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

조선 성리학 이황과 이이 설명틀

취미와 문화 2023. 1. 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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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연한 철학왜곡을 통해 성리학을 설명해보자.

필자는 성리학 완전 초짜다.

하지만 설명을 해야 한다.

쉽게 접근해보자. 쉽게…(필자 스스로 공부하면서 보강할 예정. 첨언해주실 분이 있다면 대환영.)

이 설명들은 죄다 야매에 불과하다.
레포트 쓸 때 그대로 참조하기에는 좀 그런 정도.


[서론]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조선의 선비들은 쓸데없는 일에 골몰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왜 국가 발전에 쓸모없는 일을 할까?” 그런데 국가발전을 위한 일이 무엇인가? 기업 성장? 자유 경쟁 보장? 평등 보장?

전근대, 특히 조선은 공적 질서를 오늘날 ‘자유’의 가치가 추구되는 만큼 중시했다. 왜냐.

1. 고려 말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던 권신들이 고려를 망쳤다.

2. 그 옛날 춘추 전국시대에도 감히 윗사람의 자리를 엿보는 아랫사람들이 주제넘게 날뛴 탓에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다. 공자님이 전란의 시대를 가라앉히고 원상복구하려 했지만, 그와 유사한 일들이 이후로도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기타 등등.
이렇게 질서가 무너질 때마다, 사람들은 죽거나 굶거나 두들겨 맞았다.

다양한 역사적 경험들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사람들은 대동사회를 꿈꿨고, 질서있게 만백성들이 행복한 세상을 바랐다. 조선의 지도부는 그런 지향에 동의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에서 도(道), 리(理), 예(禮) 등 다양한 절대선이자 질서들이 제시된 가운데, 그것들을 어떻게 실현시키느냐가 각국 지도자들의 과제였다. 그 과정에서 자유경쟁, 사적 욕망은 도리어 국가를 무너뜨리는 요인일 뿐이었다.

성리학은 동아시아의 유교를 필두로, 불교, 도교 등 다양한 사상을 버무린 것이다. 이 사상의 목적 역시 도(道), 리(理)를 추구하고, 질서있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국내 성리학의 권위자로 이황과 이이가 있는데, (필자가 실력이 안 되므로) 그들을 중심으로 조선 성리학의 전개를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리와 기]

 

일단 말하건대, 필자는 완전 초짜다. 그러니까 잘 걸러들으시길.

- 리(理)는 이치, 진리, 본질적인 질서 등으로 볼 수 있다. 즉, ‘선한 것’이다. 일단 좋은 것. 이치에 따르지 않으면 세상이 혼탁해지고, 백성들이 고통받는다. 서양으로 치면 하나님, 불교로 치면 부처님인데, 그 교리와 지향이 달라 유교가 불교랑 싸우고 그런 거다.

- 기(氣)는 기운 혹은 현상이다. 기 철학은 동아시아 역사에 아주 뿌리깊게 박혀있는 것이라, 참 신비적으로 들리는 용어가 ‘기’이다. 하지만 도사님들 떠올리지 마시길.
사실 기는 흩어지면 공기, 뭉치면 현상 내지 물체가 되는 것이다. 송나라의 장재라는 사람이 이 ‘기’ 철학을 본격적으로 정립했는데, 이 사람 이론이 이걸로 정리 된다. 기가 흩어지면 공기('태허'라고 표현된다), 기가 뭉치면 현상 혹은 사물.
보통 무협지에서 기를 모아 칼을 휘두른다. 이건 사실 배경만 동양이지, 사실 마법판타지와 다를 바 없다. 기를 운용한다는 건, 이 세상의 현상을 내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에서 운기조식하시는 도사님을 본다면, 그냥 '그러시구나...'하고 넘어가시길.


[퇴계 이황]


이황에 따르면 법칙(리)는 현상(기)와 마찬가지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냄, 즉 ‘발’한다.

