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근대사

[조선시대사 정리노트] 공납의 변화과정

취미와 문화 2021. 4. 28.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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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정리노트] 공납의 변화과정

 

 


공납에서 골칫거리 - '방납'

 

 

군현의 공물은 토산물로 정하고 해당 군현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품은 수납을 면제시키도록 하라. - 태조실록 권15, 태조7년9월 갑신, (뿌샘 - 조선전기편, p.203.)

 

"공납이란 그 지역의 특산물을 내는 것인데, 국가가 할당을 하게 됩니다. 군과 현에 할당을 하면 호/집집마다 토산품을 내고, 군현에서 그걸 모아 국가에 바칩니다. 이것 역시 조운로를 이용하는 겁니다. 이것도 문제가 발생하는데, 제주도에서 공납으로 내는 게 제일 중요한 게 귤이었습니다. 장원급제하면 귤을 선물합니다. 5~6알 정도의 귤을 나누어받으면 집안에 식구들을 모두 모아 하나씩 까먹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임금의 뜻을 기리면서. 문제는 귤 같은 경우에는 너무 귀합니다. 한 귤나무가 있으면 귤 갯수를 다 세어 그 갯수에 부족하면 난리가 납니다. 근데 그 귤이 노랗게 될때가지 시련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무조건 귤을 내야 하는 거에요. 그 무조건이 참 힘든 겁니다. 그러다보니 지금이나 옛날이나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면서 돈을 버는 사람이 나옵니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자, 방납 업자들이 등장합니다. 지금으로 쉽게 이야기한다면 특산품 대행업자입니다." - 최태성, ebsi 고급한국사.

 

   방납의 발생 과정을 최태성 선생님이 정말 깔끔하게 정리를 해 주셨음. (역시 역사는 최태성!) 공납은 토산물을 공물로써 중앙에 납부하는 제도임. 공납에는 공물과 진상이 있는데, 공물은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직접 주민들을 대상으로 걷었고, 진상은 대개 임금의 국가 의례나 궁중음식을 '사옹원'이라는 관청에 상납하는 것이었음. 각 지역마다 물품을 만드는 장인이나, 특산물 생산자가 있을텐데, 그 명부를 관리하는 '공안(貢案)'이라는 것이 있었음. 중앙 정부에서 이 공안을 각 관청에 보내면 중앙정부에서 그걸 걷어야 함. 

  그런데 해당 물품이 꼭 그 지역에서 나지 않을 수도 있음. 지역마다 생산 작물들만 보아도 계속 기후 변화로 인해 바뀌고 있는데, 매번 같은 것들을 똑같은 품질로 낼 수가 없음. 정부 차원에서도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배정하기도 하였음. 그러면 백성들은 그 필요한 공물을 다른 지역에 가서 사와야 함. 지금이라면 마트에 가면 되겠지만, 당시에는 시장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음. 그나마 시장이 있다고 해도, 농촌에서 나가려면 이틀에서 사흘은 나가야 함. 그래서 공납을 대신 해 주고 돈을 받는 상인들이 만들어지게 된 것임. 

 

 ‘各道京中各司所納貢物(각 도에서 경중의 각 관청()에 바치는 공물은), 極爲精察(극히 정밀하게 살폈지만), 皆以不善退之(그렇다해도 모두 좋지 아니하다고 물리니), 必得京中之物(반드시 경중(한양)의 물건을 얻고), 然後納於諸司(연후에 여러 관청에 납부하게 되니), 故各司典隷射利之徒(고로 각 관청에서는 전예(*典隷)를 싫어하고 이로움을 바라는 무리들이; 상인들이), 爭先代納(앞 다투어 대납을 하고), 倍*蓰其價(그 값을 5배나 받았습니다)。 請*自今凡各道貢物(청컨대 이제부터 무릇 각도의 공물은), 令守令緘封(수령이 함봉(*緘封)하도록 명하게 하여), 納於各司(각 기관에게 납부하게 하여), 若實濫惡(만약 실제 넘치게 나쁘면), 則移牒監司(즉 감사에게 이첩하여), 倂爲黜陟(아울러 출척하게 하소서)。’- 세종실록 84권, 세종 21년 윤2월 5일 癸未 2번째기사
* 典隷 : 용례로는 "선비를 양성하는 기관인데 전예(典隷)들을 빼앗다"는 기사가 발견됨. 선비들이 중시하는 어떤 것인 듯.
* 蓰 : 다섯 곱절 '사'
* 自 : ~부터
* 緘封; 편지, 문서 등의 겉봉을 봉함
* 黜陟 : 출척, 못된 사람을 내쫓고 착한사람을 올려씀.

