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우울증 탐구 1 : ‘나는 우울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단계에서

취미와 문화 2023. 6. 29.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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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에 걸렸거나, 내가 우울증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울 경우 삶이 고통스러워진다. 세상에 여러 자기계발 강사들은 우울증을 스스로 이겨냈다는 거짓말을 떠벌리고 다니며, 각 종교단체들은 종교로 우울증을 치료한다는 거짓말을 한다. 어쩌면 만사 노력하고, 종교를 가져 신의 권위에 기대는 것도 인생 전체에서 좋은 선택일 수는 있지만, 우울증 치료와는 거리가 멀다. 

우울증은 치료하는 것이다. 만약 '내 몸에 두드러기가 났다'고 한다면, 그걸 운동하고 힘을 줘서 없앤다거나, '나의 마인드를 개조해서 두드러기가 나지 못하는 인간이 되자'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접근이란 걸 직관적으로 알 것이다. 문제는 두드러기와는 달리 우울증은 겉으로 보이지 않으며, 내시경이나 각종 의료장비로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은 오로지 대화와 행동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신과 진료를 받거나 상담을 받지 않는 이상, 일상생활 속에서 '나의 우울증'을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내가 이미 우울증 증세를 겪고 있다면, 오히려 자책 속에서 '내가 우울증이면 안되며, 우울증일 리가 없다'라는 생각이 쉽게 떠오를 수 있다. 즉 병식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우울증이 실제인지 아닌지를 판명하기 위해서라도, 전문기관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다음은 우울증 대처하는 정신적 자세를 정리해보았다. 필자가 적는 것에 의학적인 별도의 근거는 없고, 모든 내용의 결론은 의사 혹은 상담사를 찾아가 진단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글에서 "환자", "나"라고 하는 인물들은 가상의 인물이며, 하나의 케이스에 불과하다. 우울증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들의 증상이 '우울증의 증상 범위'를 포괄하기 어렵다.

 


 
1. “패션 우울증”으로 매도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한창 TV에 우울증에 걸린 연예인들이 많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들은 우울증 캐릭터(그들이 실제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그걸로 돈도 잘 벌고 잘나가다보니, 우울증을 따라하는 이들도 많이 생겼다. 인스타그램에 감성 젖은 짧은 글을 쓰기도 하고, 실제로 우울한 얼굴로 패션을 완성하는 이들도 있었다.

문제는 이런 우울증의 유행으로 실제 우울증 환자들은 우울을 오히려 호소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에게 나의 우울을 먼저 인정받은 후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인상까지 들게 된다. '이 세상엔 우울 같은 건 널리고 널렸기 때문에', 나의 우울은 '패션 우울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를 제기하자면, 실제 우울증이든 아니든 간에, 남들은 당신의 사연을 듣고 우울증인지 아닌지 판명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과 지성, 그리고 정성과 진심어린 태도가 없다. 우울증이 아닌 사람은 우울증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우울증이 이미 나은 사람들마저 우울증에 걸렸던 자신을 이해 못하는데 당연한 현상 아닌가?

 



2. 우울의 근원을 찾아 과거를 헤짚지 말자.


"내 인생은 왜 이런 걸까?" 이런 생각이 자주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는 대화에 집중해서 그런지, 내 인생이 불행하다는 의식이 잠시 사라진다. '내 안의 우울세계'와 '현실세계'는 단절되어 있기에, 나는 남들과 대화하는 동안 내 안의 우울세계로부터 벗어나 현실세계로 잠시 돌아오게 된다. 그렇기에 겉에서 보기에는 우울증 환자는 "우울증을 잘 숨긴다"라고 이야기되지만, 사실은 환자가 '우울증에 걸린 나'와 '현실의 보통사람'을 구별해서 대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듯, 우울증 환자는 '나 자신'을 '이 사람'으로 대하고, 대화하고 있는 남을 '저 사람'으로 대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환자의 머릿속에 "내 인생은 왜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강박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또 다른 식의 문장이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하며, 각종 이미지들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 강박적인 생각들은 환자의 의지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문장이나 이미지가 '상상' 속에 있다고 하기에는, '상상'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것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상상이란 건 잠시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 순간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어쨌건 그 상상 속에서 나의 인생을 그려본다. 여기에서 보통사람이라면 엄마 생각, 아빠 생각, 연인 생각 등 일상적인 것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들과 함께했던 행복, 슬픔, 미래 등 여러가지 다채로운 생각이 가능하다. 하지만 강박에 걸린 어떤 환자에게 과거라는 것은 매우 편향되어 있다.
 

