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독후감) 하임 G. 기너트, <<교사와 학생 사이>>, p.17~31. 아이들에게 다양성과 개방된 마음을 요구하는 일.

취미와 문화 2023. 11. 27. 20:49

1. 다양성과 소란스러움

 

다양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내 직관으로 추측해보자면, 그건 아마 '소란스러움이 지속되는 상태'일 것이다.

 

나쁘게 표현하자면 '시끄러움'일테고,

'불안정'한 상태이다.

즉, 웬만한 성인이라면 좋아할 정도의 '질서'가 붕괴되는 시점에 다양성이 존재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 다양성을 요구하려면

교사 자신이 먼저 그 소란스러움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는 아이들을 가난으로부터, 폭력으로부터, 구속으로부터, 우울로부터 구출해낼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것을 해결하려는 주체가 된다면, 교사는 자연스럽게 독재자의 길에 접어들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인생 속에서 가난이든, 폭력이든, 구속이든, 우울이든

아무리 부정적인 것일지라도 이미 인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사가 그들을 설득해서 부정적인 것들을 그들의 인생에서 잠시 가려놓을 수 있다고 해도

실상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설득에 성공한다 해도, 오히려 15년 이상 쌓여가던 인생의 탑의 밑부분을 빼는 위협으로 느끼기 마련이다.

'다양성'이란 그렇기에 추구되어야 할 가치라기보다는, 구체적인 도구로서 논의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2. 교사의 봉사와 사랑

 

사랑에는 거리감이 필요하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남녀 간의 끈덕진 사랑을 '본래 하나의 육체를 가진 남녀'를 그리면서 소개하였다.

그런데 실제 인간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란, '만남의 이유'와 '상호 간 거리감'이다.

 

을의 위치에 있는 자가 지나치게 노력하는 모습은 동정을 사기 쉽다.

하지만 갑의 위치에 있는 자가 지나치게 노력하는 모습은 부담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 역시 지나치지 않는 거리감이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왜 아이들에 대하여 어른들은 지나치게 행동해 왔는가?

그것은 충족감 때문이다.

교인이 교회에서 신에게 찬양하다가 자신의 몸을 바쳐 방언을 하듯,

옛날 아버지들이 아이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대화 없이 돈 벌기에만 열중했듯,

옛날 어머니들이 물 한잔 떠 놓고 거기에 하루종일 기도를 했듯,

의미있는 것에의 육체적 헌신과 고통의 다른 한편으로 얻는 그 쾌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서 고생'을 한다지만, 그 반동으로 오는 행복에 중독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중독에 우리는 역할이라는 껍데기를 씌운다.

어떤 교사는 학생에게 헌신하여 얻는 고통과, 그 반동으로 오는 행복에 '교직의 명예로운 사랑'이라는 껍데기를 씌웠다.

 

학생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에 억눌리게 되고, 영악한 그들은 교사를 위해 자신의 '다양성'을 숨겨버릴 것이다.

모든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그것의 결과가 좋으면 '좋은 선생님', 결과가 나쁘면 '나쁜 선생님'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다양성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필자는 '다양성 교육'에 대해 그렇게 강력히 찬성하지는 않는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신'에 취한 자들은 고압적이기 마련이고,

인간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낮게 임하기 마련이다.

인간을 존중하는데, 흑인, 여성, 성소수자, 외국인 구분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3. 교사로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일

 

아이들을 한 명 한 명을 신경쓰지 않는 교사는 '무관심한 교사'인가.

인간은 유한하다.

그렇기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모두에게 관심을 쏟을 수는 있지만,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다.

만족하지 못한 아이들은 '교사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진술할 것이고,

교사는 그것에 아쉬움과 자책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더 잘해야 하는데, 더 못할 뿐이고, 자책한다.

영원한 갈증 속에 열정은 말라갈 뿐이다.

 

다양성은 오히려 불합리의 인정에서 피어난다.

합리적인 이념이 정착할수록, 합리성 바깥은 철저히 무시된다.

교사의 꿈, 바람, 의무, 충족, 욕심은 교실의 규범을 만들어내고

학생들의 이념과 충돌하거나, 그것을 압도한다.

그것은 분명 교육학자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다양성'의 본모습은 아닐테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교사의 마음은 단단하지 않고, 오히려 물렁해야 한다.

교사가 마음을 바꾸어야 할 뿐이다.

아마 교육 제도는 죽을 때까지 다양성을 보장하지 않으면서, 다양성을 교사에게 강요할 것이다.

교사는 상부에서 지시된 다양성을 학생에게 부르짖지만, 마음속으로는 학생들의 질서정연하고 예의있는 모습을 바라는 모순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지역사회는 자연스럽게 교육학계 상부의 입장을 받아들여 '다양성'을 교사에게 요구하는 것이고, 교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구석에 몰리고 만다.

교사는 살아남기 위해, 다양성과 질서라는 도구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읽은 부분에서 추출한 문제의식은 이 정도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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