 

  "극히 정밀하게 살펴도 모두 좋지 아니하다고 물린다"는 것을 보아, 대납 상인들은 관청과 손을 잡고 공물 납부를 방해하고 있었음. 이런 행위를 바로 '방납'이라고 하는 것임. 그 값을 다섯 배나 부르는 것을 보아, 농민들은 폭리를 취하는 방납업자들에게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임. 이렇게 방납의 폐단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것임.

  이 문제를 시정해보자 했던 중종 대의 인물이 조광조. "중종대에 이르면, 조광조(趙光祖)가 보다 체계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는<논공물지폐(論貢物之弊)>에서 공납제의 문제를 공액의 과다와 불산공물(不産貢物)의 분정, 그리고 방납의 폐로 지적하면서, 규모를 고쳐 안민(安民)의 내실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고 논하였다. 여기서 조광조가 공안의 개정(改貢案)과 방납의 근절(杜防納)을 공물폐의 제거를 위한 양대 과제로서 인식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공납제 개혁의 방향을 규정지었다."(신편한국사, 우리역사넷 (history.go.kr))

  그렇지만 이 방납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고쳐질 만한 것인가? 위의 관청과 대납상인의 제휴에 대한 기사를 보면, 방납은 권력자들과 상인들의 긴밀한 결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음. 그 외에도 15세기 중반 이후 상인들이나 중앙관청의 서리(書吏)들이 넓게 방납에 뛰어들었는데, 서리라는 이들은 관아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신역과 관리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 있는 이들이었음. 조선 초기에 서리들은 무급으로 10년 동안 일하면 하급관리에 진출할 수 있었음. 어쨌건 이렇게 지배층, 중앙관청과 상인의 결합이 활발한 상태에서, 그리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웠음. 

  이렇게 권력자들과 결탁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기존에 백성과 관청 사이에 중간 유통없이 납부될 수 있는 공납이라는 세금에, 중간 유통상인이 들어와버린 것임. 즉, 국가가 받아야 되는 세금에 손실이 생겨버리는 것임. 그 손실분을 권력자들과 대납상인이 나눠먹는 것이 문제

  이후 이이와 유성룡은 대안으로 '공물수미법'을 제안하였음. - 거두다, - . 공물을 쌀로 거두는 법. 

 

해주(海州)의 공물법을 보면, 논 1결마다 쌀 1두를 징수하고 관청에서 물건을 마련하여 도성으로 상납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쌀을 내는 것만 알고 다른 폐단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오늘의 백성들을 구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만약 이 법을 사방에서 실시하면 방납의 폐단을 멀지 않아 자연스럽게 개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율곡전서>> 권15, 동호문답; 뿌샘 - 조선전기편, p.207.

 

  그런데 16세기에 여러 번의 왜란을 겪고, 1627년에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음. 조선의 피해가 막심하고, 각종 장부들은 불태워져버렸음. 국가 통제력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림. 국가 통제력을 회복하여 국가의 재정을 회복해야 함. 그 조치로서 조세제도를 바꾸었음. 공납제 역시도 손댈 필요가 있었음. 납의 폐단은 벌써 임진왜란 전후에도 제기되고 있었음.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던 때, 선조 27년에 영의정 유성룡도 시무책을 올리면서 공납제 개혁안인 수미법이 시행되었음. 수미법은 무엇보다 임진왜란이라는 비상사태가 배경으로, 군량을 보충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음. 

