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기출 한국사

[임용 기출 한국사 고대] 경덕왕의 업적

취미와 문화 2021. 5. 27.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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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제 내용 : 제시문에 해당하는 왕에 대한 내용으로 옳은 것은?
"상대등 김사인이 해마다 재이(災異)가 자주 나타나는 것을 이유로 상소하여 시정의 득실을 강하게 비판하니 왕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중시를 시중이라 개칭하고 국학에 제업박사(諸業博士)와 조교를 두었다." - 삼국사기

ㄱ. 독서삼품과를 설치해 관리를 선발하였다.
ㄴ.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였다.
ㄷ. 주, 군, 현의 고유지명을 중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ㄹ. 녹읍을 없애고 매년 조를 주되 차등을 주었다.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에는 국학을 태학감으로 고치고, 박사와 조교 등을 두어 유교교육을 더욱 강화했으며, 교육과목을 3과(禮, 史, 文)으로 나누어 가르쳤는데,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목으로 하고, 5경과 문선은 선택과목으로 했다. 이것은 유교교육이 한층 전문화되어 가는 추세를 보여준다. 또 경덕왕 때에는 관직 이름과 주군현의 이름을 중국식 한자로 바꾸었다. 예를 들면 사벌주는 상주로, 완산주는 전주로 바꾼 것이다. 하지만 경덕왕 때에는 귀족층의 반발로 다시 옛날로 돌아간 것도 있었다. 751년(경덕왕 10)에 2천 칸이 넘는 불국사를 짓는데 국가가 후원한 것이나, 757년(경덕왕 16)에 관료전을 폐지하고 녹읍을 부활한 것이 그것이다. 중시를 시중으로 개칭한 것은 747년(경덕왕 6)에 이루어졌다.

ㄱ. 독서삼품과를 설치해 관리를 선발하였다.(오답) 원성왕
* 독서삼품과 : 독서 성적에 따라, 3품으로 나누게 하는 인재등용책이다. 788년, 즉 원성왕 4년에 국학에 마련한 제도인데, 국학의 교과와 5경, 3사, 제자백가 등으로 인재를 등용한 것으로 보인다. 독서삼품과의 정신은 골품제보다는 유교적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꾀한 것이지만, 골품제의 한계로 인해 흐지부지되었다.

ㄴ.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를 창건하였다. : 경덕왕
* 불국사와 석굴암 : 통일신라의 미술을 대표하는 것이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경덕왕 때에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맞다. 변태섭 선생님은 이 경덕왕 때가 신라 문화의 부흥기로 보고 있는데, 그 근거로 이 불국사와 석굴암을 들었다. 어쨌건 이 문화재들은 혜공왕 때 완공되었다.

ㄷ. 주・군・현의 고유 지명을 중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 경덕왕
* 신편한국사에서는 이 경덕왕의 제도 개혁 전반을 한화정책이라고 명명하였다. 어쨌건 한화정책의 일부로서 주, 군, 현의 고유 지명을 중국식 이름으로 바꾸어 완산주를 전주로 바꾼 사례가 있다.

ㄹ. 녹읍을 없애고 매년 조(租)를 주되 차등을 두었다. : 신문왕
* 녹읍 부활 : 이 선지는 굉장히 낚시성이 짙은 것이다. 녹읍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경덕왕을 떠올릴 수 있지만, 조를 주되 차등을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 '관료전'을 지급한 것에 대한 내용이다. "통일 이후 중대의 전제왕권은 이들 귀족의 경제력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을 강행하였는데, 687년(신문왕 7)에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주고, 689년에는 녹읍을 폐지하는 대신 세조(歲租)를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이와 같은 녹읍의 폐지와 관료전 및 세조의 지급은 중앙정부가 귀족들의 직접적인 백성 지배를 배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에 귀족들이 강력히 반발하여 757년(경덕왕 16)에는 다시 녹읍이 복구되고 관료전과 세조가 폐지되었는데, 신라 후기의 귀족들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사치스런 향락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가졌기 때문이다."(한국사통론)


경덕왕이 즉위하고 [진골귀족측 상재 출신 김순정의 딸-첫째 부인 삼모부인]이 아들을 못 낳았습니다. 결국 경덕왕은 후사를 얻기 위해서, 첫 부인 삼모부인을 출궁하고 새 부인을 얻는데 바로 [왕당파 쪽에 가까운 김의충의 딸-둘째부인 만월부인]입니다.
성덕왕 때에는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의 땅을 사여받는데, 이것은 발해를 공격한 것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것에 큰 역할을 했던 김의충이라는 자 역시 출중한 진골귀족이었고, 김의충의 딸 역시 경덕왕의 둘째 왕비가 되었던 만월부인입니다. 그러나 후사가 없다고 하여 경덕왕에게 출궁당한 첫 왕비 삼모부인의 세력이 여전히 강성했습니다. 사실 진골귀족 측 첫 부인 삼모부인은 황룡사종을 주조하는 데에 막대한 재화를 댔고, 삼모부인과 남매관계로 생각되는 김옹이라는 자도 역시 시중의 자리에 올랐습니다.(뿌리깊은 한국사 - 통일신라 및 발해 편.)

