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박정희 특집] 박정희의 성장과 일본군 입대

취미와 문화 2021. 10. 2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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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박정희의 성장 과정과 일본군 입대 과정까지 간략하게 살펴본다. 박정희는 굉장히 논쟁적인 인물이다. 당연히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도 담겨있으니 유의바란다. 

1. 출생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농촌인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몰락양반이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아버지는 박성빈은 1894년에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가 처형당할 뻔했다. 그리고 같은 해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박성빈은 학문의 길마저 포기하게 되었다. 한편 어머니 백남의는 빠듯한 집안사정에도 부지런히 집안 살림을 책임졌다고 한다.

2. 가난과 분리불안

박정희의 부모는 가난함 속에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지만, 박정희 개인으로서는 강박적인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을 하는 학자도 있다.(전인권, <<박정희 평전>>, 이학사, 2017.) 박정희의 가정 내에서도 크고 작은 불행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그 불행을 자책하던 어린 박정희는 부모에게 자신이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인 강박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과 영양이 부족해서 성장하지 못한 체구는 박정희에게 '가난'이라는 콤플렉스를 심어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박정희는 오히려 영웅, 군대조직, 국가를 숭배하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3. 학교생활과 일본군 입대

박정희는 공부를 잘 했고 싸움도 잘 했다. 보통학교 시절 박정희는 대개 냉정하고 과묵하며, 취미는 목검놀이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집안에서 막내에 힘도 없었지만, 학교라는 사회에서만은 뛰어난 지배력을 보이고 있었다.
박정희는 1932년 대구사범학교라는 명문 학교에 입학했고, 사범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3년간 문경소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당시 1930년대 일제는 한창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교 역시 군대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 가난한 농촌 학교에서 잘 적응하여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이 당시 박정희는 학교에서 몰래 조선어를 가르치기도 했고, 조선의 역사와 시조를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 조선어는 정규과목으로서 가르칠 수 있었으니, 박정희가 대단한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어쨌건 박정희는 언제부터, 왜 하필 일본 군인이 되려고 했던 것일까? 그 배경은 명확하지는 않다. 박정희의 말에 따르면 '큰 칼을 차고 싶어서 그렇다'고도 하고, 일본군이 야외 훈련을 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그렇기도 하다.(조갑제, <<조선일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77>, 1998.1.8.)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박정희는 이순신 전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박정희가 이순신 같이 조선을 지키기 위해 일본 군인이 된 것은 아닐 것이고, 그저 군인의 강함을 좋아했던 것 같다.

4. 박정희와 혈서

사실 논문 사이트를 뒤져봐도 박정희 혈서설을 다루는 학자는 없다. 박정희의 군인 시절은 사실 자료가 없어 연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터넷 상에서는 많은 양의 박정희 비밀요원설, 혈서 조작설이 제기되어 있다.
박정희는 만주군에 입대할 때에 일본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썼다고 한다. 이 주장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기되었는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박정희가 "일사봉공(一死奉公),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들을 바탕으로 박정희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000년대 이래 일각에서 박정희 혈서 조작설이 제기되어 왔다. 박정희 전문가이자 전 조선일보 소속 언론인이 신문에 연재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박정희 동료 교사출신 유증선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 즉시 행동에 옮기는 것이었다.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 손가락에 갖다 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설마 했는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는 것이었다. 박선생은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썼다. 그는 이것을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 그때 편지가 만주까지 도착하는 데는 1주일쯤 걸릴 때였다. 한 보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만주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박 선생 이야기가 실렸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때 만주에 가 있던 대구사범 교련주임 아리카와 대좌가 도와주어서 그 혈서건이 신문에 났는지, 아니면 만주군관학교에서 신문에 자료를 제공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 유증선의 증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이 주장에는 반론이 제기되는데, 이미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서 교련교육을 받아 이미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할 자격이 있음에도, 굳이 혈서를 썼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혈서가 박정희의 군관학교 입학에 대단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박정희 혈서가 보도된 그 일본의 마이크로필름 자료 자체는 한국에서 정치적 편의를 위해 어찌 조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2/11/1998021170345.html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03)

박정희의 생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03

www.chosun.com


그 외에도 우익 일각에서는 박정희가 김구와 만나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의견도 있었고, 심지어는 박정희가 김구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한홍구 교수의 칼럼에 따르면, 박정희와 함께 군에서 근무했던 신현준씨는 해방 이전까지 광복군의 존재조차 몰랐다고 한다. 97년도 중앙일보에서도 조사결과 박정희의 비밀요원설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광복군과의 접점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독립軍 토벌할 기회조차 없었다>, 1997.8.18.)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2/10/p021075000200210230431140.html

 

한겨레21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만주군관학교-광복군-남로당-숙군 협조, 양지만을 좇은 그의 끝없는 변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한 1980년대 초반이었을

legacy.h21.hani.co.kr

https://www.joongang.co.kr/article/3502197#home

 

[실록 박정희시대]11.만주시절 親日논란

박정희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것은 친일및 좌익연루 시비다. 친일성 논쟁의 발단이 된 때가 바로 1940년 2월부터 46년 5월까지의 6년3개월이다. 이 시절 그는 광복군과 관련된 비

www.joongang.co.kr



* 참고자료
전인권, <<박정희 평전>>, 이학사, 2017.
조갑제, <<조선일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77>, 1998.1.8.
'박정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2021-10-28.검색.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2/11/1998021170345.html
실록 박정희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3502197#home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075000/2002/10/p02107500020021023043114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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