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기출 한국사

[임용 기출 한국사 고대] 쟁장사건과 빈공과 - 7세기 말 ~ 8세기 초 동아시아 국제 질서

취미와 문화 2021. 5. 2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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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와 전투를 하던 신라로서는 계속해서 군비확장과 대내적인 체제정비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일본을 인국(교린관계)로 여겼다면, 일본은 신라를 조공국(번국)으로 본 것이죠. 그래도 신라는 계속해서 교역을 했는데, 당시 7세기~8세기 초에서는 당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상태였기에, 신라는 국제관계의 취약점을 그렇`게라도 보완했던 것이죠. 그런데 만약 이 관계가 개선이 된다면 일본에 굳이 우호적으로 손을 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새로운 국제 관계의 변수가 바로 발해의 등장입니다. 발해가 등장하고 발해가 강성한 덕에 신라는 당과의 연합을 성공합니다. 신라의 당의 발해에 대한 협공에 실패하게 되었지만, 당과의 관계를 개선했다는 것만으로 국제적 지위가 올라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국제관계에서 아쉬운 점이 없으니, 신라는 일본과의 관계에서 한 발 두 발씩 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양국의 관계는 나빠지게 되었죠.

그런 한편 당나라는 북만주에 있던 다른 민족들과 신경전을 벌입니다. 발해 북쪽에 있던 이들인 흑수말갈은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됩니다. 발해는 이에 가만히 있지 않으니, 당의 배후에 있는 돌궐과 일본과 손을 잡습니다. 8세기 초 동아시아 세계 세력도 [당나라+흑수말갈+신라 vs 돌궐+발해+일본]

 

臣某言. 臣得當番宿衛院狀報, 去乾寧四年七月(內), 渤海賀正王子大封裔, 進狀請許渤海居新羅之上. 伏奉勑旨, 國名先後, 比不引強弱而稱. 朝制等威, 今豈以盛衰而改. 宜仍舊貫, 準此宣示者.
신 모는 아뢰나이다. 신이 당번(當番) 숙위원(宿衛院) 장보(狀報)를 보니, 지난 녕(寧) 4년(효공왕 1, 897년) 7월 중에 발해 하정사(賀正使; 축하 사절)인 왕자 대봉예(大封裔)가 장(狀)을 올려, 발해가 신라 위에 있도록 허락해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삼가 이에 대한 칙지(勅旨)를 받들대, “국명(國名)의 선후는 본래 강약에 의해서 따져 칭하는 것이 아니다. 조제(朝制)의 등위(等威)를 어찌 성쇠(盛衰)로 고칠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구례(舊例)대로 할 것이니 이에 선시(宣示)를 따르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최문창후문집

 

특히 발해와 신라, 일본과 신라 사이에는 당나라에서의 자리 내지 서열 싸움을 하곤 했는데, 그것을 '쟁장(爭長)'이라고 합니다. 

崔彦撝, 初名愼之, 慶州人. 性寬厚, 自少能文. 新羅末, 年十八, 游學入唐, 禮部侍郞薛廷珪下及第. 時浡海宰相烏炤度子光贊, 同年及第. 炤度朝唐, 見其子名在彦撝下, 表請曰, “臣昔年入朝登第, 名在李同之上, 今臣子光贊宜升彦撝之上.” 以彦撝才學優贍, 不許.
최언위(崔彦撝)는 초명(初名)이 최신지(崔愼之)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인자하였으며, 어렸을 때부터 글짓기를 잘하였다. 신라 말 나이 18세에 당에 가서 유학하였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설정규(薛廷珪) 아래에서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발해(浡海) 재상(宰相) 오소도(烏炤度)의 아들 광찬(光贊)이 같은 해에 급제하였다. 오소도가 당에 조회하러 왔다가 자신의 아들 이름이 최언위 아래인 것을 보고 표문을 올려 청하기를, “신이 옛날에 본조에 들어와 급제하였는데, 이름이 이동(李同)의 위에 있었습니다. 지금 신의 아들 광찬(光贊)도 마땅히 최언위 위에 올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최언위의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 고려사 최언위전

 

빈공과는 과거제의 일환입니다. 과거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거시험은 인재등용에 있어서 개방성, 신분상승 등을 뜻합니다. 신분상승의 구멍이 있다면 사회갈등을 줄여주는 역할도 하지요. 최소한 신라의 최치원이 6두품 출신으로서 당의 빈공과에 급제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 당의 입장에서 과거시험 빈공과는 국제화를 의미합니다. 과거시험 과목이 경전 공부인데, 시무책을 올리거나 시를 쓰는 것인데, 고려에서 그것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고 국제화의 일환입니다. 동아시아 질서의 국제적인 표준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밑줄 친 부분은 시험에서 문제로 나온 부분.)

 

* 참고 : 노태돈 - <삼국통일전쟁과 그 영향> 강의 / 우리역사넷 / 전공역사 2019년 A형 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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