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 정리노트] 경연이란? 홍문관이란?
경연은 학식 있는 신하들을 모아서 경전을 읽거나 시사에 대해 토론하는 장이었음. 경연은 고려 예종 시기 즈음에 도입을 했다고 하나, 공민왕 때에 본격적으로 시행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조선 태조 이성계 시기부터는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좀 더 강력히 하기 위해 경연이 강화된 경향이 있었음.(우리역사넷, 우리역사넷 (history.go.kr))
臣等以爲(저희들의 생각으론(以爲)), 人君之學(임금이란 사람의 학문은), 非徒誦說(다만 외우고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 其所以日御經筵(그러한 바로써 매일 경연을 다스리시고), 迎訪採納者(현명한 자를 받아들여 방도를 묻고(迎訪)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一(첫째), 以接賢士大夫之時多(현명한 사대부를 접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而薰陶其德性(그로써 덕성의 품성을 곧게하고(薰陶; 훈도)), 二(둘째), 以親宦官宮妾之時少(환관과 궁첩을 가까이 하는 시간을 적게 하여), 而振起其怠惰(그로써 게으름을 이기고 정신을 바짝차리고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振起)), 且創業之主(또한 창업 군주라면), 子孫之所儀刑也(그 자손들의 이상향일텐데). 殿下若以經筵爲不急(전하께서 이와 같이 경연을 급히 여기지 않으신다면), 則後世藉以爲說(즉, 후세에 핑계삼아 말하여(藉以爲說)), 其流必至於不學(그 시류가 반드시 학문을 하지 않는 데에까지 도달하고), 豈細故哉(이 어떻게 사소한 일이겠습니까). 伏願殿下日御經筵,(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날마다 경연을 다스리시고) 進講『大學』(대학을 읽고 정진하시어), 以極格致誠正之學(격치성정(格致誠正)의 학문을 극히 하시어), 以致修齊治平之効(수제치평의 본받음에 이르소서.), 上兪允(주상께서는 그리하라 하셨다). - 『太祖實錄』卷2, 1年 11月 14日(辛卯)
성종은 즉위 6년까지는 어린 탓에 훈구대신 한명회와 결탁한 세조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는 시기를 보냈음. 이후 성인이 된 성종 7년부터 언론기관 홍문관(弘文館)의 확장 설치하였음. 본래 세조 9년인 1463년 이래 홍문관이 존재했으나, 그 기능이 실질적으로 도서관과 다르지 않았음. 홍문관이 성종시기 언론기구라고 이야기되는 이유는, 홍문관들은 그 때부터 경연이나 국정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게 되었이 때문임. 홍문관은 자기 시각에 따라 임금을 상대로 사회를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임. 당연히 홍문관의 먹잇감은 훈구대신들이 되었으므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음. 성종은 경연에 꾸준히 참여하여 홍문관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것으로 보임.
"성종 15년(1484)경 이후는 김종직의 제자를 대거 홍문관과 대간에 등용하고 언론활동을 장려함으로써 훈구재상을 견제하였다. 성종 17년부터는 特進官制를 운영하여 경연관이 아닌 문무재상을 차례로 경연에 참여시키고, 경연이 끝난 후에는 특진관·경연관(사림출신의 흥문관관이 중심)과 함께 당시의 현안사와 정치일반에 관한 것을 광범히 논의함으로써 의정부·6조의 기능을 견제하였다. 이와 같이 성종은 의정부·6조를 주도한 훈구재상(勳舊派)과 삼사를 주도한 사림출신 관료(士林派)가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왕권을 안정시키고 강화하였다."(신편한국사 vol.22.)
홍문관에 등용되었던 이들은 주로 경학에 눈이 밝았던 사림파였음. 사림파는 기존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훈척세력을 몰아세우기 위해 홍문관에 들어가야 했고, 성종 역시도 훈척세력을 견제해야 했기에 사림파가 필요했음. 그렇게 홍문관은 어엿한 언관으로 자리하게 되었음.
중종 시기에 정계에 젊은 사림 정치가 조광조가 등장하게 되었을 때, 조광조는 중종의 총애에 힘입어 사림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음. 그 때 홍문관을 사림파가 더더욱 장악하게 되었음.
* 출처 : 우리역사넷,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신편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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