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혁명 (3) 자코뱅, 가톨릭과 국가, 성직자민사기본법, 바렌 사건 외

취미와 문화 2021. 5. 1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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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베르사유 행진과 자코뱅당의 등장]

  15개정 미래엔 세계사 142쪽에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하는 여성들”이라는 그림이 소개되어 있음. 이 명칭은 프랑스어 “La Marche des Femmes sur Versailles”를 번역한 것이고, 영어로는 ‘woman march on versailles’, 한국어로는 또 달리 ‘10월 베르사유 행진’ 등으로 옮겨지기도 함. 이것도 빵을 달라는 행진.

  “국왕 루이는 이러한 혁명의 진전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소극적인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 파리에서는 웅변가와 신문기자가 민중을 선동하고, 전년도의 흉작으로 식량이 부족하고 물가가 오르며, 실업자도 증가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묘한 10월 폭동이 일어났다. 10월 5일 약 6천~7천명으로 추정되는 서민층 여인네들이 빵을 요구하며, 베르사유로 행진하고, 약 2만명에 달하는 국민방위병과 민중이 그 뒤를 따랐다.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와 더불어 파리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왕정이 몰락해가면서 공화주의를 표방하는 이들에게 힘이 실려 감. 보통선거를 요구하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파리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의원들은 헌우회(憲友會; 헌법의 벗 결사단, 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를 만들어 도미니쿠스 파에 속하는 자코뱅 수도원에서 회합을 가졌는데, 이들을 훗날 1972년부터 자코뱅당으로 불렀음. 그들은 애국적인 시민을 포섭하고, 지방도시에까지 조직망을 확대시켜나갔음.

 

[프랑스혁명 - 혁명과 반혁명: 가톨릭과 국가권력의 긴장관계의 형성]

  혁명의 혼란 속에서 오히려 혁명 정부는 역설적으로 혁명 자체에 대한 칭송을 강요하게 됨. 개인적으로는 이 때의 혁명기가 과격화되어 의미가 있다고 보여지면서도, 현생에 일어날까 두렵기도 함. 사회, 경제, 정치적인 현안들은 그대로인 상황에서 고위층 귀족들은 이민을 갔고, 국민들 내부는 혁명파와 반혁명파로 분열되어 감.

  한편 과세원칙의 문제는 계속해서 언급했듯 항상 문제였음(앞의 문서 참조). 게다가 혁명의 혼란 속에서 부과한 세금이 제대로 징수되지도 않았음. 국민의회는 급한대로 1789년 11월에 교회재산의 몰수를 결정하고, 이를 담보로 아씨냐 지폐를 발행하고, 교회재산을 매각했음.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기에 기존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반혁명편에 서기 마련. 국가의 민족주의가 종교의 당위를 이기고 있던 시기였기도 하고, 이들은 금세 척결당하게 되고, 혁명에 순종하는 성직자들이 남게 됨.

   아씨냐 지폐는 처음 이자부 국채였음. 국가 위기 상황에서 발행하곤 하는 것이 국채인데, 아씨냐 지폐는 훗날 프랑스 혁명 이후 이자가 점점 줄어들게 되어 문제가 됨. 어쨌건 이것이 1790년에는 지폐로 통용하게 되고, 발행고가 증가함에 따라 그 가치가 하락하여 인플레이션과 경제위기의 주된 요인이 됨. 이와 비교하여 영국도 국채를 발행하였으나, 영국의 안정적인 국채운영과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상황과 사뭇 다른 양태가 보여졌음.(박지향 교수)

  한편 교회재산의 매각은 세분하지 않고 큰 덩어리로 경매에 부친 결과, 농업기업가, 부르주아지, 그리고 부유한 자영농이 그 대부분을 구입하고, 빈농이나 토지 없는 농민은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했음. 큰 단위로 파는 비싼 교회 재산을 빈농이 구입할 수 있을 리가 없음. 이런 제반 교회 재산의 국유화(몰수와 매각)로 인해 철저한 개혁이 불가피해졌음.

 

  특히 루이 14세 전후로 가톨릭은 점차 국가에 종속될 위기를 맞아왔음. 성직자 개편이 필요했으므로, 국민의회는 수도원을 해체하고, 1790년 7월에 ‘성직자민사기본법’을 제정. “모든 성직자들을 선출제로 하고 국가가 봉급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로마 교황이 이를 반대하자 국민의회는 모든 성직자에 대하여 기본법을 지지한다는 선서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선서한 성직자는 7명의 주교와 절반이 안 되는 교구신부 뿐이었고, 선량한 카톨릭교도들은 비-선서성직자 편을 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성직자 기본법은 반혁명과 내란의 한 요인이 되었다.”(민석홍, 서양사개론) 제1 신분인 성직자들의 선서는 국가 공무원이 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였으며, 당연히 그 선서를 하기 싫었을 것. 가톨릭은 교황 아래 교구행정에 따라 활동하기 때문에 국가행정에 종속되겠다는 선서의 의미는 당연히 클 수 밖에 없음. 가톨릭성직자의 친-혁명, 반-혁명 등 입장은 그 아래 교구 신자들의 입장에도 반영이 되었을 것.

