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카톡 프로필 상태 메세지를 바꾸는 이유에 대한 생각

취미와 문화 2021. 3. 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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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프로필 상태 메세지를 바꾸는 이유에 대한 생각

프로필 상태 메세지로 나쁜 말을 올리고 싶다. 그 이유가 뭘까.

어쩌면 자기만족을 위한 화장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물론 그 의미는 반대지만. 나는 힘들게 살고 있다는 걸, 나 자신도 남들도 확인하게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게 허영심 때문은 아니다. 그저 그게 내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면 됐지, 왜 프로필을 바꾸는가? 어쩌면 의례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내 상태가 바뀌었다는 걸 분명히 해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구분이 된다. 그 구분은 가급적 철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의 상태를 엄밀히 알 수 없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프로필에서 감정을 ‘정확히’ 쏟아내려는 의지는 강박적이기까지 하다.

언제 어디선가, 프로필 사진이 자주 바뀌면 애정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냐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프로필을 바꾸는 사람의 관심 대상이 오롯이 남에게 어필하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별을 한 사람은 나쁜 말을 프로필에 담아둔다. 저격글인 경우도 있고, 신세한탄을 적어두기도 한다. 물론 전자는 남 들으라고 쓴 경우이기도 하지만, 역시 나 자기 스스로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는 왜 나 자신의 나쁜 기분을 글자의 형태나 그림으로 확인하려 할까? 글자의 형태는 내 상태를 합리화시켜주기 때문이 아닐까.

앎은 말로 오롯이 전달될 수 없다. 내가 본 것, 느낀 것, 맛본 것을 온전히 전달해본 적이 있는가? 최소한 주변에서 맛 표현을 잘 못하는 사람도 보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담백하다’라는 묘사는 엄밀하게 맛을 표현하지 못해도, 납득할 수 있는 측면도 있다. 말로 한 표현은 나의 앎을 매우 제한적으로 표현하지만, 굉장히 익숙하게 인정되어 받아들여진다. 한편 어떤 신비적인 ‘접신’, ‘방언터짐’을 체험할 때, 그 경험을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신비적인 경지가 과연 신에 의해 일어난 것인지는 논증할 수 없으며, 논증하려는 순간 그 가치관이 침해받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 생각엔 앎-글의 간극이 곧 하나님-말, 하나님-예수님이라는 상징으로 표현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신이 있음을 앎’이 기독교인들의 마인드 아닌가. (필자는 무종교라 이해해달라.)

코끼리를 ‘코가 길고 가죽이 두꺼운 생명체’라고 표현하면 코끼리를 표현하기엔 부족하지만, 코끼리를 포함하긴 한다. 코끼리는 말 그대로 코끼리라고 약속이 되어 있으므로, 나는 코끼리라는 표현을 쓸 때 ‘표현이 부족했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나 자신의 내밀한 감정에 대해서는 앎과 글이 불일치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한다. 나의 감정은 엄밀히 약속되어있지 않으므로 정의내릴 수 없다. 나의 감정이 ‘슬프다’는 것 이상으로 꼬여있을 때,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슬프다’라는 용어로 내 마음이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 ‘사슴’을 지칭하는 말이 없었을 때에는 사슴의 속성에 대한 분석을 남과 공유할 수는 없었을 게다. 마약 사슴의 존재를 알려야 하는 상황이 온 원시인은 온갖 몸부림과 소리로 그 존재를 알렸을 테다.
그러나 그것 마저도 ‘알리면 동료들이 반응한다’는 약속이 전제되며, ‘사슴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라는 공동의 이익이 있다. 그러나 동료들이 나의 감정과 부딪치지 않게 반응할지 미지수이며, 공유한다고 하여 공동의 이익이 되는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사실을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남에게 직접 말하기가 아니라 스스로 읊조리는 형식의 프로필 상태 메세지를 활용한다.

프로필 메세지가 너무 많이 바뀌는 경우에는, 앎을 글이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박에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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