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사 정리노트] 을사사화
기묘사화 이후로 김안로(金安老) 등 훈구대신들이 다시 정국을 장악하게 되었음. 그 와중에도 사림파는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었고, 외척 간의 갈등인 을사사화가 터지면서 다시 위기를 겪게 됨.
중종의 첫째 부인 장경왕후 윤씨 일파(대윤; 윤임 등), 인종
vs 중종의 둘째 부인 문정왕후 윤씨 일파(소윤; 윤원형 등), 명종
1. 장경왕후 아들 인종 :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 1545년(인종 1) 병환이 위독해지자 대신 윤인경(尹仁鏡)을 불러 경원대군(慶源大君; 훗날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종(仁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aks.ac.kr)) 향년 34세.
2. 문정왕후 아들 명종 : 명종은 늦둥이임. 늦게 얻은 왕자인 만큼, 문정왕후는 명종을 사랑했고, 인종이 세자로 있었을 때에도 명종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진작에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음. 문정왕후의 소윤 세력은 인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훈구들과 더불어 권세를 쥐었던 김안로와 대결하였음. 김안로는 1537년에 윤원형 등을 모함하다가 결국 자신이 국모를 해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처형당하게 됨.
그러다가 인종이 즉위 1년만인 1545년에 죽었음. 문정왕후 측에는 그 동생 윤원형과 윤원로가 있었는데,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과 대결하고 있었음. 윤원형 등은 명종이 인종을 뒤이어 즉위한 지 두 달도 안 되어, 대윤인 윤임 일파가 역모를 꾀했다는 공격을 퍼부었음.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유배가게 되었음.
이른바 척신 정치가 시작되었음. 외척들에 의한 사화는 계속되었지만, 명종의 존재감은 거의 없었음.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은 함께 수렴청정을 하게 됨. 윤원형은 문정왕후에 의해 승승장구하다가, 국정의 실세로 떠오르게 됨.
서울에 있는 양재역에 불온문서가 붙은 사건, 즉 ‘양재역 벽사사건’이 일어나게 되었음. 그나마 남아있던 윤임 일파와 사림들은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모조리 숙청당해버렸음.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선전관 이노(李櫓)와 함께 와서 봉서(封書) 하나를 가지고 입계(入啓)하기를,
"신의 딸이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시집을 가는데, 부모 자식 간의 정리에 멀리 전송하고자 하여 한강을 건너 양재역(良才驛)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벽에 붉은 글씨가 있기에 보았더니,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으로서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가져와서 봉하여 아룁니다. 이는 곧 익명서이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이고 인심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여 아룁니다." ... 정언각이 올린 글 【그 글은 붉은 글씨로 썼는데 ‘여주(女主; 여자임금)가 위에서 정권(政權)을 잡고 간신(奸臣)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仲秋月) 그믐날.’이라고 하였다.】 을 빈청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요즈음 재변이 매우 많다. 하늘의 견책(譴責)이 어쩌면 이렇게 심하단 말인가. 염려됨이 적지 않아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다. 비록 분명하게 지적할 수는 없으나 각별히 해야 할 일이 있을 듯하여 경들을 불러서 묻는 것이다."
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이 주서(朱書)를 보건대, 단순히 미련한 자의 소행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익명서이니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들이 들으니, 요즈음 사론(邪論) 【죄인을 가리켜 무복(誣服; 고문받아 억지 자백)했다 하고, 훈신(勳臣)을 가리켜 무공자(無功者)라고 한 것이다.】 이 떠돌고 있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과 시종들도 모두 들었으나 말이 나온 출처를 알지 못합니다. 신들이 이미 들은 것을 사실대로 아뢰고자 하였으나 다만 사론이 나온 출처를 모르기 때문에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 글은 비록 믿을 수는 없으나 이것을 보면 사론이 떠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명소한 인원(人員)이 모두 오면 마땅히 들은 것을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 - 명종실록 6권, 명종 2년 9월 18일 병인, 조선왕조실록 (history.go.kr)
한편 문정왕후는 불교를 숭상한 것으로 유명함. 조선에서는 성리학 아래에 불교는 계속해서 탄압되었는데, '보우'라는 스님이 문정왕후의 지원 아래에 불교를 부흥함. 보우는 문정왕후의 특명 아래 봉은사의 주지스님이 되었음.
양민(良民)의 수가 날로 줄어들어 군졸의 고통스러움이 지금보다 더한 때가 없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백성들이 4∼5명의 아들이 있을 경우에는 군역(軍役)의 괴로움을 꺼려서 모두 도망하여 중이 되는데 이 때문에 승도(僧徒)는 날로 많아지고 군액(軍額)은 날로 줄어들니 매우 한심스럽다. 대체로 승도들 중에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잡승(雜僧)을 금단하기가 어렵다. 조종조의 《대전(大典)》에 선종과 교종을 설립해 놓은 것은 불교를 숭상해서가 아니라 중이 되는 길을 막고자 함이었는데, 근래에 혁파했기 때문에 폐단을 막기가 어렵게 되었다. 봉은사(奉恩寺)와 봉선사(奉先寺)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서 《대전》에 따라 대선취재조(大禪取才條) 및 중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신명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 명종실록 10권, 명종 5년 12월 15일 갑술
또한 이때 승과를 실시하였음. 이때 발탁된 분들이 바로 서산대사, 사명대사 같은 고승들이었다고 함(김정현 선생님)
* 출처 : 2018 ebsi 김정현 한국사 종합완성, 우리역사넷,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한국민족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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