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서양근대사 정리노트] 프랑스혁명 (5) 지롱드 국민공회의 몰락과 자코뱅 국민공회의 대두, 로베스피에르

취미와 문화 2021. 5. 22.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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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 1972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돌입과, 국민공회의 구성과 공화국의 선포]

애국은 공화주의적 열정과 국민적 통일성이라는 정신은 서로 결합하였고, 왕정의 비겁함은 바렌 도주사건으로 일찌기 비쳐졌음. 그런 속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적대심은 국민적인 공화정으로의 열정으로 연결되어 갔음. 1792년 7월 하순 프로이센군의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이 파리 시민에 대한 매우 위협적인, ‘파리 시민을 반드시 군사적으로 굴복시키겠다’는 선언을 발표하자, 이것 때문에 파리 시민의 혁명열이 고조되었음. 그리고 파리의 각 지구의 대표들은 합법적 시 행정기구 대신 '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왕궁과 친위대를 공격하여 학살.

프로이센군 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의 선언 이 있고 나서 얼마 ‘국민공회’의 소집을 결정하게 되었음. 입법의회는 왕권을 정지하고 왕족을 감금하는 한편, 새로운 헌법제정을 위한 국민공회의 소집을 결정. 부유한 부르주아지 지배가 무너지고, 수공업자와 소상점주 등 소시민층을 중심으로 한 상퀼로트 - 즉 혁명적 민중의 시기가 도래하려 하고 있었던 것. (다만 국민공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소집이 결정’되었다는 것에 주의.)

상퀼로트는 불량배인가? 그는 항상 발로 걷는 사람이며, 당신들 모두가 갖고 싶어하는 돈도 없는 사람이고, 자신을 위한 시종이나 성도 없으며, 4층이나 5층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단출하게 사는 사람이다.
그는 유용하다. 왜냐하면 그는 들판에서 일하는 법을 알고, 쇠를 주조할 줄 알고, ... 공화국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릴 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노동을 하므로 당신은 ‘카페 드 사르트르’에서 그를 분명 만나지 못할 것이고, 사람들이 작당을 하고 도박을 하는 도박장에서도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 마지막으로, 상퀼로트는 혁명의 모든 적들의 귀를 자를 날카로운 사브르[칼, 기병도]를 항상 지니고 있다. 때때로 그는 을 들고 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최초의 북소리가 울리면, 그는 방데를 위해, 알프스의 군대를 위해, 혹은 북부의 군대를 위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 <주제넘은 질문에 대한 답변: 상퀼로트는 누구인가?>

이제 1792년의 어마어마한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 1792년 8월 10~13일에 파리 민중들과 혁명파의 편에 섰던 군인들의 튈르리 궁(루브르 궁 인근 콩코드 광장 사이에 있던 궁)을 무력 점령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곳에 기거하던 국왕 루이 16세가 퇴위하며 군주정이 종식. 그리고 1792년 9월 20일에 비로소 ‘국민공회’가 첫 모임을 가진 것. 이날 프랑스의 ‘시민병’은 잘 훈련된 프로이센 군에게 발미(Valmy)에서 뜻 깊은 승리를 거두었음. 시민병들은 ‘프랑스의 국민’이라는 내셔널리즘 하에 뭉친 이들이었는데, 프랑스 내셔널리즘과 더불어 군사들의 사기가 오를 수 있었던 계기가 됨.

다음 날 국민공회는 왕정을 정식으로 폐지하고, 9월 22일을 공화제의 제1년의 첫 날로 선포하였음. 혹시 사료가 나왔는데 발미 전투 나왔다면, 무조건 국민공회 시점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음 날 국민공회는 왕정을 정식으로 폐지하고, 이제 프랑스는 9월 21일에 성인 남자들의 보통선거로 선출된 제헌의회가 ‘일체이면서 불가분한(one and indivisible)’ 공화국의 선포를 알렸습니다.

 

[프랑스 혁명 - 국민공회에서 꾸준한 자코뱅의 우세와 대불동맹의 견제]

그 이전까지 자코뱅 - 페이앙 - 지롱드로 나뉘어 있었으나, 점차 페이앙은 한 물 가고, 지롱드와 자코뱅의 대립구도가 주가 됨. 이 시기에는 자코뱅 내부의 좌익 파벌로서 빈민, 노동자, 급진 지식인 등으로 구성된 산악파가 주류가 되는데, 이들도 결국 급진적 자코뱅당과 다를 바 없음.

