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정리노트] 19세기 국제사
- 제국주의와 제1차 세계대전
"제국주의"라는 상황
1. 독일의 성장과 견제심리 "제국주의"의 발흥 - 유럽의 동맹들 : 비스마르크 퇴임 후 독일은 식민지 확보를 위해 군비를 증강하게 되었음. 독일이 식민지를 얼마나 많이 가져갔고, 식민지에서 얼마나 이득을 보았는지와는 별개로, 독일의 팽창정책은 전 유럽에 위기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음. 독일은 프랑스가 점유하고 있던 모로코를 직접 공격하기 시작했음(모로코 사건) 당연히 독일에게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따라잡히고 있던 영국 입장에서는 견제심리를 갖고 프랑스의 편에 서서 독일을 견제하게 됨. 러시아는 기존에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으니 당연히 독일에 우호적이지 않았고,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또 독일의 대외 팽창 정책이 매우 거슬렸음. 독일은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음.
독일의 지도자들은 당연히 고립에서 탈출할 길을 모색했음. 그 목적은 그러했으나, 그 수단으로 더 강하게 행동하는 방법을 택하였음. 독일의 기업가와 군인들은 대외팽창을 계속해서 부추겼고, 황제는 못이긴 척 그 이야기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음. 각국은 주인없는 땅으로 보이는 아시아, 아프리카를 먼저 차지하고, 부국강병을 이루는 꿈을 팽창하는 독일에 빼앗길 수 없었음. 그렇게 강대국이 약소국을 군사적으로 정복하는 '제국주의'가 등장하게 됨.
제국주의가 경제에 끼친 영향은 국가 간 상호 경쟁을 부추기게 되었다는 것임. 경제적 자유주의는 뒷전이고, 일단 우리나라를 잘 살게 하기 위해서, 내 식민지에서는 내가 이익을 보아야 한다는 보호무역체제가 성립됨. 관세가 높아지면서 서로 경제적인 장벽이 형성됨.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를 하나라도 놓치면 우리나라는 국민들, 특히 기업가들에게 멍청이 취급 당할 것이 분명함. 즉, 표면상의 자유주의는 사실 자민족주의에 눌리게 된 것임. 내 나라는 대단하고, 우리 민족은 뛰어난 반면, 너희 나라는 후진적이고, 너희 민족은 미개하다는 배타적 민족주의, 인종주의까지 발전한 것이 이러한 연유임.
2. 영국 - 19세기 '대영제국', 20세기 초 탈-제국주의 : 영국은 19세기에 이미 대영제국을 이룩했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음. 그런데 식민지는 생각보다 돈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적자였음. 공무원들 월급 주는 것, 군대를 파견해서 통제하는 것 등. 생각보다 비합리적인 것이었음. 그래서 당시 이집트, 이라크 등을 독립시키고, 인도는 토착세력에 권한을 이관하고, 아프리카는 간접통치로 전환하였음.
3., 19세기 말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팽창 :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 중국, 아프리카 여러 지역 등에 공격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해나가려 했음.
4. 19세기 말 미국 - 유럽에 대한 불간섭 : 미국은 19세기 말에는 아메리카 대륙에 신경쓰기 바쁨. 아메리카만 장악해도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음. 1898년 에스파냐와 전쟁해서 그 식민지 쿠바 등을 얻었고, 하와이, 그리고 중국과 필리핀 쪽으로 진출해나갔는데, 그 기본적인 기조는 시장을 늘리려는 것이었음.
19세기 말 영국의 종단정책 : 소위 "대영제국"의 아프리카 차지
1. 19세기 수에즈 운하 지분 분쟁 : 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아라비아 해를 연결하는 운하임. 수에즈 운하는 기존에 이집트 왕과 프랑스 투자자들이 공동으로 뚫었는데, 영국이 그것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음. 그도 그럴 것이 아프리카를 빙 둘러 돌아가야 하는 무역로를 단번에 뚫어주는 고속도로 같은 곳이었음. 이집트는 마침 경제위기를 맞은 상태였고, 영국에 수에즈 운하 보유 지분을 팔아넘기게 되었음. 이로써 이집트 민중들은 영국의 경제적 침략에 저항하게 되었음.