다음의 상황을 살펴보자.
교사A가 펜 두 개를 교탁에 놓고, 하나씩 들어올린다.
* 현상 : 펜 한 개를 들다 + 펜 한 개를 더 들다 = 펜을 두 개 들다.(기 = 실제 현상)
* 원리 : 1+1 = 2 (리 = 이치 = 법칙 = 질서)

그러니까 수학에 (억지로) 접목시키면 교사가 펜을 두 개 들었을 때, 이미 고찰할 필요도 없이 1+1=2 라는 법칙이 우리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선악도 없고, 필요조건 충분조건 관계가 이기론과 다르긴 하지만…)

인간의 마음[= 리(선한 인간의 질서)에 따라 발한 ‘사단’ - 기(현상)에 따라 발한 ‘칠정’을 잇는 통로] 역시도 마찬가지의 탐구 구조를 가진다.

마음의 경우를 살펴보자.
마음을 탐구할 때는 [탐구할 사물 = 내 마음 속 현상]이라고 생각하자.
교사A는 배 곯은 학생을 위해 슬퍼했다.
* 현상 : 교사가 슬퍼했다 = 칠정 = 희노애락애오욕 중 슬픔 현상(기)에 의해 표출됨.
* 원리/본질 : 교사는 학생을 동정하여 측은지심을 내보였다 = 사단 = 인간의 선한 원리 혹은 본질이 드러났음.

슬픔이란 현상은 사실 다양한 동기에 의해 일어나지만, 이때 발생한 현상의 본질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교사가 측은지심을 가졌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겉모습은 슬픔이란 감정이지만, 본질은 슬픔처럼 보이는 측은지심이라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인간의 선한 원리 그 자체가 발동되었다는 증거다. 그렇게 발동된 측은지심을 이 세상에 내놓는 방식이 현상의 일종인 슬픔이란 것이다.(리가 발할 때 기가 따라감 = 리발-기수)
한편 슬픔은 자체는 누군가를 미워할 때, 질투할 때 등 나쁜 의도 때문에 발현될 수 있기도 하고, 위의 사례처럼 누군가를 동정해서 착한 마음에 발현될 수 있다. 고로 슬픔은 선할수도 악할수도 있다. 이런 슬픔을 성인군자들은 이치와 선함을 추구하면서 이것들을 옳은 방향으로 옳게 표출하고자 노력한다. 추한 슬픔에 이치는 없으며, 선한 슬픔에 이치가 있을 것이다.(기가 발할 때 리가 올라탐 = 기발-리승)
(;기발 리승이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원래 선한 의도의 [기=현상=슬픔]에 이치가 달라붙는 것인지 모르겠다. 임시적으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공부해서 보강하겠다.)

정리하자면 이황은 이치(리)와 현상(기)를 구분하였고, 이치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인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치들을 잘 보고 따르면 되는 것 아닌가? 굳이 현상에 현혹되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이치를 본다면 이 세상은 더 질서있게 될 것이다.


[율곡 이이]

한편 율곡 이이는 리가 스스로 발현되지 않는다, 즉 우리에게 직접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어떤 방향으로 이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황은 이치(리)가 현상(기)보다 선행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임금 없는 대한민국(현상/‘기’이 없음)에 임금을 위한 충성(이치/‘리’)이 있을 수 있는가?

이 세상에 이치가 존재한다는 건 분명하다. 또한 그 이치는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다. 이치는 기압이 존재하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돌처럼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치가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거나 그럴 일은 없으며, 무언가 우리 눈에 띄기 위해 존재감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우리가 이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현상(기)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치는 현상 속에 잡힐듯 말듯, 보일듯 말듯 드러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상(기)를 완전히 통달하면, 이치가 언제 어떻게 드러날 지 알 수 있지 않는가.

이 관점에서 보면, 이황의 의견이 이상하다. 리와 기는 서로 다른 것이라지만, 사단은 사실 칠정(희노애락애오욕)에 속하는 것 아닌가? 사단과 칠정을 완전히 분리하는 게 옳은 해석인가?

