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어른스러움이란

취미와 문화 2023. 4. 3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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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스러움이란 침묵 속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른들이 가르치기보단 배우려 하는 게 아닐까.

 

근래 사람들 중에 배우려는 어른들은 드물고, 가르치려는 종자들만 많았다.

 

나도 누군가를 가르치려 드는 한심한 종자다.

 

그런 의미없는 지껄임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던 몇몇 이도 있었다.

 

아마 나를 사랑해서 그런 거겠지.

 

...

 

나는 학창시절 내내 다원성과 배려에 대해 끊임없이 세뇌되어 왔다.

 

그래서 나는 다원성과 배려를 보장해야 한다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말했다.

 

누구나 말을 할 수 있고, 누구나 인정받는 세상.

 

눈을 돌려보니 모두가 똑같은 소리를 하면서 싸워대고 있었다.

 

어른은 없는 놀이터에 누가 골목대장이냐 싸우는 꼴이었다.

 

...

 

사랑의 가치따윈 옛 헛소리로 치부된다.

 

배려는 남들을 힐난할 때에나 쓰이는 문구가 되었다.

 

다원성은 자기 입장을 강요할 때에나 쓰이는 문구가 되었다.

 

보수는 사랑과 포용을 잃고, 진보는 앵무새가 되었다.

 

나는 그 사이에 갈등하다, 양쪽 모두를 지지할 수 없게 되었다.

 

차악만을, 차악만을 선택하다가 이상향을 잃게 되었다.

 

그러다 내가 내심 영웅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찬가를 부르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나는 마음에 영웅을 그리면서 남들더러 그 영웅이 되라 말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배려와 다원성, 그리고 사랑의 신을 찬양하는,

 

그런 내가 사랑의 신의 권능을 얻은 듯, 남들을 난도질했다.

 

사랑의 예언가가 된 마냥, 신탁을 받아 사랑을 말했다.

 

...

 

나는 현실적인 게 좋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랑과 배려'가 매번 내 말의 요지였다.

 

그런데 사랑이란 단어가 텅텅 비어있는 것 아닌가?

 

알고보니 내가 말한 텅 빈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문제해결이란 당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내가 말한 사랑은 실존하겠지.'

 

아하, 나는 이기적인 놈이었구나.

 

단번에 그런 결론이 났다.

 

...

 

돌이켜보면 나는 사랑을 잃어 괴로워 해 봤지만, 그 사랑의 실체는 욕망이었다.

 

무언가를 사랑하는데, 왜 자책을 하리오.

 

그 사랑의 종착지를 내 멋대로 정했기에, 그 길을 나 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종착지에 뭐가 있는지도, 심지어 그 종착지가 실존하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 허상일지도 모르는 것에 달려가다, 넘어지고 다치며 혼자가 되는 것이다.

 

달리고 달려서 늘어만 가는 상처들.

 

그 상처들이 모이고 모여, 한 마리의 앵무새를 키운 것 아닌가?

 

...

 

다원성, 배려와 사랑.

 

그 가치들은 이 세계를 살아가는 데에 동력이 되는 동반자가 아니다.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르는 이상향으로서, 내 욕망의 종착지가 된다.

 

그 가치들이 텅 비었고, 나는 그것들에 어떤 것이라도 더 채워넣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남들을 내 욕망의 길에 함께하도록 강제하고 동행자로 위안 삼지만, 나는 진짜 그 가치들의 실체 따윈 모른다.

 

...

 

IMF 세대.

 

나는 MZ세대, 이대남녀 따위의 말보다, IMF 세대라는 것을 믿는다.

 

IMF 사태에 가정에서의 경험은 사랑의 길에 분명한 이정표를 세워두었다.

 

그 이정표의 이름은 '안정'.

 

그리고 현재 내 상태의 이름은 '불안'.

 

안정을 찾으면, 그 다음엔 사랑으로의 길이 있을 거라는 망상.

 

현재는 끝없이 불안한 마음.

 

그 불안을 채우는 것이, 바로 혐오적 중얼거림인 것 같다.

 

남성상을 아버지의 상처에서, 여성상을 어머니의 분노에서 찾은 게 IMF 세대 아닌가.

 

...

 

다원성을 보장하라?

 

배려하라?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것이다. 네 목소리 말고.

 

그 말의 뜻이 그렇게 오염되고 고착화된 지 오래됐다.

 

가르침을 내려주려는 인간들은 그 뜻을 마구 오염시켰다.

 

나 역시 오염에 가담했다.

 

그런 오염이 계속된 결과, 목소리 큰 사람이 배려와 사랑을 실천하는 자의 자리를 빼앗았다.

 

과묵한 멘토는 실종되고, 정치인들만 득실거리게 되었다.

 

경제, 사회구조, 남성권력, 진영정서.

 

사랑 이야기 없는 사랑 이야기만 반복한다.

 

그 결과, 정상인과 이상자를 양분하려는 헛소리들만 넘쳐나게 됐다.

 

"남들 배려를 할 줄 아는 정상인이라면 최소한 인정하는 나의 의견"이라는 비겁한 방어술로 모든 게 정상, 비정상으로 나뉜다.

 

다원성이라는 이름의 다원성 탄압이 존재하게 된다.

 

...

 

이제 학교와 그 부근에서 사랑 타령하는 자는 사이비교인 밖에 없다.

 

나는 욕망과 기대 없는 사랑과 배려를 직접 실천하며 배운 적 있었는가?

 

있었나?

 

친구니까. 선생님이니까. 학교니까. 남자니까. 여자니까.

 

봉사시간, 봉사점수 주니까.

 

역할기대를 남들과 나에게 씌웠던 것을 사랑이라 착각한 것 아닌가?

 

이런 독재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모른다.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

 

감히 생각하건대, 어른스러움의 침묵은 모름과 앎 사이의 갈등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안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닐테다.

 

이해관계에 관해 멍청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혼란스러움을 받아들여 소화해내는 것.

 

마음 속 혼란을 쉽게 설명해내지 않고도 버텨내는 인간이다.

 

그렇게 믿으며, 나는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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