'옛날에 아버지 어머니가 서로 싸웠는데 나는 혼자 방에 갇혀 울고 있었으며, 결국 둘은 이혼했다. 그때부터 나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나는 그 이후로 극도로 어두워졌는데 그 여파인지 친구관계도 어려웠고 왕따에 시달렸다. 생각해보니 지금껏 주변사람들은 몇 번씩이나 나를 탓하곤 했는데, 사실 나에게는 장애가 있으며 아직까지도 그 장애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인생'을 이렇게 적어나가기도 한다.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도 이렇게 쓰기도 한다. 다만 환자들에게는 이런 생각이 강박적으로 반복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이야기에 더욱 치명적인 이야기들이 덧붙는다는 것이다.

우울증 관련 커뮤니티들을 보면, 이런 사연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위의 사연보다는 훨씬 심하고 치명적인 사연들이 많이 존재하며, 그 사연들에 "고민상담"이라는 명분을 붙여놓은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 나서서 고민상담을 해주었을 때, 그 상담이 '해결'로 연결이 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연은 사연자가 몇 년에 걸쳐 노력해도 안 되었던 것들임이 분명하며, 또한 '현재 해결 안되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사실 사연자에게도 '고민상담을 통해 무언가 해결한다'는 발상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연이 '내 안에서', 혹은 '커뮤니티 안에서' 계속해서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우울증을 인정'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나의 우울은 정당하다"는 생각으로써, '내 안의 우울세계'와 '현실세계' 간의 괴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과정이다. 매일 우울감에 시달리는 자들은 '자신을 우울증 환자라고 지칭하는 것'부터 문제를 겪으며, 자신을 우울증 환자라고 부르는 것을 제3자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우울증 커뮤니티'에 자신의 사연을 올린다. 

여기에서 과거에 대한 '합리화'라는 과정이 매우 중요한데, 통상 우울증을 방치하면 '내 안의 우울세계'를 기준으로 '현실세계'를 맞추어나가는 합리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환자는 점점 과거를 파고드는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때 제3자가 보기에는 환자가 현실도피적인 성향을 띠는 것 같이 보이게 되는데, 보통 이것을 "그가 무기력증으로 인해 생각 자체의 힘을 잃어버렸다"라고 착각하게 되지만 사실 환자가 과거의 이미지를 복원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왜 내 안의 우울세계를 나 자신과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하며, 굳이 왜 우울한 과거를 복원해내려 노력하게 되는 것일까?

사실 여기에서부터는 의학의 영역으로 호르몬 문제 등이 지적되며, 약물을 통해 뇌의 작용을 조절해야 한다는 해결중심의 입장이 적용될 수 있다. 사실 그 합리화 노력 자체가 필요없으므로, 합리화 자체를 중지시키는 과정이 바로 '약물 투여' 과정이라는 것이다. ('약물 투여'라고 하니 마치 구속복 입힌 환자에 투여하는 것 같지만, 감기 환자에게 처럼 '약 먹이는 일'을 지칭하고자 한다.) 

"합리화" 과정에 대해서 탐구해보자면, 한국 내에서 일어났던 커다란 참사들을 떠올려보면 될 것 같다. 각종 국민 전체에게 강력한 충격을 주었던 사건들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가령 최근의 참사에 대해서 소방방재의 입장에서 그것이 사고라던가, 군중심리학, 군중유체학 입장에서 행정적 책임이라던가 다양한 입장이 제기되었고,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참 불거졌다. 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기 이전에, 그 각종 의견들이 제시되어야 할 만큼 국민들에게 충격적이었다는 것이다. 가슴아프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굳이 이유를 붙이지 않아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가슴아픈 일이 일어났기에 거기에 적용될 만한 각종 이유들 찾아야만 하게 되는 것이다.

심리적 충격이 발생한다면 그 원인을 찾게 되어 있고, 그 충격에 관련된 문제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문제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구조를 부여하는 것이 곧 '합리화'라는 것이다. 다시 환자의 경우를 보자면, 그가 자신이 구성한 '불행한 과거'를 좀 더 세밀하게 복원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과정이 있기 이전 단계가 존재하게 된다. 환자가 큰 충격을 받았든 아니든 간에, 그는 그것을 합리화해야 할 필요를 직관적이고 반사적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환자가 느끼는 충격은 매우 개인적이다. 고통의 객관적인 지표가 없다. 환자 자신은 정말로 아프다는 것, 아픔이 실존한다는 것부터 증명해내야 하는데, 환자가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할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프다"는 병식을 갖기 위해,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무언가 힌트를 찾아야 하는 상태가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순간', '가장 힘들었던 순간' 등 현재의 자신이 이렇게 아픈 이유를 합리화하기 위해 사연은 조금씩 더 강력해지게 된다.