2. 1898년 수단 남부에서 파쇼다 사건 : 1881년 프랑스가 튀니지를 점령했을 때 북서쪽에서 동쪽으로 횡단하여 항로를 이으려 했음. 한편 영국은 북쪽에 확보한 수에즈 운하에서 아프리카 남쪽으로 이으려 했음. 그 양 축의 접점이 바로 파쇼다였는데, 결국 1904년 영불협상에서 프랑스는 수단을 영국에게 주었고,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장받게 되었음. 이로서 영국은 종단정책에서 중간 지점을 확보하였음.
파쇼다 사건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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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세기 말부터 1902년까지 보어전쟁 : 영국의 종단정책의 종점은 아프리카 최남단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음. 이 지역에 본래 네덜란드 출신 보어인들이라는 백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곳에 영국이 쳐들어가 차지했음.
독일의 팽창 : 3B 정책, 삼국동맹 vs 삼국협상
파쇼다 사건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충돌했을 때, 독일은 영국 편을 들었음. 그 이후로 영국은 대체로 프랑스와 라이벌 구도 하에 독일 편을 들었음. 독일 황제가 모로코의 독립 투쟁을 지원했을 때, 프랑스가 반발하는 한편, 영국은 독일을 지지했음. 그런데 제국주의 팽창에 관심없던 독일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경쟁에 뛰어들고, 베를린-터키의 비잔티움-중동의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3B 정책을 추진하면서 영국-독일 관계가 긴장 속으로 들어가게 됨.
1911년에 모로코에 내란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 독일인들은 모로코 내 독일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함을 배치하게 되고 영국은 점점 더 경계하게 됨. 결국 라이벌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손을 잡게 됨. 즉, 모로코 사건을 계기로 대외관계가 급변하게 된 것임. 기존에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유럽의 세력균형을 꾀하며, 독일은 팽창하지 않았던 소위 '비스마르크 체제'가 비로소 붕괴하게 된 것임.
모로코 위기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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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세력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1881년 이래 '3국 동맹', 1882년 이래 '3국동맹'이라는 것이었음. "1878년의 베를린 회의에서의 조정은 러시아를 억제하고 오스트리아와 영국에 유리한 것이었다. 그 결과 러시아는 독일과 멀어지게 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 독일은 더욱 접근하여 1879년에는 양국 사이에 상호방위를 위한 비밀군사동맹(2국동맹)이 맺어졌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독일과 멀어짐으로써 프랑스에 접근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러시아를 설득하여 1881년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에 3제동맹을 성립시켰다. 그 내용은 동맹국중 1국이 제4국의 공격을 받는 경우 나버지 동맹국은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고, 투르크에 대하여는 서로 사전에 협의한다는 것이다. 때마침 이탈리아는 눈독을 들이고 있던 튜니지아를 프랑스에 빼앗겨 오스트리아와 독일에 접근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이용하여 1882년 주로 프랑스를 대상국으로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동맹을 맺었다. 한편 3제동맹은 3년 기한이었기 때문에 1884년 이를 갱신하였으나, 1887년에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가 악화하여 갱신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러시아가 프랑스에 접근하지 않게 붙잡아 두고 싶었던 비스마르크는 같은 해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으로 알려진 비밀협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양궁의 어느 한 쪽이 제3국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경우 다른 조정국은 호의적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었으나, 독일이 프랑스를, 그리고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어있었다."(<<서양사개론>>)
비스마르크 체제는 어디까지나 19세기의 이야기이고, 이제는 20세기에 접어들었음. 독일의 팽창은 프랑스를 억제하기 위한 3국동맹 역시도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음. 1894년에 러시아와 프랑스는 (재보장조약에 위반이 되는지는 확인해보아야 하겠지만) 동맹을 맺게 되고, 1904년에 영국과 프랑스 협상을 체결하고, 1907년에 영국과 러시아가 서로 협상을 맺으면서 삼국협상을 맺게 됨. 이런 상황 속에서 모로코 사건이 터지게 되니, 삼국동맹 vs 삼국협상이라는 구도가 형성된 것임.