 

○ 공물·진상제도를 폐지하고, 도별로 공납물에 상당하는 미곡을 계산하여 이를 도내의 모든 전토(田土)에 균등하게 배분·징수한다.
○ 전라·충청·경상·강원·황해도에서는 징수한 미곡을 경창(京倉)에 납부하고, 함경·평안도에서는 그 도에 유치(留置)하여 국용(國用)에 사용한다. 단, 경상도의 경우는 경상도가 전화(戰禍)에서 소생할 때까지 유치하여 군량으로 사용한다.
경창에 납부된 미곡은 각 중앙 관서의 소요 物種(물종, 종래의 공물·진상물)을 구입하는 경비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군량으로 한다

 

  이 대공수미법은 1년도 못되어 폐지되어버림. 전쟁 내내 각종 장부들이 소실되어 징수할 수 있는 쌀이 매우 적었고, 쌀을 가지고 물품을 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고 함.  

  

  선조 41년(1608)에 이르러 좌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로 대동법을 비로소 시행하여, 민결(民結)에서 미곡을 거두어 서울로 옮기게 했는데, 먼저 경기에서 시작하고 드디어 선혜청을 설치하였다. 인조 2년(1624)에 이원익이 다시 건의하여 강원도에도 시행하게 되었으며, 효종 3년(1652)에 우의정 김육(金堉)의 건의로 충청도에도 시행하게 되었으며, 효종 8년(1657)에는 김육이 또다시 청하여 전라도 연읍(沿邑)에도 시행하였으며, 현종 3년(1662)에는 형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청하여 산군(山郡)까지도 아울러 시행하였으며, 숙종 3년(1677)에는 도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청하여 경상도에도 시행하였으며, 숙종 34년(1708)에는 황해도 관찰사 이언경(李彦經)의 상소로 황해도에도 시행하게 되었다.
  그 방법은 경기⋅삼남(三南)에는 밭과 논을 통틀어 1결에 쌀 12말을 거두고, 관동도 이와 같게 하되 토지 조사가 되지 않은 읍에는 4말을 더하며, 영동(嶺東)에는 2말을 더하고, 해서에는 상정법(詳定法)을 시행하여 15말을 거두니, 통틀어 명칭하기를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옛날 여러 도와 각읍에서 각각 그 토산물로 공납하던 것을 모두 경공(京貢)으로 만들고, 경공주인(京貢主人)을 정출(定出)하여 거두어들인 미곡으로 그 가격을 헤아려 정하고, 어린작등(魚鱗作等)하여 공인(貢人)에게 출급(出給)하고 물건을 진상하게 하여, 제향 어공(祭享御供)과 제반 경용(諸般經用)의 수요를 충당하고, 남으면 각 고을에 남겨 놓아 공용(公用)의 비용으로 준비하였다. - 『만기요람』, 재용편3, 대동작공; 우리역사넷 (history.go.kr)

 

  그리고 1608년에 광해군이 이원익의 건의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되었음. 일단 경기도에서 시작하고, 선혜청을 설치하면서 대동법을 시작했고, 숙종 34년에 이르러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됨. 이렇게 공납에서 수미법과 대동법을 거쳐 현물세가 사라지게 되었음.

  "결국 조선 정부는 대동법이라는 새로운 부세제도의 시행을 통하여 16·17세기에 전개되었던 공물 방납체계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정부의 통제하에 놓여지는 공물 청부업자, 즉 공인(貢人)이라는 상인층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동법(大同法) 실시의 주요 원인이 공납제의 폐단을 막음으로써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 정부의 세수(稅收)를 증대시키려는 데에 있던 만큼,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기왕의 공물 상납형태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방납은 새로운 공물 청부제로 대체되어야만 하였다. 제향(祭享)·어공(御貢) 및 제반 경용(經用)의 조달은 경공주인(京貢主人)에게 급가(給價)하여, 공인으로 하여금 물품을 구매·조달케 하는 방식으로 변환되었다."(신편한국사 vol.30. ) 이 말은 즉 '공인'이라는 전문 관청 대상 납품업자가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함. 정부에 납품하는 권한은 매우 강력한 권위로 작용했을 것이고, 관청과 거래할 수 있는 특권상인으로 등장한 것임. 정부는 이들의 물건값을 후하게 쳐주어 정부의 지원을 받기도 했음. 이들은 선혜청 등으로부터 물품 값을 미리 받고 특정물품을 각종 상인들에게서 구매하여 관청에 납품하였으니, 공인과의 거래처가 되기 위해 상인들은 갖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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