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백일몽과 꿈, 사랑에 대한 짧은 생각

취미와 문화 2023. 6. 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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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 지인이 누군가 나의 뒷담화를 했다고 전해주었다.

 

"너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너무 모든 것을 캐묻고, 자꾸만 알아보려고 할 것 같대."

 

그 말은 나에겐 큰 상처를 남겼다.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2.

나는 항상 공상 속에 갇혀 살아왔다.

 

어릴 적부터 자라난 나의 '공상적 기질'이란 것이 나의 현재를 바꿨던가?

 

나의 현실은 항상 나의 공상과는 달리 흘러왔고, 끝끝내 공상들이 현실화된 적은 없었다.

 

공상 속의 나는 뛰어난 사람이었고, 현실 속의 나는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3.

그럼에도 나의 삶에서 공상은 없으면 안 될 것이었다.

 

한 명의 스승이 내게 해 준 말 때문이다.

 

"지금 안 된다고 한들,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될 것이다."

 

뻔한 말이며,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꿈은 언젠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못 미더웠던 한편,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곤 했다.

 

비록 공상한 바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나는 공상하였기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언젠가 뛰어난 인간이 되고 말리라.'

 

 

4. 

그런데 '뛰어난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으며, 아무리 고민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그 '뛰어난 인간'이란 것이 나의 종착지 그 자체일텐데, 그것이 흐리멍텅하다니.

 

나는 나의 종착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야 언뜻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내 안의 질문을 바꾸었고, 다른 종류의 답변이 나왔다.

 

'꿈을 좇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 자체였다.

 

 

5.

'사랑'이 무엇인지 나는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사랑에 대해 철저히 행동적 측면에서 설명해내고자 했다.

 

현재 내린 사랑의 행동적 정의는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는 낡은 말이었다.

 

'허물을 덮어준다'는 일은 무조건 선한 일은 아닐테다.

 

허물을 덮어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병들고, 어떤 나라는 많은 사람을 죽였을지언정, 사랑 그 자체는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 사랑이란, 완전한 선도 악도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일일 뿐이다.

 

 

6. 

학창시절 내 친구들 중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그들은 내게 사랑을 자주 설파하곤 했다.

 

그 시절 나는 안티 크리스챤이었기에 나는 비웃기 바빴다.

 

'그래서 하나님은 왜 불완전한 인간을 만든 것인데?'

 

그 질문은 기독교인 친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이런 류의 질문들을 따발총처럼 쏘아댔고, 어떤 친구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그것이 왜 그에게는 상처였을까?

 

그의 답변은 이러했다.

 

"나는 네게 '좋은 것'을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는 내가 '하나님의 불완전함'을 지적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다시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었다.

 

내가 던진 공격들이 하나님의 상처는 아물고, 그의 안에 자리한 믿음이 다시 하나님을 '완전무결한 선함과 좋음' 그 자체로 만들고 있었다.

 

 

7.

나의 공격들은 어디서 주워들은 신학적 논제들이었다.

 

신학자들은 당연히 내가 던진 공격과는 비교되지 않는, 거대한 문제들과 싸우고 있을 것이다.

 

신학자들은 누구보다 불신과 맹렬히 싸우는 자들이다.

 

하지만 내가 다시 신학자들에게 '하나님의 불완전함' 질문을 던진다 한들, 그들 역시 답변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답변이 도출되었다면, 문제로서의 소명을 잃은 것이기에.

 

그럼에도 왜 사랑이 실존한다고 믿는가.

 

그것에 대한 나의 답변이 꿈을 좇는 과정에서 도출되었다.

 

이들은 '완전함'을 위해 허물을 덮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8.

학창시절에 교사들과 강사들이 하던 '꿈을 좇아라'라는 말에 코웃음치던 내가 떠오른다.

 

그때의 내가 코웃음친 것은 '그들이 허망한 이야기를 한다'는 점이었다.

 

당시 나의 현실 세계에서 떠올리는 것이란, '돈을 벌어 적당히 먹고 살 수 있도록 공무원이 되는 것'이었다.

 

'공무원'과 '허무맹랑한 꿈' 사이를 저울질하노라면, 한 쪽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무겁고, 한쪽은 너무 공상적이라 가벼웠다.

 

그 당시의 나에겐 그들이 말하는 '꿈'이란 것이 '백일몽'과 같았던 것이다.

 

 

9.

백일몽이란 낮에 꾸는 꿈, 행복하고 즐거운 상상 따위의 일이다.

 

그것은 한 순간의 쾌락이자 현실에 반하는, 거짓에 불과하다.

 

물론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나는 '젊음'이라는 가능성 위에서 백일몽을 자유롭게 누렸다.

 

백일몽을 충분히 즐긴 나는 당연히 '공무원'이라는 현실을 선택하기로 한다.

 

 

10.

하지만 나는 자라나면서, 어쩔 수 없이 각종 어려움들에 부딪친다.

 

그리고 여러 번의 좌절을 한다.

 

살아가면서 좌절하는 일이 있다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좌절에서 일어나기 위해 다시 학창시절에 꾸었던 백일몽 따위에 빠져들게 된다.

 

현재의 나는 백일몽을 빠져들어, 어린 시절에 꾸었던 백일몽과 지금의 것을 비교를 하게 된다.

 

그제서야 나는 '젊음'이 가진 특권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특권을 일부 잃어버린 현재의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백일몽을 뜯어내 버리게 되었다.

 

비록 백일몽이 그 때에 비해 작아졌더라도, 여전히 그것이 거짓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가슴 속에 그것을 기꺼이 품는다.

 

 

11.

'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허무맹랑하게 느껴지는 이유란, 정지한 상태의 '꿈'은 '백일몽'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꿈은 '추구하는 상태의 것'으로, 항상 운동상태에 있어야 '백일몽'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백일몽은 거짓을 상상하는 것 불과하지만, 꿈을 좇는 것이란 백일몽의 거짓을 포용하는 일이다.

 

'꿈을 좇는 것'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12.

현재의 나는 '사랑'에 대해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라는 정의를 내렸다.

 

나의 이 정의는 어쩌면 살면서 바뀌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기록해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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