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한국근대사 정리노트]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3) 갑오개혁 당시의 상황 -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취미와 문화 2021. 5. 2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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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 밀약의 기원]

청불 전쟁이 한창일 때에 일본이 조선과 청나라를 침탈해가려는 궁리를 하는 사이에, 우리나라도 가만히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청나라가 기울어지고 있는 것은 조선 역시도 확인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기존의 <<조선책략>>적인 질서, 즉 미국-청나라-일본과 연대[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邦)]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그 질서가 부정되고, 러시아가 새로 연대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지요. 독일 외교관 출신 묄렌도르프가 주선이 되어 러시아를 끌어들여 한러 수호조약이 188477일에 맺어집니다.

 

이 <<조선책략>>적인 외교노선 변화는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러시아에 의지하는 경향이 심화됩니다. 그러다보니 한러 밀약설이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 돌게 되었습니다. 해군기지로서 영일만이나 영흥만을 러시아가 먼저 가져가버릴 수도 있다는 한러 밀약설이 하나의 소문이긴 하지만, 일본, 청나라에게 뿐만 아니라 영국에게까지 매우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한러 밀약설이 준 충격이 너무나 커서 청나라가 일본에게는 '천진조약'이라는 것을 체결토록 했습니다. 일단 러시아부터 막아야 하니 천진조약을 맺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이 밀약설은 또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케 하였고, 청나라는 임오군란 때에 납치한 대원군을 석방하겠다는 겁니다

 

톈진 조약
대청국(大淸國)특파전권대신(特派全權大臣) ... 이홍장(李鴻章)과 대일본국 특파전권대사(特派全權大使) ...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각기 받든 유지(諭旨)에 따라 공동으로 회의하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한다. 모든 약관을 아래에 열거한다.
1. 중국은 조선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조선에서 공사관을 호위하던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하고 날인한 날로부터 4개월 이내에 각기 모든 인원을 철수시킴으로써 양국 간 분쟁이 생겨날 우려를 없애고, 중국은 마산포(馬山浦)를 통하여 철수하고 일본은 인천항을 통하여 철수할 것을 의정(議定)한다.
...
1.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 양국이나 혹은 어떤 한 나라가 파병이 필요할 때는 우선 상대국에 공문을 보내 통지해야 하며,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대청국(大淸國) 광서(光緖) 11 3 4
특파전권대신 문화전 대학사 직예총독 1등 숙의 백작 이홍장
대일본국 메이지(明治) 18 4 18
특파전권대사 참의 겸 궁내경 훈1등 백작 이토 히로부미 - 고종실록22, 22 3 4(계묘)

 

밀약설이 준 충격이 세 가지 : 1. 천진조약 2. 영국의 거문도 점령 3. 청나라의 대원군 석방.

 

1. 천진(톈진)조약 : 여기에서 천진조약의 핵심은 조선에서 동시철병입니다. 또 배경적으로는 천진조약의 핵심은 청일양국이 러시아를 막기 위해 타협을 하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체결한 겁니다.(이 이론은 한양대 최문형 교수의 의견에 기반을 두고 있음.) 어쨌건 주류 학계 입장에서는 주로 천진조약을 한국에서 철수 - 파병시 문서 통고라고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2. 영국의 거문도 점령 : 거문도는 현재 전남 여수시 - 제주도의 정 가운데에 위치한 섬입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내려올 때에 거문도에서 관측이 가능하고, 블라디보스톡 -> 여순, 대련 지역으로 한반도를 빙 둘러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 여순, 대련을 러시아에서 점령하려 해도 그를 방지하는 것입니다.

거문도 사건으로 인해 러시아의 부동항 획득 정책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출항하는 배는 전부 감시를 당하고 있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러시아는 이제부터 유명한 부동항 획득정책 및 해군중심 방위정책을 육군 중심의 방위정책으로 바꿀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시베리아 철도를 건설하여 육군 교통로를 확보해둔 것입니다. 

 

3. 청나라의 대원군 석방


[1984.6~1985.4 청일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러시아의 야욕은 청일 양국의 경계대상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말하자면 청일전쟁 끝난 당시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등장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4년 한러수호조약 체결 이전까지 러시아에 대한 언급이 없어왔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가 자신들의 주적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은 청일전쟁 당시 압도적으로 13천 정도의 우세한 군사력으로도 50일 동안 선전포고 - 개전을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국제 환경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열강의 간섭이 두려워서 선전포고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죠. 왜 선전포고를 못하고 있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없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청일전쟁 당시의 일본 입장에서의 국제관계의 제약이란 무엇인가. 청일전쟁은 어떻게 일어나느냐. 대답하기 쉽지 않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청-일 양국 군이 들어온 과정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것이 청일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청일전쟁의 원인이 뭐냐. 그렇다면 청일전쟁의 개전준비는 언제부터인가.