결국 사단, 칠정 모두 일종의 감정으로, 따지고 보면 모두 현상(기)에 불과하며, 사단은 순수하게 선한 현상인 것이고, 칠정은 선악이 공존하는 현상일 뿐이다. 다시말해, 사단-칠정 어떤 마음이든지 간에 마음(심)은 현상(기)로서 존재감을 발하는 것이다. [심 = 기(현상)]
사단이 결국 일개 현상에 불과해지면서, 인간의 선한 이치가 발현되는 통로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기(현상) 그 자체다. 다만 우리는 성인들의 옛 저서들과 여러 역사들을 보고, 성인들이 발견해 낸 [이치와 질서가 담긴 현상]들의 단편을 볼 수 있다. 공부를 하여 나쁜 현상을 알고, 선한 현상을 알 수 있다. 선한 현상(기)에는 당연히 이치가 담겨있을 것이다.
선한 기가 발하면, 이치는 당연히 그것을 탑승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볼 수 없는 이치 자체를 탐구하려 하는 게 아니라, 현상(기)를 탐구하며 이치에 대해 우회적으로나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 가지의 모델은 왕이 '생각해야 하는 방식'을 다른 갈래로 인도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지극히 개인적 해석이다. 죄송하다.)
1. 이황의 모델 : 왕은 성학십도 같은 성리학 요점정리 노트를 보고, 왕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기)을 보면서 동시에 옳음과 법도, 더 나아가 예라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의 이치라는 것은 우리가 주변의 현상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자가 있다면, 왕은 그의 선한 본성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다. 한편 불의를 저지르고도 수치심이 없는 자가 있다면, 왕은 그가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일깨우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성학에 정진하는 한) 그에게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2. 이이의 모델 : 왕은 어쨌건 신하들과 세계의 현실에 따라 휩쓸리듯 행동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왕도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쉽사리 '세계의 이치'나 '인간의 본성'을 쉽게 알 수는 없다. 만약 간신들이 왕의 주변을 가득 채운다면, 왕은 그것에 안주하고 파멸의 길로 접어들기 마련이다.
만약 혼란을 잠재우고 다시금 태평성대의 질서를 회복하고 싶다면, 신하들이 최고 권력자인 왕에게 올바른 예와 질서로 이루어진 세계를 보여주어야만 한다.

[학파의 전개]


이황을 정리하자면,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치’를 포착하여 정진하자는 입장.(리발설)
이이를 정리하자면, ‘존재감 없는 이치를 포착하기 위해 현상(기)을 공부하자’라는 입장.(기발일도설)

이황의 학통은 훗날 남인 계열, 이이의 학통은 훗날 서인 계열로 계승이 된다.

남인이 집권했을 땐, 서인들을 ‘기’에 집착한다고 매도했다. 그런데 본래 주자학은 율곡 이이의 입장과 가깝게도, 리가 스스로 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뿌샘 5권, p.325~) 오히려 퇴계 이황의 리발설이 독창적이고, 주자학에서 벗어나 있었다.

정리하자면, 이황은 주자성리학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있고, 이이와 그의 학통은 주자성리학의 틀에 충실했다. 이이의 성향을 따라 주자성리학의 틀을 견고히 했던 이가 서인 노론계 송시열이다. 그리하여 병자호란 이후 대응에서 주자가 살았던 송나라 모델과 이념을 더 깊이 차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송시열 - 주자(주희)-이이 성리학의 발전]

 

이이는 리발설을 거부했다. 고로 이이의 논리에서 어떤 특정 현상이 선한 이치를 담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사단, 칠정 모두 일개 현상에 불과하다면, 본래 사단이 제시하던 ‘진짜 선함, 이치가 담긴 것’의 기준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가? 어떻게 이치가 담긴 현상을 구분해낼 수 있는가? 그런 과제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송시열은 이이의 논리에 따라 사단, 칠정 모두 기(현상)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송시열은 나름 이이의 이론을 발전시켜 선함을 알아채는 기준을 세웠다.

