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기출 한국사

[임용 기출 한국사 고대] 신라 귀족들의 반란

취미와 문화 2021. 5. 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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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 가~마 중 옳은 것은?

국학 설립 ~ (가) ~ 정전 지급 ~ (나) ~ 녹읍 부활 ~ (다) ~ 독서삼품과 시행 ~ (라) ~ 청해진 개설 ~ (마) ~ 원종 애노의 난 발생

 

가 : 왕의 장인인 김흠돌의 무리가 반란을 꾀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나 :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을 상대등 김양상 등이 진압하였다.

다 : 일길찬 대공과 대아찬 김융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라 :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했던 김우징이 김양 등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마 : 김헌창이 원성왕 계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 국학 설립 : 신문왕 2년 682년

* 정전 지급 : 성덕왕 21년, 722년

* 녹읍 부활 : 경덕왕 16년 753년

* 독서삼품과 : 원성왕 4년 788년

* 청해진 개설 : 흥덕왕 3년, 828년

* 원종 애노의 난 : 진성여왕 3년, 889년

 

가 : 왕의 장인인 김흠돌의 무리가 반란을 꾀하다가 붙잡혀 처형되었다. (오답)

* 김흠돌의 난은 신문왕이 딱 왕위에 올랐을 때에 일어났던 사건. 신문왕 원년의 일입니다. 김흠돌의 난의 배경을 알지 못하면 꽤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무열왕계 전제정치를 이어가던 문무왕, 그리고 그에 반발하던 태자비의 아버지인 김흠돌 세력이 이전부터 계속해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즉, 김흠돌은 문무왕 때 대표적인 진골귀족이었습니다. 김흠돌 세력은 그런 와중에 문무왕의 죽음이라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김흠돌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 난의 목적은 문무왕 때에 중앙집권화로 잃어갔던 진골세력의 위세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왕 원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을 당하면서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신문왕은 더더욱 강한 왕권강화를 추진했던 인물로 유명하지요.

 

나 : 이찬 김지정이 일으킨 반란을 상대등 김양상 등이 진압하였다.(오답)

*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

8살의 혜공왕이 왕위에 오르고, 혜공왕의 모후 만월부인[왕당파]이 혜공왕의 즉위와 함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일으킨 중요한 변화란 역시 대당외교(對唐外交)의 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당과의 관련 속에서 경덕왕 말 이래 몰락하고 있던 왕당파들이 세력회복을 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혜공왕 7년에 성덕대왕신종을 완성했을 때, 진골귀족 측 김옹과 김양상이 그 주조의 담당자였다는 사실이 진골귀족이 여전히 강건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김양상은 혜공왕 10774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에 올랐습니다. 김옹은 시중, 김양상은 상대등에 있으면서 진골귀족 세력은 정치적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진골귀족 측은 본격적으로 대당외교와 한화정책을 부정해나갔고,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구축하려 했지요. 이 반란은 왕당파의 전제주의 시도에 대한 반대였지요.

 

1. 혜공왕 4768대공의 난 : 우선 혜공왕 초기부터 애초에 귀족들의 반란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혜공왕 4(768) 대공(大恭)의 난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혜공왕 초년의 왕당파들에 대하여 귀족세력들의 정치적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공의 난은 혜공왕 시기 귀족반란의 시작입니다. 

 

2. 반 김양상 반란들 : 반왕파의 대표자 격인 김양상이라는 자가 혜공왕 10년에 상대등이 되어 이 즈음에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상대등이란 법흥왕 때 처음 만들어졌던 신라 귀족 회의체의 구성원인 '대등'들의 으뜸이었습니다. 하지만 법흥왕 때 왕권이 강했기에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도 왕을 보좌하는 역할에 불과했지요. 그런데 신라 하대에 들어오면서 진골귀족들이 부상하고, 그 대표인 상대등은 왕권의 강력한 대항마가 되었습니다. 혜공왕 12년 776년에는 이미 반왕파 귀족들이 실권을 잡았습니다. 경덕왕 때에 한화정책을 명분으로 했던 왕권강화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경덕왕대에 단행한 개혁으로 개편한 관제와 행정 구역은 혜공왕 12년에 모두 복구되었습니다.

대공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반왕파 김양상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왕당파로 보이는 이들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770년(혜공왕 6)에는 대아찬(大阿飡) 김융(金融)의 반란, 775년(혜공왕 11) 6월에는 김은거(金隱居) 반란, 775년 8월 염상(廉相)과 시중 정문(正門)의 반란. 이 중 김은거는 전(前) 시중으로 혜공왕의 정치를 측근에서 도왔던 인물이고, 정문 역시 현직 시중으로서 친왕적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3. 혜공왕 4768(?) ‘96 각간의 난: 그러니까 각간은 제1품 관등입니다. 1품이 96명이라는 것인데 말이나 되는 이야기일까요? 아래의 역사학자들의 자료를 보면, 실제로 진골귀족들이 너무 많이 증가하고 있었다는 것은 옳은 것 같고, 넘쳐나는 진골귀족들이 소수의 관직을 독차지했다는 것도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96각간'이라는 표현은 실제 1품이 96명이라기 보다는 반란의 규모가 컸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 같습니다. 

