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기출 한국사

[임용기출 한국사 고대] 신라의 6두품, 김헌창의 난

취미와 문화 2021. 5. 2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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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녹진(祿眞)은 성(姓)과 자(字)를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일길찬(一吉湌) 수봉(秀奉)이다. 녹진이 23세에 비로소 벼슬하여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헌덕대왕(憲德大王) 10년(818) 무술(戊戌)에 집사시랑(執事侍郎)이 되었다. (헌덕왕) 14년(822)에 국왕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으므로 동복(同腹)의 아우 수종(秀宗)을 태자(太子)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게 하였다. 이때 각간(角干) 충공(忠恭)이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정사당(政事堂)에 앉아 내외 관원을 선발하는 일을 하고 퇴근하였다가 병에 걸렸다.
녹진이 문병하여 말하기를, "공(公)의 병은 지극한 말로써 고칠 수가 있습니다. 목공이 집을 짓는데 재목이 큰 것은 보와 기둥을 삼고, 작은 것은 서까래를 삼으며 눕힐 것을 세울 것이 각기 적당한 자리에 들어간 뒤에야 큰 집이 이루어집니다. 어진 재상이 정사(政事)를 행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니, 큰 인재는 높은 관직을 주고 작은 인재는 가벼운 소임을 준다면, 조정과 지방에 빈직위가 없고, 직위마다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며, 상하의 질서가 정해지고 현명한 자와 불초한 자가 갈릴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왕정(王政)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충공이 입궐하여, "신(臣)이 녹진의 말을 들으니 약(藥)과 같았습니다"라고 하며, 그 이야기를 일일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이렇게 직언하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부군에게도 이를 알리라."라고 하였다. 부군이 이 말을 듣고 들어와서 하례하기를, "인군(人君)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하였습니다. 이 역시 나라의 아름다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같은 해 ( 나 ) 가 반란을 일으키니 군사를 충돌하여 토벌하였는데, 녹진이 종군하여 공이 있었다. 왕이 그에게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주었으나 사양하지 않고 받지 않았다. - 삼국사기 열전.

'6두품' 성립 후 진골과 두품 표 : 뿌리깊은 한국사 - 통일신라 및 발해 편.

신분 12 관등
진골 1. 이벌찬
2. 이찬
3. 잡찬
4. 바진찬
5. 대아찬
비진골(두품 층) 6. 아찬(중아찬~4중아찬)
7. 일길찬
8. 사찬
9. 급찬
10. 대나마
11. 나마
12. 대사
13. 사지
14. 길사
15. 대오
16. 소오
17. 조위

 

 

(가) '녹진'이라는 인물에 대한 분석 : 녹진은 대아찬 관등을 하사받고 사양을 했는데, 이게 정말 그가 6두품이라서 그런 것인가? "녹진은 이후 822년(헌덕왕 14년)에 김헌창(金憲昌, ?~822)의 반란이 일어나자 난의 진압에 공을 세우고 5등급인 대아찬(大阿飡)의 관등을 하사받았지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 점에서 녹진은 그 신분이 6두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녹진이 올린 건의는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당시 6두품 층의 일반적인 생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우리역사넷 (history.go.kr)) 그런데 이게 실제로 임용시험에서 그가 5두품이 아닌 근거로 나왔다. (...)

 

녹진은 '집사시랑'이다. 즉, 집사부의 시랑 직책이다. 시랑 직책이 등용된 사례는 대표적으로 신문왕 시기가 있다. 신문왕은 집사부의 중시의 권력을 대폭 강화하여 중앙집권을 탄탄히 하였으며, 상대등을 약화시켰다. 중시는 집사부의 장관이었는데, 집사부는 비서실이니 중시는 비서실장 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시 아래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을 시랑이라고 했다. 신문왕은 왕권 강화를 위해 진골이 아닌 6두품을 두었는데, 6두품들이 시랑 직책으로 대거 들어온 것이다. 이 맥락을 알고 있다면 녹진이 6두품이라고 추측할 수는 있다.

 

녹진은 관직의 대가로 '축년사조', '세조(歲租)'를 받고 있는가? 

 

[神文王] 九年春正月, 下敎罷內外官禄邑, 逐年賜租有差, 以爲恒式. - 『三國史記』卷8, 「新羅本紀」8 神文王 9年 春1月

 

아니다. 헌덕왕은 경덕왕의 다음 왕이다. 고로 경덕왕 때에 녹읍 부활이 있었으므로, 축년사조를 받지는 못할 것이다. 축년사조는 녹읍을 폐지하는 대신 지급했던 것입니다.(수정됨. '관료전 폐지'는 논쟁 여부 있음.)

 

그렇다면, (나)의 반란은 무엇인가? 헌덕왕 때에는 웅주(공주)에서 일어난 김헌창의 난이 암기가 되어 있어야 한다. 김헌창의 아버지 김주원은 원성왕에 의해 왕위계승분쟁에서 밀리게 되고, 명주 지역에 거점으로 호족으로 성장하면서 '명주군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임용고시에서는 명주가 김헌창의 난 거점지냐고 물어봤는데, 참으로 째째한 문제같다. 사실 김헌창의 난이 일어날 당시에는 김주원의 아들 김헌창은 웅천주 도독으로 지내고 있었다. 김헌창은 웅천주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는데, 아버지가 부당하게 왕이 되지 못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김헌창의 난 다음에는 그 아들인 김법문의 난이 이어졌다. 김헌창의 난 당시에는 민심이 흉흉하고 자연재해로 인해 기근도 계속되고 있었다. 김헌창은 신라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면서 국호를 장안(長安)으로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고 하였다.

 

 

* 참조 : 뿌리깊은 한국사 - 통일신라 및 발해 편 / 우리역사넷 / 전공역사 2009년 14~15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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