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위정척사론과 동도서기론에 대한 설명틀

취미와 문화 2023. 6. 8.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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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필자는 가톨릭과 개신교인들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해두고 싶다.
역사는 역사이고, 필자는 초짜 역사 학습자이다. 그걸 감안하시길.
설명을 위해 단순화하고, 또 단순화했다.
 
1. 역사상 '근대'란 무엇인가?
먼저 초기 근대 서양사부터 간략히 보고 근대를 요약해보자.
루터를 필두로 해서 가톨릭에서 점차 개신교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서구세계에서 '천당으로 가는 문'의 수문장은 당연히 전통적으로 교황이었다.
중세 서양에서 속세 세계의 수장도 역시 교황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이 잔혹하게 마무리되고, 개신교의 등장으로 교황은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
유럽의 각 소국들의 왕, 영주들은 교황이라는 권력체가 허약해진 틈을 타, 자기 영내에 권력을 공고화해나간다.
교황의 추락, 왕권의 강화가 바로 근대 초 유럽의 특징이었다.
 
그런데 각 소국들의 힘이 강해지고, 이권싸움이 점점 심각해진다.
그러다가 큰 전쟁이 터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독일지역에서 '30년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 전쟁의 껍데기는 '가톨릭 파 vs 개신교 파'라고 하지만, 사실 각 지역 왕들의 다툼일 뿐이었다.
철학을 하는 자들은 '어떤 하나님이 진리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같은 고고한 윤리의 문제(형이상학)를 외면하기 시작한다.
이로써 그들은 '내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집중하게 되고, 실험과학을 중시하는 경험론을 발달시킨다. 
 
한편 전쟁은 왕권을 끊임없이 높여주었고, 각 왕들은 나라를 강력하고 부유하게 만들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바로 '절대왕정' 체제가 그것이다.
 
절대왕정에서 문제는 바로 대상인들이 왕실, 귀족과 유착관계를 맺는다는 것이었다.
대상인들에게 특혜가 있고, 다른 소상인들은 억압당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각 기업들이 기술발전을 억제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가 영국의 애덤 스미스 같은 '중농주의(농업 중과세, 상업 규제 철폐)'의 계통을 이은 이들이 자유시장경제를 역설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표되는, 기업들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영국(특히 잉글랜드) 같은 국가들은 기업과 특허 보호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었다.
각 기업들의 기술발전 덕에 노동력을 적게 들여, 많은 제품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재화가 활발한 곳은 당연히 도시가 되었고, 농촌은 점점 피폐화된다.
하지만 도시 기업인 입장에서는 나라가 강성해지고, 지식인들이 활동할 영역도 넓어지고, 인간 전체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아하, 기술의 발전이 곧 윤리적 선이구나!'
 
여기까지.
유럽 식 '근대'의 특징을 알아보았다. 그 특징을 정리하자면, 이와 같다.
1) 전쟁과 경쟁으로부터 심화되었다.
2) 윤리보단 기술을 중시하고, 심지어는 기술로 윤리를 대체하려 한다.
3) 도시를 중시한다.
4) 부국강병을 중시한다.
 
 
2. 동아시아 세계에서 '근대'
 
근대의 가톨릭은 매우 폭력적인 방식으로 동아시아 세계를 정벌해갔다.
가톨릭은 유교를 존중했던 예수회 신부들을 모두 회수하고, 프란치스코회, 도미니크회 같은 이단 척결 교회를 동아시아세계에 파견했다.
이제 교회 신부들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방해를 하는 종자들'을 죽이는 것을 묵인하게 된다.
https://a-book-of-literature.tistory.com/454
 
오페르트 도굴사건에서, 오페르트가 남연군묘를 어떻게 찾아갔던 걸까?
애초에 19세기에 아프리카, 동아시아 등에 파견된 성직자들이 식민지 삼을 곳의 지리를 파악해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리정보는 총칼로 무장한 유럽의 기업체들에게 들어가고, 그곳은 식민지로 전락하며, 그 식민지에는 교회가 세워진다.
오페르트 역시 남연군묘에 묻힌 것들을 훔쳐, 그것을 흥선대원군과의 협상카드로 쓰려 했다.
유학자들 입장에서 이런 패륜아와 하늘 아래 상종할 수 있겠는가?
 