"당시 골품제사회는 진골귀족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문제점을 드러내었다. 진골귀족의 수가 늘어나게 되자 王(왕)의 近親(근친)일지라도 官界(관계) 진출에 일정한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즉 왕의 從弟(종제; 사촌동생)나 從叔(종숙; 아버지의 사촌 형제)의 官等(관등)이 舍知(사지; 17관등 중 13번째)로서 비교적 낮았고, 관직도 縣令(현령)·長史(장사) 등 비교적 하위 관직이었던 사례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진골귀족의 포화상태를 반영하여 준다. 이에 따라 왕실 및 진골귀족은 여러 家系(가계)로 分枝化(분지화)되었다.
 진골귀족의 증가는 또한 자체 내의 도태작용을 수반하였다. 그리하여 진골귀족의 각 가계 사이에 왕위를 둘러싼 정권쟁탈전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정권쟁탈전은 혜공왕대에 일어난 여섯 번의 반란을 시작으로 하여 본격화되었다. 왕위쟁탈전에 참가했다가 패배한 가계는 권력에서 소외되어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도태에 의해서 몰락한 진골귀족의 가계는 지방의 연고지로 낙향하여 지방세력으로 전환하였다. 惠恭王 4년에 일어난 大恭(대공)의 亂(난)에서 王都(왕도) 및 五道(5도) 州郡(주군)의 96角干(각간)이 서로 싸웠다. 대공을 비롯한 96각간은 진골귀족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만큼, 이미 중대말에도 전국 각지에 진골귀족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830년대 후반의 치열한 왕위쟁탈전을 거치면서 몰락한 진골귀족의 낙향은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신편한국사)

"반란의 주모자인 대공의 관직도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처럼 신라 최고 관등인 각간(角干)이 아닌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라 일길찬(一吉飡)이며, 함께 반란을 일으킨 대공의 동생 대렴(大廉)의 관직은 아찬(阿飡)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유사>>에 기록된 96각간이라는 표현 역시 96명의 각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각간이 신라 최고위 관등이었던 만큼 각간 관등을 지닌 자가 96명이나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96각간이라는 표현은 각간 96명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당시 반란에 동조한 인원과 이를 진압하는 인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96각간의 난, 신라 중대의 종말을 알리다")

 

3. 혜공왕 16780김지정의 난: 마침 이찬인 ‘김지정의 난’이 발생했고, 혜공왕은 이 골칫덩어리인 상대등 김양상 등을 제거해줄 줄 알았으나, 김지정이 오히려 패배하고 맙니다. 김양상은 김지정의 난을 제압하고 혜공왕까지 은근슬쩍 죽여버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김지정이 혜공왕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쨌건 김양상이라는 인물이 후임자 선덕왕이 됩니다. 혜공왕을 마지막으로 신라 중대가 마무리되는 것입니다. 신라 중대의 무열계가 끝나버리고, 내물마립간 계통의 왕실 방계가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혜공왕이 죽으면서 신라 중대의 왕권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는 것까지가 되겠습니다.여기까지가 신라 중대입니다.

 

다 : 일길찬 대공과 대아찬 김융이 차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 반 김양상 반란들 중 하나

 

라 : 왕위 계승전에서 패배했던 김우징이 김양 등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오답)

*  흥덕왕은 후계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죽고 난 후에 신라 귀족들 간에 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흥덕왕의 사촌동생 김균정이 왕궁으로 들어가 왕이 되려 하였으나, 김균정의 조카 김제륭이 무력으로 그를 내쫓고 왕위에 올라 희강왕이 되었다(836). 그러나 얼마 안 되어 희강왕을 즉위케 한 상대등 김명이 다시 군사를 일으켜 희강왕을 스스로 목매 죽게 하고 왕이 되니 민애왕이다(838). 837년(희강왕 2년)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김우징(金祐徵)이 청해진에 피신해 오자 장보고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듬해 김우징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신라 경주로 쳐들어가, 839년에 민애왕(閔哀王, 재위 838~839)을 죽이고 김우징을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 때 청해진 대사인 장보고 에 의지하고 있던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이 장보고의 원조를 받아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신무왕이 되었다(839). 신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이 즉위하자 장보고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고자 했으나 중앙 귀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841년(문성왕 3년) 장보고 세력에 불안을 느낀 조정에서 보낸 자객 염장(閻長)에 의해 살해되었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적 부를 보유한 장보고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 귀족이 장보고를 제거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장보고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해상 세력은 이후 신라 하대 호족 세력의 등장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뿌샘 근대 편 + 우리역사넷)

이렇게 진골귀족들의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고, 정치에 혼란은 더해갔다.

 

 

마 : 김헌창이 원성왕 계의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고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오답)

다시 혜공왕 반란으로 돌아가서, 혜공왕 사후에 왕이 된 김양상(선덕왕)은 일찍 죽고, 그 동료 김경신(원성왕)이 왕이 되었습니다. 본래 화백회의에서 지목된 인물은 김경신(원성왕)이 아니라, 김주원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김주원은 왕을 즉위해야 하는데, 강물이 불어서 넘어오지 못했고, 그 틈에 진골귀족 김경신(원성왕)이 왕에 오른 겁니다. 설마 강물 때문이라기보단, 왕위 계승분쟁에서 김경신이 승리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성왕(元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나물왕/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의논한 후 왕의 조카뻘 되는 주원(周元)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이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큰 지위는 본래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 본디부터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를 가졌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단번에 일치하여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10 원성왕 원년 춘1월 13일

 

그렇게 억울하게 왕위계승에서 밀려났던 김주원, 그의 아들 김헌창은 왕위계승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원성왕 후대의 헌덕왕 때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유명한 신라 하대를 대표하는 반란 '김헌창의 반란(822, 헌덕왕 14)'입니다. "웅진도독으로 나가 있던 김헌창은 웅주를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국호 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하고 한 때 기세를 떨쳤으나, 왕군에게 진압되었으며, 왕 17년(825)에는 헌창의 아들 범문이 또 다시 한산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우려다가 역시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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