 

   “국민의회는 중세 이래의 길드를 폐지하고, 내륙관세와 통행세를 없애는 등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시키는 동시에, 샤플리에법으로 노동자의 결사와 파업을 금지하였다.(1791년 6월)” 중세 이래 길드를 없애고, 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인 샤플리에 법으로 노동자 결사와 파업을 금지시켰다는 것. 빈민들에게 일단 불리하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들에게 유리하다는 것이 확연함. 아직 국민의회의 입장은 후에 등장할 자코뱅에게 깨질 만큼, 그리 사회주의적이지 않음.

  어쨌건 이로써 앞서 말했듯, 봉건적인 십일조와 조세부과도 일단 명목상으로는 폐지가 되었고, 정치인 뿐만 아니라 성직자도 일부는 선출제에 찬성했으며 어느 정도의 민간의 선거권이 확대되었음. 봉건제의 해체는 자유주의에 걸린 족쇄를 하나둘씩 풀어가는 과정이었음.

 

[프랑스 혁명 - 루이 16세의 바렌 배신 사건, 마르스 광장에서의 공화주의 동의 서명]

  그러던 어느날 국왕 부부가 그 와중에 파리로부터 도망쳐 어디론가 향하다가 바렌 지역에서 잡혔음. 그게 1791년 6월 루이 16세의 국외도망 모의사건인, 바렌(바렌느) 배신 사건임.

 

"놀랄 만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던 국왕은 종교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발끈했다. 비록 그가 약간 급하게 성직자의 시민헌장을 재가하긴 했을지라도, 그는 개인적으로 선서거부파 성직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 그는 파리를 탈출해서 아르덴 지방의 국경 몽메디에 있는 부이에 후작이 이끄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만나러 갈 것을 꿈꾸었다. 왕의 가족(왕과 왕비, 두 왕자 및 왕의 누이 엘리자베스)의 도주는 1791년 6월 20일 밤에서 21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시간의 지체와 뜻밖의 사고 때문에 그 여행은 바렌느에서 중단되었다. 포로가 되어 군중들의 호위 속에 파리로 돌아온 루이 16세와 그 가족들은 소식을 듣고 왕의 귀환을 보러 나온 군중들의 얼음 같은 침묵에 맞닥뜨렸다. ... 그런데 그는 과연 몽메디에 무엇을 하러 갔던 것일까? 외국에 있는 망명귀족을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군대와 함께 파리로 돌아와서 의회와 클럽을 해산하고 자신의 절대권을 되찾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국민의 의식으로는 덜 충격적인 의미로) 강자의 입장에서 의회와 새롭게 협상하기 위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애국파'들이 매일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헌법상 권한을 존중해달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였을까? 어떠한 대답도 - 특히 마지막 사항 - 국민을 이해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논쟁은 끝이 없었다."(F.블뤼슈 외, 고봉만 옮김, <<프랑스혁명>>, pp.109~110)"

 

  국내 혁명 분위기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려는 것 같은 국왕의 행동을 마주한 프랑스 국민들은 국왕에게 매우 실망했음. 1791년 7월 17일 연병장(샹 드 마르스) 집회가 열려 자코뱅당 등 시위군중은 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음. 국민방위군사령관이었던 라파예트가 이들을 무력으로 해산시켰지만, 자유주의 귀족파로서 프랑스 인권선언 초안을 작성할 정도로 높았던 라파예트의 정치적 위상과 그 생명도 덩달아 날아가버렸음. 애초에 왕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데, 바렌 배신 사건으로 신뢰가 바닥을 쳤음. 그런 와중에 파리에서는 각종 클럽들에서 '공화제'에 대한 주장들이 대중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었음. 민중들이 마르스 광장에서 공원에서 공화정 서명을 받기 시작했던 것이, 마르스 광장에서 군인들의 시민 학살로 발전해버림. 자코뱅 등은 이런 민중의 심정을 동원하여 왕이 재집권하게 될 것이라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음.

 

  한편 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합스부르크 왕가 오스트리아 왕국의 레오폴드 2세였음. 그리고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제였음.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북부에 프러시아에는 빌헬름 2세가 있었음. 레오폴드 2세와 빌헬름 2세 공동으로 1791년 8월 27일에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는데, 마침 레오폴드 2세가 앙투아네트의 형제이니 이 선언은 프랑스를 군주제로 되돌릴 것이라고 언급. 물론 이 선언에서 군사를 동원할 것이라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프랑스의 혁명적인 상황에는 확실히 반대하고 있었음.

  프랑스 국내에서는 급진적 자코뱅 클럽이 분열이 생긴 상태에 온건한 지롱드 당이 득세한 상황이었음. "그리하여 1791년 헌법에 의해 선출된 입법 의회의 주도권을 잡은 지롱드당은 국내의 반혁명 음모와 절대 군주들을 타도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대항하여 혁명 전쟁을 시작했다. ... 8월 10일 파리의 민중과 의용병이 왕궁을 습격하자, 입법 의회는 왕권을 정지하고 왕족을 감금하는 한편, 새로운 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 공회'의 소집을 결정했다."(김복래, <<프랑스사>>)

 

 

* 참고자료 : .F.블뤼슈 외, 고봉만 옮김, <<프랑스혁명>>, pp.109~110 / 김복래, <<프랑스사>> / 서양사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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