이 합리화 과정이 비극적인 이유는, 과거로부터 자신에게 일어난 각종 치명적인 일들을 세밀하게 분석한다고 해도,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 자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샅샅이 뒤진 아픈 기억들은 오히려 더더욱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주게 되며, 그 기억으로 인해 현재의 삶도 바뀌게 된다. 그 불행한 기억과 관련된 주변인물들과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기도 하며, 자신이 벌인 끔찍한 일이 우회적으로 자신에게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등, 다양한 문제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 비극의 절정은 불행한 기억과 관련된 인물들이 현재의 환자가 갖는 문제의식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전부 잊어버린 경우가 많으며,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과거는 이미 사라져버렸으며, 설령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상대방에게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정리해보자. '우울증'이라는 현상이 마치 과거의 탑 위에 발생된 것 같지만, 사실은 우울증이라는 병은 [아픔-합리화-현실 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들-슬픔] 등 각종 다양한 인과로 혼잡스럽게 얽혀있으며,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라고 하기에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우울증 커뮤니티에서 "고민상담"이라고 하는 명분으로 과거의 사연을 말해도 전혀 마음이 풀리거나 시원해지지 않는 이유는, '과거의 아픔'과 '현재 겪는 우울증' 간의 관계를 원인-결과로 두는 것이 오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어리니까 우울증일리가 없다', '나는 별로 심각한 일을 겪은 적이 없는데 왜 우울하지?' 등의 생각은 버리자. 과거에 겪은 사연이 객관적으로 치명적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으며, 현재의 내가 나 자신의 아픔을 합리화하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그와 관련하여 생각해볼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어떤 충격적인 사연이 있어, 계속해서 강제로 그 기억이 떠올라 부정적인 신체반응을 지속적으로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충격적인 사연’이 어느 정도가 객관적으로 ‘병에 걸릴 만한’ 사연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혹자는 남들의 증상과 사연을 나와 비교하곤 한다. 전쟁, 이혼, 폭력, 강제 추행 등 극단적인 사례들로 인한 우울증과 외상후 스트레스들이 소개되고, 나의 사연은 별 것 아닌 것만 같다.

하지만 '사연의 심각성'이 치료를 결심하는 척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친구관계, 가족관계, 넘어진 것 등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더 치명적인 충격을 준 과거를 찾아 합리화하려는 본능은 자신의 아픔을 더 키운다.

 

 

 

3. 덧붙여 : 주변사람으로서 우울의 '상담'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것을 쉽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한편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자들도 있다. 이들 모두를 포괄하여, 편의상 '당신'이라고 지칭한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것'은 쉽다. 왜냐하면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의 우울을 숨기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당신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으려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물론 자신이 더 상처받지 않기 위함인지, 정말 이타적인 인간이라서 그런지는 자기 스스로도 알 수 없다. 우울증 환자 자기 자신의 심리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것이 너무 쉬우며, 심지어는 내가 그들을 직접 치료 한 적 있다'는 자들이 가끔 있다. 이들은 우울증 환자에게 배려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거나, 일시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를 지울 수 있는 분위기메이커인 경우에 속한다.

 

한편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것이 너무 어려우며, 어떻게 손을 대야 할 지 모르겠다'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우울증 환자를 조심히 다루는 것을 넘어, 자신이 '치료하겠다'는 욕심까지 가진 경우가 많다.

 

우울증 환자들은 몇 번의 지인과의 상담, 커뮤니티에서의 경험 나눔, 그리고 인터넷에서의 정보 수집 등의 과정을 거쳐, 각종 '치료요법'들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당신은 여전히 그 치료요법들이 '효과있다'라는 상식으로 우울증 환자들에게 접근하여, 그 요법들을 사용한다.

 

우울증 환자와 당신은 가끔 '근래에 심각해진 우울(증)'에 대해 논하곤 한다. 그리고 그 대화의 마지막은 우울증 환자의 분노 혹은 슬픔 때문에 격정 속에 마무리되거나, 아니면 '아, 그런가?'라는 환자의 끄덕임으로 뜨뜻미지근하게 마무리된다. 당신이 만약 해결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생각을 전환하여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샤워를 통해 기분 전환하기', '잊어버리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마인드 컨트롤하기' 등의 의견을 제시한다. 한편 당신이 공감을 좋아한다면, '함께 눈물 흘려주기'라는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문제는 그 상담의 대상이 주로 우울증 환자의 '사연'에 집중되며, 그 접근은 대개 잘못됐을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우울증 환자 증언하는 '과거의 슬픔'은 이미 사라져 바꿀 수 없으며, 현재 겪는 의문의 아픔을 합리화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구성한 사연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하고 비판하거나, '그 사연이 너무나 슬프다'며 공감하는 등의 과정은 일시적으로는 도움을 줄 수는 있으나, 근본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장기적으로는 '남들이 나를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나는 나의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라는 우울증 환자의 자책 요인을 더해주기도 한다.

 

당신은 해결사가 되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만약 해결사가 되려 한다면, 우울증 환자가 만들어낸 '과거의 이야기'에 빨려들어가서는 안 된다. 당신이 우울증 환자의 '사연'이 아니라, 우울증 환자의 '병'을 대한다면, 환자를 대할 때 지나친 효능감이나 지나친 막막함은 느끼지 않게 될 것이다. 당신이 의사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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