1. 대당외교를 통한 한화정책과 왕권강화 : 경덕왕의 기본적인 노선은 한화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증왕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식 제도를 도입해서 뭔가 변신을 시도해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진골귀족 측 상대등을 물러나게 하고, 적극적인 왕당파인 신충(信忠)을 상대등에 임명해버립니다. 상대등은 귀족들의 수장인데 말이죠. 진골귀족들의 반발은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일단 한화정책의 일환으로 이와 같은 업적들이 나옵니다.
1) 중시 -> 시중 : 집사부 중시라는 장관의 이름이 중국 식 시중으로 전환되었습니다.
2) 국학 -> 태학 : 신라의 국학이 태학으로 바뀌었습니다.
3) 지명과 관직명이 한자식으로 : 그리고 지명, 전국의 지명과 관직명 등등이 전부 다 한자식으로 바뀌었어요. ‘소부리주’라는 게 ‘사비성’ 이런 식으로, 완산주가 전주로 바뀌는 등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2. 녹읍부활 : 경덕왕 16년 - 757년에 한화정책에 대한 반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경덕왕 때 관료전(官僚田)과 세조(歲租)가 다시 녹읍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혁파했던 녹읍이 이때 다시 부활한 거예요. 이것을 보고 귀족의 힘이 강화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관료전이 지급되는 한편, 녹읍은 여전히 남아있어 이중적인 수취가 이루어졌기에 그 폐단을 고치기 위함이라는 해석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본 출처는 확인해볼게요.)

3. 진골귀족 측 김옹 중시 임명 :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어느덧 끝나고, 경덕왕 19(760)에 경덕왕과 대립되는 성격을 가진 김옹(金邕)이 중시에 임명된 사실에서 경덕왕의 왕권 강화가 끝나고 말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중대 '중시' 직책이란 왕이 원하던 정책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 김옹과 같이 왕과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즉 이제는 더 이상 경덕왕이 원하는 대로의 정책을 마음대로 수행해 나갈 수 없으며, 나아가 경덕왕이 행한 여러 정책이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골귀족세력의 정권장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김옹이 중시가 된 정치적인 사건은 반전제주의세력에게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김옹이 중시에 임명된 경덕왕 19년(760)은 신라사에 있어서 하나의 주요한 전환기입니다.
훗날 김옹은 김양상이라는 자와 함께 혜공왕 7771년에 완성될 때에 성덕대왕신종 조성 사업에 최고 책임자로 임명될 정도로 강성했습니다. 김순정의 집안인 만월부인 세력과 김옹 세력은 전제왕권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3. 불교진흥을 통한 왕권강화 - 불국사, 석굴암 : 이와 같은 한 업적과 더불어 또 하나의 업적이 있다면 역시 왕권 강화에는 불교입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나라라는 이름을 지닌 절, 불국사를 건립했고요. 그리고 그 옆에다 석굴암이라고 하는 것이 김대성이라는 분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이 때 모두 경덕왕 시기인데, 변태섭 선생님은 이 때가 신라 문화의 절정이라고 말씀하시네요.

4.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 주조 시작 : 아버지인 성덕대왕을 위해 신의 종을 만듭니다. 완성은 좀 뒤에 혜공왕 때 됩니다만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주목해 봅니다. 다만 그 주도자는 진골귀족 측의 김옹과 김양상이었습니다. 왕권강화는 왕권강화일 수 있지만, 해석의 여지가 다양합니다.

종합하자면, 경덕왕은 한화정책과 중앙집권을 열심히 노력했는데 노력이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진골귀족 측의 김옹이 권력을 잡게 되었고, 김옹-김양상 등 반-전제주의 귀족세력은, 만월부인과 왕당파의 활동을 최대한 억압한 것이지요.

* 신편한국사, 우리역사넷, 김정현의 2018 한국사 종합완성, 전공역사 2013년 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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