‘심(마음)’이라는 것은 사단과 칠정 사이를 합친 것, 혹은 둘을 잇는 것이었다. 사단, 칠정은 이이의 학통에서는 전부 기(현상)이므로, ‘리’와는 달리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미발’, 마음이 이미 움직이면 ‘이발’이다.

* 마음 안 움직임(미발) = 성(性, 본성, 성품, 천성)
* 마음 움직임(이발) = 정(情, 움직인 마음, 마음 작용)
고로 마음은 성과 정 상태를 모두 가지고 있다.(심통성정)

움직인 마음은 이미 현상(기)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이상, 아무리 순수하고 선한 것이라도, 현실의 현상(기)들과 충돌하면서 선악이 생겨나고 만다.

그런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현상으로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다면?
‘미발’한 마음은 아직 이치(리)에 연결된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인간의 본성(性)은 착한 녀석들이란 것이다. 본성은 이치에 닮았고, 마음이 본성을 발하게 하여 움직이면 선악에 좌지우지되는 ‘정’이 된다. 이미 움직인 마음, 즉 ‘정’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온전히 순수한 이치에 맞닿은 ‘본성(性)’을 추구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그렇다면 이 순수한 본성은 무엇이며, 본성을 어떻게 잘 보존하여, 마음을 통해 발현시킬 수 있을까?
이 문제가 호락논쟁을 통해 표면화된다.


[호락 논쟁 - 본성에 대한 견해 분화]

 

송시열 사후에 서인 노론계는 [서울의 낙론, 충청의 호론]으로 갈렸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쟁점은 [‘성인의 삶 따위는 무시하는 오랑캐(청나라)’와, ‘성인의 삶을 지향하는 인간(조선 선비)/성인’은 질적(본연지성-적)으로 같은가?]였다.

Q1. 오랑캐와 성인의 본성(性)은 같은가?
A : 청나라는 일개 ‘동물’에 가까운 인간이요, 성인들 및 성인을 좇는 조선의 선비들은 ‘인간’이다. 청나라는 조선에게 아버지 나라를 표방하는 주제에, 패전국에서 뜯어내는 ‘용돈’ 격의 세폐나 받던 녀석들이다. 게다가 본래 아버지 나라로서 책봉해준 명나라를 죽이고 아버지를 자청하는 동네 양아치를 어떻게 인륜을 아는 인간으로 보겠는가?
‘인물성동론/이론 논쟁’이라는 점에서 이미 본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결정 나 있다.
선비들은 오랑캐와 자신들을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렇게 기본적인 입장 정리가 있었으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이치(理)와 본성(性)은 다르다.
‘이치’는 도사님 식으로 설명하자면 이데아 같은 보편성이다.
동물이라는 이데아가 있으면, 인간, 토끼, 사슴 등이 속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치 아래에 본성이 있다.

또, 본성(性)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나뉜다.
- 본연지성 : 본연지성은 이치에 의해 부여된 순수한 본성을 말한다. 동물은 동물답게, 인간은 인간답게 이치에 의해 부여된 질서를 준수하는 것이다.
- 기질지성 : 기의 영향으로 만들어지고, 기의 구속을 받는 본성을 말한다. 마음이 발했을 때 각종 현상(기)에 의해 선악으로 오염되듯, 본성 역시 현상(기)과 접촉했을 때 후천적인 선악있는 본성이 형성된다.

호락논쟁의 프레임에서, 본성은 다음의 세 단계로 적용된다.

- 성(性) 3층설 -
1층. 동물이나 인간이나 서로 같은 본성이다.
2층. 동물과 인간은 다른 본성을 가졌지만, 인간과 인간은 같은 본성이다.
3층. 인간과 인간은 서로 본성이 다르다.