20세기에 들어서면 오스만 제국도 시들시들해져갈 무렵임. 발칸 반도에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도 동시에 시들시들해지고, 발칸반도 국가들이 하나둘씩 독립을 하게 됨. 문제는 이 발칸반도는 다민족 지역인데, 각 국가들이 민족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는 것임. 크게는 독일-오스트리아 계열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 중심의 범슬라브주의가 충돌하고 있었음. 게르만주의인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를 병합해버리니, 동쪽의 세르비아가 민족적인 분노를 표하게 됨. 그 절정이 바로 1914년 6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 방문하자 세르비아 청년에게 암살을 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인 것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에는 황태자 부부 암살에 대한 보상 문제를 두고 팽팽하게 갈등하고 있었음. 범슬라브 민족인 러시아의 지원을 받고 있던 세르비아가 내정간섭 관련 굴욕적인 조건을 거부하자,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삼국동맹 vs 삼국협상이 성사됨.
제1차 세계대전 : 파리강화회의, '민족자결주의', 결국 베르사유 조약
결과적으로 삼국동맹 측, 독일 쪽의 패배였음. 승전국 측은 유명한 '파리강화회의'를 열고 윌슨은 14개조 평화 원칙을 내세워 전후 처리 원칙으로 내세움. 이 중에 5조는 흔히 '민족자결주의' 구절로 유명함. 이걸 믿고 삼일운동을 일으키고,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 선생을 보냈던 것임.
윌슨의 14개조
2. 평화시와 전시를 막론하고 영해 밖에서 항해의 자유는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 다만 국제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취해진 국제적 조치에 의해 해양이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봉쇄되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3. 평화를 희망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상호 협력하는 모든 국가들 사이에는 가능한 모든 경제적 장벽을 없애고 동등한 무역 조건을 확인해야 한다.
4. 각국의 군비는 상호 보장 아래 자국의 안보에 필요한 최소 수준으로 감축해야 한다.
5. 식민지에서 주권과 같은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 당사자인 주민들의 이해는 법적 권리의 결정을 기다리는 정부의 정당한 청구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 이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기반 위에서 모든 식민지 문제는 자유롭고 열린 자세로, 절대적으로 공평하게 조정해야 한다.
...
8. 프랑스의 모든 영토는 해방되어야 하고, 침략당한 지역은 회복되어야 한다. 또한 1871년 알자스-로렌 문제에 관해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부당 행위는 거의 50년 동안 세계 평화를 교란했던 것인 만큼 다시 한번 모든 나라의 이익을 위해 평화가 확보될 수 있도록 시정되어야 한다.
9. 이탈리아 국경을 재조정하는 문제는 확실히 인정될 수 있는 민족적 경계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
1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민족들에 대해 우리는 그들의 국제적 지위가 보호되고 보장되기를 바라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도록 기회가 아무런 제약 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
14. 강대국과 약소국을 막론하고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전을 상호 보장할 목적으로 특별한 규약 아래에 전체 국가의 연맹체가 결성되어야 한다.
『The Papers of Woodrow Wilson』45, 1917-1918, 536~538쪽; 우리역사넷; 전문은 다음을 참조.
우리역사넷 (history.go.kr)
우리역사넷
윌슨의 14개조 1. 강화 조약은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또 공표되어야 한다. 그 체결 이후에는 어떠한 종류의 비밀 회담도 있어서는 안 된다. 외교는 항상 솔직하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contents.history.go.kr
그러나 당연히 승전국들은 전쟁에서 입은 인적, 물적 피해가 막심하므로 얻어낼 것은 얻어내려 했음. 그래서 맺어진 것이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이었음. 베르사유 조약은 무거운 배상금으로 유명함. 이런 판에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를 끼워줄 리가 없었음.
- 독일의 해외 식민지에 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을 연합군과 그 협력국에 넘겨준다.
- 독일에서 잠수함의 건조와 취득근 금지된다. 이는 상업적 목적을 위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 독일은 연합국과 그 협력국의 최종 청구액이 확정되기 이전에, 비상 위원회가 정하는 방법에 따라 이들 나라의 산업 복구를 위해 시금히 필요한 200억 마르크 금화에 해당하는 돈을 1921년 4월까지 지불한다. - 1919년 베르사유 조약(동아출판 한국사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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