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

[조선시대사 정리노트] 연산군 시기 무오사화(1498)

취문 2021. 4. 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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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정리노트] 연산군 시기 무오사화(1498)


  연산군(재위 양력 1495(음 1494)~1506)은 폭정의 대명사라고 설명이 되곤 함. 그 본래 성향이 그런 편인지는 잘 모르겠음. 무오사화 다음의 갑자사화는 분명 연산군의 개인적인 성향을 나타내긴 하지만, 무오사화는 '사화' 특유의 훈구대신과 사림 간의 갈등 양상으로 파악할 수 있음.

傳旨曰(임금께서 전지를 내리셨으니), 金宗直草茅賤士("김종직은 초야의 미천한 선비로), 世祖朝登第(세조 조에 등제(登第;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至成宗朝(성종 조에 이르러), 擢置經筵(경연을 위해 발탁하여 두어), 久在侍從之地(오랫동안 시종의 자리에 있었다.), 以至刑曹判書(이에 형조판서에 이르렀고), 竉恩傾朝(은혜를 베풂이 조정을 기울게 하였다.). 及其病退(급기야(급기, 及其) 병이 들어 물러나자), 成宗猶使所在官(성종께서는 오히려 그 소재지의 관에 시켜), 特賜米穀(특별히 미곡을 하사하도록 하였으니), 以終其年(이로써 그 말년을 다하게 하였다.). 今其弟子金馹孫(지금 그 제자 김일손이), 所修史草內(찬수한 사초 안에), 以不道之言(도가 아닌 말로써), 誣錄先王朝事(선왕조의 일을 속여 기록하고), 又載其師宗直弔義帝文(또 그 스승 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었다). 其辭曰(그 기사에 이르기를), 丁丑十月日(정축년 10월날에), 余自密城道京山(내가 밀성에서 경산으로 가는데), 宿踏溪驛(답계의 역에서 잤다.), 夢有神披七章之服(꿈에 귀신이 *칠장복을 입고있고), 頎然而來(풍채가 좋은 모양()으로 있어 다가오니), 自言(스스로 말하기를), 楚懷王孫心("초 회왕의 자손인 심인데,), 爲西楚霸王所弑(서초패왕에게 시해를 당해), 沈之郴江(빈강에 잠겨있다"). 因忽不見((그리고는) 언뜻 보이다가 없어져 보이지 아니하였다). 余覺之(나는 그걸 깨닫고), 愕然曰(몹시 놀라 말하기를), 懷王南楚之人也(회왕은 남초 사람이요,), 余則東夷之人也(나는 즉 동이 사람이니), 地之相距(그 땅이 서로 떨어져 있기를), 不啻萬有餘里(만 여 리는 될 뿐이 아니고), 而世之先後(또한 그 세대의 선후도), 亦千有餘載(역시 천 년하고도 남도록 행해야 하니), 來感于夢寐(잠의 꿈속에서 느낌이 통하여 오니), 玆何祥也(이 어찌 상서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且考之史(또한 그 역사를 생각하니), 無沈江之語(강에 잠겼다는 말은 없으니), 豈羽使人密擊(어찌 항우가 사람을 시켜 암살하고), 而投其屍于水歟(또한 그 주검을 물에 던졌는가!), 是未可知也(이는 알 수 없다). *遂爲文以弔之(드디어 글로써 조의문으로 삼았다.) - 『연산군일기』권30, 4년 7월 17일(신해)

* 칠장복 : 칠장()을 수놓은 왕세자의 예복(출처 : 네이버 한자사전)
* 爲 A 所 B : A에게 B당하다.
* 爲 A 以 B : A로써 B를 삼다.

 

  1498년의 무오사화는 연산군 초에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가 사림파에 대해서 일으킨 사화. 새 왕이 오르면, 그 이전 왕에 대한 실록을 만드는데,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세조의 집권과정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가 대두. 위의 '조-의제-문'이라는 것이 화두로 떠오르게 됨. 강력한 서초패왕 항우에게 초나라 의제가 힘없이 찬탈당하는 모습이 그려짐. 그 모습이 딱 강력한 세조가 연약한 단종을 찬탈한 것과 쏙 빼 닮아 버린 것임. 고로, 김종직이란 인간은 세조를 비판하였던 것임.

  "이게 왜 갑자기 연산군 때에 대두되는 것인가? 예종-성종-연산군으로 이어지는 왕위는 세조에게서 내려오는 것으로서, 세조가 왕이 아니라면 자신도 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세조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던 당사자들이 무오사화 당시에 살아있었습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유가적인 문제가 되긴 하나, 그렇다고 세조를 비판하는 것은 반역입니다. 세조 시기의 정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역사평가 문제로 왕과 원로대신이 한 편이 되고, 젊은 유학자들이 비판을 하여 젊은 유학자들이 죽고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성리학의 이념에서 이 죽은 이들을 볼 때에 참으로 의로운 사람으로 보게된 것입니다."(서강대학교 고 정두희 교수님 강의, '조선시대사')

  한편 신편한국사에서는 꽤 큰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음.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1498) 7월에≪성종실록(成宗實錄)≫을 찬수(撰修)하기 위해 사국(史局)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실록청 당상관이었던 이극돈은 일찍이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던 김일손이 사관(史官)으로 재직하면서 사초에 자신의 비행을 기록했음을 알고, 그에게 이 사실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사초에 기록된 이극돈의 비행은 세조 때에 불경을 외고, 전라도관찰사 재임시에 정희왕후상(貞熹王后喪)을 당하였음에도 장흥(長興) 관기(官妓)와 더불어 주연을 베풀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이를 김일손과의 불화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감정 차원의 문제일 뿐, 근본적으로는 앞서 논급한 것처럼 사림파가 세조대 이래 정치·사회·경제적 제특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려던 데서 빚어진 것이었다. 이 점은 이후 김종직이 남이옥사(南怡獄事)를 일으켰던 유자광을 미워하여 유자광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누각현판에 걸어 두었던 시를 자신이 후에 함양군수로 내려와서 철거해 불태워 버렸으며, 이러한 양자의 평소 감정대립이 무오사화의 전개과정에서 사건이 확대되는 요소로 작용했다는 이해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신편한국사 vol.28.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istory.go.kr))

 

 

 

* 서강대학교 고 정두희 교수님 강의 '조선시대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신편한국사, 연산군일기, 네이버 한자사전,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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