 

"일본 역사책에서 대부분 이야기하지만 청일전쟁의 시작을 1875년 - 강화도 사건 직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본격적인 개전준비는 갑신정변 1884년 이후 일본 세력이 청에게 눌린 시기 - 보통 1885년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느냐. 일본의 대만침공과 류큐 침공으로 말미암아, 청나라의 대일감정이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어차피 한 번 붙어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청나라가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이에 대응하여 전쟁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이래서 일본 참모총장으로 등장한 가와카미라는 자가 1885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겁니다. 말하자면 전쟁준비가 본격화한 것이 1885년 가와카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본사의 공통적인 서술입니다.
주일 영국 공사 프레이자는 이를 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되어 러시아가 자유롭게 태평양 연안에 접근하기 이전에 일본은 청과의 문제를 해결해둘 필요가 있었다.청과의 문제 - 다시 말해 오픈게임을 완전히 종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일전쟁을 도발했다는 것. 다시 말해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에 오기 전에 청을 정리해버리려 도발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청일전쟁의 원인을 러일전쟁의 개전 준비로서 했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비테와 프레이자가 말하듯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를 위한 예비조치가 청일전쟁입니다." - 최문형

 

대외적으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이 청일전쟁을 일으켰다는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이 의견에 대해서는 깊이 살펴보긴 해야겠습니다. 어쨌건 한국사적 관점에서 직접적인 발화점은 동학농민운동에 개입한 '청-일 양국의 야욕'이라는 서술에 대해서는 '틀렸다'라고 하기에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일본의 야욕'이란 무엇인가? 일본에서는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사람이 탈아론을 주장하게 됩니다. 탈아론은 이 글자 그대로라면, 아시아에서 벗어난다는 겁니다. "[탈아론의] 취지는 구미 열강의 동아시아에 대한 급속한 세력 확대 속에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화하지 못하는 국가는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주변 국가를 버리고 일본은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으로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이나 청에 대해서도 구미 열강이 그들을 대하듯이 해야 하며, 청과의 전쟁도 필요하다면 불사하겠다는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손승철, <<일본사>>) 탈아론의 골자는 일본이 서양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그 탈아론적인 정신이 청일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청일전쟁의 결과로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있지요.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드러난 일본의 야욕은 청나라 땅덩어리를 서구 열강들과 함께 나누어먹겠다는 데 까지 나아갔습니다. 

 

일청강화조약
1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독립 자주국임을 확인한다. 따라서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청국에 대한 조선국의 공헌(貢獻)전례(典禮) 등은 장래에 완전히 폐지한다.
2조 청국은 아래 토지의 주권 및 해당 지방의 성루(城壘)병기 제조소 및 관청 소유물을 영원히 일본에 할여한다.
1. 아래의 경계 내에 있는 펑텐 성[奉天省; 요령성] 남부의 땅
……(중략)……
2. 타이완 전도(全島) 및 그 부속 도서(島嶼)
3. 펑후 열도(澎湖列島), 즉 영국 그리니치(Greenwich) 동경 119도에서 120도와 북위 23도에서 24도 사이에 있는 여러 도서
... 제4조 청국은 군비 배상금으로 고평은(庫平銀) 2억 냥()을 일본국에 지불할 것을 약정한다.
... 앞의 증거로서 양 제국의 전권대신은 이에 기명하여 조인한다.
메이지(明治) 28417, 즉 광서(光緖) 21323일 시모노세키에서 2통을 작성한다.
대일본 제국 전권변리대신 내각총리대신 종2위 훈1(從二位勳一等) 백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일본제국 전권변리대신 외무대신 종2위 훈1(從二位勳一等) 자작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대청제국 흠차두등 전권대신(欽差頭等全權大臣) 태자태부문화전대학사(太子太傅文華殿大學士) 북양대신 직예총독 1등 숙의백(肅毅伯) 이홍장(李鴻章)
대청제국 흠차전권대신 2품정대(二品頂戴) 전 출사대신(前出使大臣) 이경방(李經方) - 일본 외무성, 일본외교연표병주요문서, 1966(출처 : 우리역사넷)

 

이 때 유명한 '삼국간섭'이 일어나 일본이 한 발 물러나게 되지요. 이 삼국간섭의 이유는 일본이 청나라의 영토 이권을 너무 많이 가져가려 그랬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열강들이 청나라 이권을 본격적으로 빼앗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이 선점해버리면 눈엣가시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대만은 다들 탐내고 있는 지역이었고, 요동지역은 러시아 육해군 기지 후보지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최문형 교수는 중요한 점을 하나 더 지적합니다. 

 

"시모노세키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뭐냐. 이 ‘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생각이냐. 조선의 완전독립을 인정하는 의무는 청나라만을 지고 있는 겁니다. 즉, 조선의 자주독립을 승인하는 의무가 청국에만 있는 것이고, '전승국 일본은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청은 조선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포기했으니 조선으로부터 떠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조선은 왜 남느냐. 일본의 식민지감으로 남겨두겠다는 겁니다. 문제는 청은 조선이 독립국임을 확인한다는 것이, 강화도 수호조약에서는 “일본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라고 되어있던 것을 고려한다면, 두 나라가 확인한다는 거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는 청만이 인정하는 겁니다. 이걸 구분을 못하고 그대로 쓰고 있었던 것이죠. 시모노세키 조약과 강화도 조약의 차이점은 바로 이렇게 주어의 차이입니다."

 

"청국은 조선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일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이지요. 이로 인해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군요.

 

곧 삼국간섭, 즉 독일, 프랑스, 러시아 중에 독일이 외교적 문제로 따돌림을 받게 됩니다. 이로서 오히려 독일은 일본 쪽에 가담하게 되고, 일본은 삼국간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박영효가 민왕후에 의해 실각을 당했습니다. 박영효는 이노우에 가오루가 한국 정부에 천거하여 내상으로 만든 인간입니다. 그런데 박영효가 실각되니, 조선 조정에서 큰 친일 세력이 사라진 상황이죠.

 

* 자료 출처 : 최문형 교수 특강, 우리역사넷, 이경원 교수 특강, 뿌리깊은 한국사 - 근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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