- 낙론의 이간 : 1층을 본연지성으로 간주하였다. 동물과 인간은 같은 본연지성을 가졌지만, 각종 현상(기)에 의해 발생된 기질지성들로 동물/인간의 구분(2층)이 생겼다. 인물성동론.
도둑이나 순임금이나 본연지성 면에서는 같을 뿐만 아니라, 물(物)의 성이 인(人)의 본성이다. 기질지성 면에서나 개와 소, 도둑과 순임금이 같지 않다. 이치가 모든 현상에 통한다.

- 호론의 한원진 : 2층을 본연지성으로 간주하였다. 동물과 인간은 당연히 다른 본연지성을 가졌고, 인간과 인간은 같은 본연지성을 가졌다. 물론 인간과 인간은 각종 현상(기)에 의해 발생된 기질지성들 때문에 구분이 생겼다. 인물성이론.

이 인성-물성의 구분을 좀 더 탐구해보자. 일반인과 성인-군자는 본연지성이 같은가? 당시 유교적 질서체계가 구분하고 있던 천명이나 신분이라는 것은 이치가 발현된 결과물일 것이다. 호론이든 낙론이든 간에, 인간과 인간의 본연지성은 서로 같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 신분질서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부터는 기질지성에’에 관한 호론과 낙론의 관점차이가 두드러진다.


Q2. 오랑캐와 성인의 발현된 마음(정, 情)은 같은가?
A : 마음은 발하지 않은 ‘미발’에서, 이미 발한 ‘이발’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마음의 본질은 ‘미발’한, 순수한 인간 본성(질서, 이치)에 있는 것 아닌가?

- 서울 낙론 : 발한 마음(정, 情)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섞여나올 수 있다. 이미 발한 마음에, 여러 더러운 현상들(기)가 결합하면 탁한 마음이 된다. 하지만 좋은 현상들(기)에 결합한다면, 본래의 맑고 순수한[“청허(淸虛)”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 수양을 잘 하면 선한 본성을 잘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낙론은 율곡 이이 이론 주류에 이황, 서경덕 등 다양한 인물의 이론을 잘 종합하는 방향으로 감. 결과적으로 이치와 본성을 우회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는 입장.

- 충청 호론 : 마음이 이미 발하는(情) 순간, 순수한 인간 본성(性)은 마음에서 찾을 수 없다. 이미 발한 마음은 이 세상의 다른 현상(기)들과 질적으로 다를 바 없이, 선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이이와 송시열의 이론을 탄탄하게 계승한 이들. 이치와 인간의 선한 본성이 스스로 빛을 못 내며 기에 의해 제약되고 철저히 가려져버렸다는 입장. 심즉기 설의 강조.

이로써 성인과 범부의 차이를 낙론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었지만, 호론은 ‘발한 마음’인 ‘정(情)’을 탐구해봤자 범부가 성인이 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는 입장으로 굳어진다. 호론에서 ‘정’으로부터 인간 본성을 발견할 수 있는 자란, 이미 세상을 탐구하여 다른 사물의 본성도 꿰뚫어볼 수 있는 성인이다. ‘정’을 잘 추스르고 정리해봤자 순수한 ‘본성’의 알갱이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은 이미 사물의 현상(‘기’)과 같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 호락논쟁 정리 : 호락논쟁은 청나라에 대한 호의 혹은 적개심의 근거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 것 같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서 본성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한 시각이 철학적으로 갈리므로 청나라에 대한 입장도 다를 것이란 것도 그럴듯한 시각이었다. 그러나 낙론이 청에 호의적이었다는 데에는 좀 더 증거자료가 필요한 상황이다.

만약 “청나라 = 동물 = 오랑캐”, “조선 = 인간 = 중화”라는 맥락이 맞다고 한다면, 인물성동이론 문제는 “동물에게서 인간의 본연지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넘어 청나라와의 화의를 정당화하는 데까지 나아갈 테다. 하지만 증거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옳은 걸까?



[마치며]

 

간단히 글을 써 보았다. 아마 동양철학 전공자가 보면 안타까운 수준일텐데, 여러 피드백이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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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뿌샘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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