위정척사론자들은 '꽉 막힌 자'들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단순화되어 있다.
이들이 본 것들은, 총칼로 무장한 유럽 기업인들이 무고한 조선 백성들을 협박하고 죽여가며 교역을 요구하는 장면들이었다.
실제로 세도가문과 연결되어 있건, 서원들이 백성들의 피땀을 빨아먹건 간에,
유학자들의 이념은 애민정신이다.
부모의 위패도 불사르고(진산사건), 나라도 팔아먹고(황사영 사건), 국부와 같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파헤쳐 협박하려 한다거나(오페르트 사건), 총칼로 위협한다거나(각종 교역 시비들) 너무나 많은 패악질을 저지르는 '짐승들'과는 도저히 상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 일련의 사건들을 보고 떠올린 것이 있었다.
바로 '춘추전국시대'이다.
유학자들에게 있어 춘추전국시대란 '개개인의 지나친 욕망으로 질서가 무너지고, 그로인해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의 대명사이다.
그리고 조선이란 나라는, 그런 욕망에 찌들어 무너져가던 고려를 부수고, 공공의 안정을 위해 세운 나라이다.
유학자들에게 근대 정신이란 '야만'으로의 퇴보였던 것이다.
 
 
3. 유학자들의 갈등 : 동도서기론
 
그런데 유학자들의 인식에도 문제가 생겼다.
아무리 질서와 백성을 지킨다고 해도, 나라가 강성하게 해야 백성을 지킬 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청나라가 서양의 기술들을 받아들인 장면을 시찰하는 기회가 왔다.
(즉,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조선에서 '영선사'라는 시찰단이 살펴볼 기회가 있었음.)
청나라는 역시 황제가 있는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나름대로 강력한 병사를 키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청나라라는 신뢰감있는 모델이 있었고, 따라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서양식 총포를 들여온다고 해서, 질서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런데 통상 근대라는 것은 어떤 '정신 상태', 혹은 '생각의 경향'을 말한다.
그 생각의 결과물인 총포를 들여온다고 해서 우리 조선이 강성해질 수 있을까?
'아니, 그 근대 정신 자체를 들여와야 해.'라고 생각한 사람이 '급진개화파'라는 이들이다.
(급진개화파를 여기에서 오늘날의 의미에서 '친일파'라고 보는 것은 잘못인 것 같다.)
 
동도서기론자는 어째서 근대적 정신세계를 들여오는 것을 꺼렸을까?
그 근대의 특징이란 것이 지나치게 조선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론하건대,
- 도시 중심 사고와 경쟁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기존의 조선 농촌의 공동체 사회를 부술 수 있다. 농촌 공동체는 조선이 전통적으로 지켜왔던 성리학적 질서, 즉 '두루두루 잘 지내는 상태'를 뜻하는 대동사회의 기반이었다. 
- 서구 문화가 저지른 각종 패악질을 보며, 서구화했다간 '인간의 윤리'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공포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땐, '조선이 부국강병을 위해서 근대사회를 적극적으로 들여왔어야 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근대라는 것이 오늘날의 '근대적인 것'과 등치시키는 것은 성급하다.
'서구의 아메리카 식민지화와 착취'라는 경제적 요인은 서구 문명의 열정과는 별개로, 강력한 운과 우연이 작용한 것이었다.
또, 사회경제사학에서 19세기 근대 자본주의 체제란 야만 그 자체였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내놓았던 주장들이 진실에 가깝던 시기 아닌가.
맑스 경제학을 빌려 생각해보면, 당시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를 해 봤자, '자본가화'보단 '노동자화'에 가까운 것이었다. 
위정척사론자, 동도서기론자의 근대정신 거부를 '미련, 집착, 자존심, 어리석음' 등으로 표현하기엔, 서구의 근대 역시 (강력하긴 할지언정)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4. 정리하면서.
 
당시 조선은 헬모드였다.
지식인들은 선택을 해야 했고, 차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차악의 선택 기준이란 것이 단순히 '자존심'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성에 기대어 선택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유학자에겐 단순 자존심의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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