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접수된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선교사에 현혹된 백성들이 제사 거부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

천주교는 '학문'이라는 이름을 달고 들어온, 폭탄이었다.


2. 천주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사랑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기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교회 기구가 있는 것을 천주교, 그 교회 기구에서 떨어져 독립한 것이 개신교다.
이것들을 통틀어 우리는 기독교라고 말한다.

다만 우리가 사랑을 한다고 할때, 뭔가 잘못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친구에게 잘해주려고 했던 건데, 아빠한테 잘하려고 했던 건데, 엄마한테 잘해주려 했던 건데, 동생한테 좋은 마음으로 말해주려고 했던 건데, 연인한테 잘해주려 했던 건데… 그들이 나를 미워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럴 땐, 내가 준 사랑이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던 건가 반성하곤 한다.
아, 내가 너무 나를 중심으로 생각했구나.
그들이 내가 생각하는 사랑과 호의를 받아줄 준비가 안 됐구나.
그런 반성도 여러 경험 속에서 가슴 아파 하면서 얻어가는 것이다.

아쉽게도 근대의 기독교는 참 오래된 것이지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역사적 경험이 부족했다.
침략적 선교가 한창이던 시기.
서양중심의, 서양식 국뽕을 그대로 머금은 천주교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이들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미개인들… 미개해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군.”

마치 고백을 받아주지 않는 여자/남자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너 따위가 날 거부해?”
이런 입장 아닌가.

본래 동아시아 천주교 선교는 예수회라는 전투적인 선교를 하는 집단이 맡았다.
예수회는 현대 한국에도 천주교에서 정치운동을 할 때 자주 개입을 하곤 했다.
청나라 강희제 이전,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 이전에 동아시아에 파견된 예수회 신부들은 굉장히 학식있고, 동양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
그들은 선교를 하기 위해 그렇다지만, 동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성리학에 대해서도 꽤 많은 연구를 했다.
동양 사람들의 철학을 보충하고, 토론하고, 때론 동양 사람들의 철학을 공부해보기도 하고.
서양에 좋은 게 있다면 동양 사람들에게 선보여보기도 하는 한편, 동양 사람들이 좋아하던 것에 참여해보기도 하고.
그렇기에 그들은 동양 사람들에게 '서양의 선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던 와중 변수가 생겼는데, 바로 '전례문제''였다.
그 당시 예수회의 선교 방식에 불만을 가진, 서양식 국뽕을 가진 선교사들이 있었다.
"어디 감히 '제사' 같은 우상숭배를 할 수 있느냐고."
결국 그 선교사들은 예수회를 교황청에 고발했다.
그 결과 예수회는 동아시아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프란치스코 회, 도미니크 회 등이 채우게 되었다.

이들은 프란치스코 회, 도미니크 회는 유럽의 중세 후기 이단 척결이 한창이던 때에 부흥하던 이들이다.
그러므로 참 꼬장꼬장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유럽에서는 프랑스 혁명 등을 위시로 하여, 애국주의, 민족주의가 발흥하게 된다.
유럽의 민족주의는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완전히 원주민 노예 밭으로 만들었다.
'민족부흥'을 넘어선 침략적 민족주의의 탄생이었다.(이 글에서는 이 침략적 민족주의를 "국뽕"이라고 표현하겠다.)

어쨌건, 이렇게 새롭게 온 선교사들은 국뽕에 가득찬 유럽 젊은이들이 많았다.
20대~30대의 젊은 선교사들은 '이 미개한 동양인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선교를 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그렇다치고, '제사' 같은 것도 우상숭배라며 폐기한다.

동아시아 세계, 특히 성리학 사회에서 제사라는 사실은 '효', '인륜'을 자기 스스로 확인하는 의식이다.
그런데 그 제사의식을 버린다?
그건 '미친 놈', '실성한 놈'을 벗어난 경지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짐승도 제 어미를 아는데, 어떻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럴 수 있나?
그렇기에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동아시아 국가 지도부, 선비들은 새롭게 도래한 선교사들을 혐오했다.
동아시아 선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상황은 이렇게 정리된다.

"선비들(예수회)이 나가고, 웬 소인배들(새로 온 선교사들)이 들어왔구나."

당시 국뽕을 장착한 선교사는 제국주의에 일조했다.
서양 본국에서는 온갖 기업가들이 자기네 제품 팔아먹을 곳 찾기 혈안이었다.
그렇기에 교회와 기업가들, 서양 국가들의 통치자들은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1. 기독교 없는 동아시아 국가에 가서 선교를 한다.
2. 동아시아 국가 선비들이 반발해도 무시하고, 제사 없애기, 신도 늘리기 등에 집중한다.
3. 그러다가 선교사가 선비들과 민중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4. 서양 본국에서 군대 투입하여 선교사 보호 명목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협박한다.
5.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에 대응하려 하지만, 대포와 함선의 성능은 이미 서양이 월등이 좋다.
6. 결국 굴복한 동아시아 국가는 서양 국가들과 협상하여, 서양 기업가들에게 유리한 조약을 체결한다.
7. 기업가들은 돈 벌고, 선교사들은 안전하게 기독교를 전파한다.
8. 모두(?)가 행복하다.

이 방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19세기의 중국과 영국(+프랑스)의 "아편전쟁"이었다.

3. 동학
오늘날에도 동학계통 신종교들이 있지만, 사실 종교의 시초와 현대종교를 비교하면 안 된다.

서학의 문제가 조선에 불거지면서 최제우라는 인간이 동학을 창시한다.
여느 종교 창시자 답게, 의료행위도 하고 으쌰으쌰하면서.

천주교가 부녀자와 서민들에게 인간평등에 대해 어필했듯, 동학 역시 농민 전반에 어필했다. 다만 동학은 천주교가 폭력적으로 부쉈던 조선의 인륜질서를 지켜가고자 했다. 그렇기에 동학교도들 입장에서는 탄압이 억울했다.

동학은 배고프고 고된 농민에게 눈물나도록 따뜻한 철학이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