“공회를 주도할 지롱드당과 자코뱅당은 지롱드당이 약간 많았으나 거의 비슷한 의석을 차지하여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다. 다 같은 공화주의자였으나, 지롱드당은 부유한 부르주아지를 대변하고 연방주의(지방분권)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으며, 전쟁을 시작해 놓고 이를 수행할 과감한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회의장의 높은 곳을 차지하여 산악당(몽타냐르)이라고 불리워진 자코뱅당 의원들은 부르주아 출신이었지만, 소시민층과 민중을 세력기반으로 삼고, 파리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을 주장하며, 민중의 복지와 전쟁수행을 위하여서는 통제경제도 불사하는 철저한 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었다.”(서양사개론) 결국 의회 내의 논쟁 끝에 결국 급진적인 산악파 자코뱅들이 승리하여, 1793년 1월 21일에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되어버림.

 

국왕의 처형이 유럽 전반에 충격을 주었음. 한편 프랑스 국왕이 죽었다는 것도 굉장한 문제지만, 혁명과정에서 프랑스 국민들이 군인이 되어가고 있었음. 동시에 1792년 전반에 프랑스 군대는 해체되어갔고, 국왕군 내 장교 9000명 중 6000명이 망명길에 올라 1792년 전반에 프랑스는 안보위기에 처하게 되었음. 1793년 2월 24일 국민공회의 30만 모병 포고령, 1793년 8월 23일의 국민공회의 국민총동원령 등 내셔널리즘으로 똘똘뭉친 군대가 점점 늘어가는 데에 주변 국가들이 위협을 느끼게 되었던 것.

유럽의 국가들은 프랑스 국민공회에 대하여 대대적인 위기의식을 느꼈고, 지롱드당의 ‘뒤무리에’ 장군은 1792년 11월 초 제마프에서 오스트리아 군에게 대승을 거두었고, 국민공회는 1793년 2월에 영국에 선전하고, 3월에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와 교전에 들어감. 몇 차례의 프랑스의 승리가 있고 나서, 두려운 프랑스에 대적하는 1793년에 1차 대불동맹이 형성된 것.

이런 식의 프랑스 대 대불동맹의 교착상태는 혁명의 기운 아래에서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는 온건파 지롱드의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이었는데, 내부적으로 계속해서 자코뱅의 산악당이 정치적으로 공격도 버거웠기 때문.

한편 프랑스 내부에서는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위기. 화폐 가치가 떨어져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내부 갈등 - ‘방데의 반 혁명반란’이 심화. 그리하여 국민공회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함.

국민공회는 이러한 지방의 불온한 기세를 진압하고 감시하기 위하여 80명의 순찰의원을 지방에 파견하고, ‘혁명재판소’와 전쟁 내각인 ‘공안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 두 기관은 이보다 앞서 설치된, 1792년 10월의 ‘보안위원회’와 더불어 공포정치의 핵심기관이 되었다.” 앞서 시 행정 대신 만든 기구는 혁명위원회. 1789년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는 자치위원회. [자치위원회 - 혁명위원회 - 보안위원회(+혁명재판소+공안위원회)]

이런 자코뱅의 우위속에서 지롱드 당은 위기를 맞음. 이미 프랑스의 거리에는 급진적인 군중들이 나서고 있었는데, 자코뱅당 쪽에서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 특히 자코뱅당의 로베스피에르는 소시민층으로서 급진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우상으로 군림하면서, 점차 국정을 장악해나감. 자코뱅은 전쟁 운영을 담당하던 공안위원회를 접수하고 프랑스 내부의 여론을 장악해나감. 그런 와중에 지롱드 당의 뒤무리에 장군이 교전 중에 연속된 패전 끝에 적군에게 탈주하는 사건이 벌어짐. 한창 벼르고 있던 자코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파리의 민중을 선동하여 1793년 5월 31일 국민공회를 습격하여 반혁명 세력이자 역적인 지롱드 당을 잡아숙청해버림.

6월 2일에 자코뱅이 점령한 국민공회는 대대적인 지롱드 당 지도자 숙청에 들어가게 됨.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각종 정책을 폈음. 소득과 물가를 고정시키는 정책(최고가격제), 봉건제의 최종적 제거, 급진적인 이혼법의 통과, 노예제의 폐지 등 정책으로 소시민들에게 인기를 끌었음. 그리고 이렇게 자코뱅당 식의 애국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자극하는 전략을 기초로 하여, 1793년 8월의 국민 개병제인 국민 총동원령을 실시할 때에도, 적극적인 참여를 얻을 수 있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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